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네이버 웹툰 《칼부림》 속 복식 이야기 웹툰으로 보는 우리나라 복식 이야기
권병훈(복식사 전공 <오례> 대표/영화 '남한산성' 복식 자문)
인생도 그렇고 한 나라의 운명에 있어 누구나 흥망성쇠를 겪지만, 특히 조선은 518년의 역사 동안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을 겪었다. 특히 가장 큰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 壬辰倭亂과 정묘호란 丁卯胡亂·병자호란 丙子胡亂일 것이다. 시기 별로 크게 차이 나지 않았던 이 세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조선의 국토는 황폐해지었고 국가 재정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17세기에 일어난 기후변화로 인해 조선은 여러 차례 대기근을 겪으며 암흑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고일권 작가가 연재하고 있는 네이버 웹툰 《칼부림》은 이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모진 삶을 사는 ‘함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17세기 초 조선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고일권 작가의 경우 붓을 이용한듯한 담백한 그림체 때문에 다소 자극적인 색채에 익숙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진한 땀 냄새에서 전해져 오는 감동을 원하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칼부림은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고일권 작가의 경우 웹툰을 연재하기 전에 해당 시대의 역사를 전공하는 전문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고증에 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전쟁, 정치, 경제, 역사, 복식 등 다양한 분야를 고일권 작가는 여러 전문가의 자문을 받으면서 그림을 표현하고 있음으로 이번에는 고일권 작가가 표현한 칼부림 속 조선 여인의 복식 차림에 대해서 언급해보도록 하겠다.
예복으로 3~4겹의 저고리를 껴입어야 했던 조선의 여인들
△ 출처 : 한중록, 혜경궁과 그들 25P, 김희선 作
조선 시대 여염집 아낙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아쉽게도 남아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서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개개인의 집안 경제 사정에 따라 상류층이 입던 의복들을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옷감으로서 형태나마 비슷하게라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입었던 옷도 어쩔 수 없는 차이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반가의 여성들이나 왕실 여인들의 경우엔 예복 한 벌을 갖추기 위해서는 3겹의 옷을 껴입어야 했다. 이를 흔히 삼작 三作 저고리 차림, 또는 당의 일작 一昨 등으로 부르는데, 예복용 저고리나 당의를 입을 때 3~4겹씩 껴입는 것을 말하며 시대별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뒤에서 언급하는 대부분의 반가나 궁궐의 여성들은 이러한 차림을 특별한 의례가 있거나 매일 갖춰 입으면서 풍성한 실루엣을 완성했다. 이러한 차림새가 다소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동시대 남성들의 예복이자 관복인 단령 團領을 갖추기 위해서도 철릭-답호-단령의 세 벌을 겹겹이 껴입어야 했던 것처럼 조선 시대 여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겹의 옷을 껴입었던 것으로 봐야 할 듯 하다.
조선 시대 여성 하면 우리는 은폐 隱蔽를 가장 먼저 떠올리며, 보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남아선호사상, 남존여비 등 옛날에 남아있던 다소 잘못된 인식을 하게 한 사회가 조선 시대라는 인식이 박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전기까지는 남, 녀가 부모로부터 동등하게 상속을 받았고, 여성의 인권이 조선 후기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었다는 내용도 있는 만큼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에 비해 낮았다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지위가 추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남성이 꼭 필요했던 사회, 즉 힘을 쓰거나 전쟁이 잦은 사회일 경우 남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조선의 경우 임진, 정묘, 병자년의 외침과 연관이 있다. 특히 임진왜란의 경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왜군에 의해 전 국토가 유린 당했기때문에 전란 이후에도 집안을 지키거나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남성의 존재를 더욱더 부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복식에 영향을 미치던 명나라가 1644년 멸망하면서 조선의 복식 제도는 17세기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남성의 경우 시대의 상황과는 반대로 점점 소매 넓은 포와 더불어 철릭 등 기존의 의복의 형태가 급변한다. 여성의 경우는 반대로 풍성했던 실루엣의 옷들이 점점 작아지는 경향이 보이는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된다. 18세기 학자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지금 세상의 부녀들의 옷은 저고리는 너무 짧고 좁으며,……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심한 경우에는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러운 옷일까.”
△ [그림 3]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조선 여성들의 차림새를 묘사한 그림들
△ [그림 4]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조선 여성들의 차림새를 묘사한 재현작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지는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해 여성들의 복식이 점차 기존의 복식에 비해 작아지다가 18세기에는 옷을 입고 벗기에도 무척 불편하게 꽉 조이는 형식으로 착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루엣의 변화는 사진 1)을 통해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품이 좁아졌으며 소매 또한 좁아졌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그 뒤 시대인 18세기의 경우 저고리의 소매 넓이와 길이, 품이 모두 작아지는 대신 반대로 치마는 항아리를 덮은 것처럼 풍성하게 변화했는데, 이를 흔히 상박하후 上薄下厚의 실루엣으로 말한다. 상박하후라는 말은 사람을 대할 때 쓰는 용어이기도 하지만 위는 좁고 꽉 끼는 형태와 아래는 풍성하게 만든 옷의 실루엣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즉 17세기는 풍성했던 16세기의 옷이 점차 좁아지는 18세기의 복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