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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돌아온 환상의 극화 : 다쓰미 요시히로 《동경 표류일기》 (하)

고전 만화가 인터넷으로 불법 공유되는 시대 영문판 스캔본의 중역과 아마추어 번역의 어두운 추억을 지나서, 에릭 쿠 감독의 영화와 정발 단행본 《동경 표류일기》로 ‘극화’의 창시자를 다시 만난다

2020-12-16 박수민



 현실로 돌아온 환상의 극화 : 다쓰미 요시히로 《동경 표류일기》 (상)

-고전 만화가 인터넷으로 불법 공유되는 시대

  영문판 스캔본의 중역과 아마추어 번역의 어두운 추억을 지나서,

  에릭 쿠 감독의 영화와 정발 단행본 《동경 표류일기》로 ‘극화’의 창시자를 다시 만난다


박수민



다쓰미 요시히로, 극화의 창시자

다쓰미 요시히로의 만화가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건 2015년 <동경표류일기>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싱가포르 영화감독 에릭 쿠(Eric Khoo)의 작품 <타츠미 TATSUMI>(2011)를 통해서다. 나는 이 영화에서 마침내 원작의 언어를 귀로 들을 수 있었다. 작가와 그의 작품을 존경한 에릭 쿠 감독은 영화를 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만화 그대로 옮겼다. 나는 이 영화를 애니메이션이라 부르지 않는다. <동경표류일기>는 스크린에 옮긴 만화책이다. 어느 밤 홀로 창백한 모니터를 통해 영문판 스캔본으로 보고선 감동하고 전율했던 그의 단편 만화들을 극장의 스크린으로 다시 읽는 경험은 감동적이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빚을 갚는 기분이기도 했고.

 

영화는 ‘GEKIGA, 극화(劇画)’를 소개하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성인 대상 만화에 리얼리즘을 도입한 장르로 1957년에 다쓰미 요시히로가 고안, 70년대에 비약적으로 진화하여 그 후 만화 표현 양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프닝은 1995년, 데즈카 오사무 7주기 추모회에 참석한 다쓰미 요시히로의 모습이다. 만화가를 동경하며 천재만화소년이라 불린 15살에 데즈카 오사무를 처음 만난 이래, 만화만 생각하고 그려왔던 수십 년 세월. 지난 기억에 견딜 수 없어진 그는 혼자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자기 얼굴에 시커멓게 선을 그어 “환상의 극화에 쏟아부었던 청춘 시절”을 떠올리다 표표히 떠나는 작가의 뒷모습에서 타이틀 ‘TATSUMI’가 뜬다.

 

이 오프닝은 작가의 자전적 일대기를 그린 《극화표류 劇画漂流》의 에필로그를 옮긴 것으로, 단행본(2008)의 마지막 4페이지는 만다라케 연재(1995-2006) 당시엔 첫 부분이었다고 한다. 영화 <동경표류일기>는 2차 세계대전 후 오사카에서 12살 때부터 형의 영향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다쓰미가 투고 왕 소년에서 만화가가 되고 극화를 창안하기까지 《극화표류》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중간마다 대표 단편 작품을 삽입한 구성이다. 7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소외된 인간성에 주목했던 그가 그린 <지옥>, <내 사랑 몽키>, <사나이 한 방>, <사람 있어요>, <굿바이>는 원작의 컷을 그대로 살린 먹색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감독이 되기 전 만화를 그린 경력이 있는 에릭 쿠에게 그랬듯, 다쓰미의 만화는 독자의 가슴 속을 쿡쿡 찔러대는 힘이 있다. 그것은 어떤 가식도 치장도 없이, 무자비한 현실을 시커먼 펜으로 쓱쓱 그려낸 이야기에서 나온다. 꼭 만화가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그의 작품에선 다른 만화엔 없는 진짜 어둠을 느낄 수 있다. 이 어둠은 전후를 살아온 세대의 분노와 절망이다. 젊은 다쓰미에게 환상이었던 극화가 탄생한 토대는 만화로 담기에 이미 넘쳐나는 현실이었다.

 

놀라운 건 이 일본 작가의 옛날 만화 속 어둠이 한국의 현세대에게도 읽히고 있는 점이다. 내가 십몇 년 전 다쓰미 만화의 영어판을 중역한 개인 번역본을 만들려 했던 지극히 단순한 이유는, 다른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쓰게 요시하루와 다쓰미 요시히로의 만화가 간혹 실렸던 만화잡지 《새만화책》이 그나마 대안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다쓰미의 단편들은 물론이고 《극화표류》까지 아마추어 번역으로 공유되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만화 연구자의 SNS를 팔로우하고 어떤 애호가의 게시판 글이나 구글 드라이브 링크를 클릭하는 현대의 젊은 독자들은 다쓰미의 옛 망가에서 뭘 보는 것일까? 그들 각자의 어두운 현실은 아닐까?

 



고전과 독자가 서로를 구하는 방법


영화 <동경표류일기>는 <굿바이>를 끝으로 자신의 만화책을 덮은 다쓰미가 서점 곳곳에서 각자와 서로의 만화를 읽고 있는 캐릭터들과 마주치며 마무리된다. “나는 75살이 되었습니다. 아직 그리고 싶은 세상이 많습니다.” 책상 앞에 앉은 작가의 그림은 현실의 다쓰미로 변한다. 연필 스케치, 잉킹, 지우개질. 분명한 노동으로 한 폭의 만화가 완성된다. 에릭 쿠는 감독으로서 예술적 욕망이나 해석을 더하는 대신, 전 세계인에게 다쓰미의 만화를 그저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었다. 아직 그릴 게 많다던 다쓰미 요시히로는 2015년, 향년 79세로 영면했다. 그는 데즈카 오사무보다 26년을 더 살아서, 환상의 극화에 건 일생의 노력이 합당한 평가를 받는 것을 보고 떠났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의 만화가 한국에도 단행본으로 정식 발매되었다. 양인들의 아카이브 주변을 떠돌던 나의 오랜 죄가, 중역으로 오염되어 내내 씁쓸하던 과거가 얼마간 씻어지는 기분이다. 커뮤니티 게시판 등지에서 다쓰미의 만화를 공유하던 업로더들도 정발이 나왔다며 단행본에 실린 단편들을 스스로 삭제하는 걸 보며, 그야말로 감회가 깊었다.

 

파랗고 붉은 한국판의 하드커버를 매만지며 결코 잊지 않는 것은, 이 빚을 갚아준 노력의 주체가 바로 옛 애호가들이란 사실이다. 과거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우리에게 생소한 일본 망가의 대가들과 그들 작품을 알음알음 소개하고 알렸던 이들이 지금은 전문 번역가나 편집인 등 다양한 전문가의 영역에서 마땅히 나와야할 작품의 정발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일본 만화 애호가들에게 블로그 ‘청정하수구’의 존재와 ‘대산초어’라는 이름의 주인께서 온라인을 넘어 유형의 결과물로 전해주고 있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쓰미 요시히로의 한국어판 단편 선집 《동경 표류일기》가 나오기까지 그가 쏟은 노력에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지난날 한국에서 다쓰미 요시히로의 만화는 극화의 창시자로서 역사에 존재하나 정작, 작품을 정식으로 만나보긴 힘든 환상의 작품이었다. 수십 년이 걸렸긴 했지만 이제 환상의 극화는 현실에 실재하는 책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공유의 경험을 얘기할 순 있을지 몰라도 해적질은 불법에 지나지 않는다. 중역은 오역일 뿐 원작의 진정한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이미지 파일은 종이에 인쇄한 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독자의 보고자 하는 욕망은 구매자의 숫자로 응답해야 한다. 고전과 독자는 이렇게 서로를 구한다. 나는 이 책 《동경 표류일기》가 많이 팔리길 소망한다. 그래서 앞으로 《극화표류》를 포함해 다쓰미 요시히로의 다른 작품도 정발되길 바라며, 쓰게 요시하루 등 더 많은 대가의 환상의 만화들이 정식으로 소개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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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민

만화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탐독의 만화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