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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다음 웹툰 《발자국이 녹기 전에》 속 관복 이야기

웹툰으로 보는 우리나라 복식 이야기 - <발자국이 녹기 전에>로 보는 조선 후기 관복

2021-01-05 권병훈



다음 웹툰 《발자국이 녹기 전에》 속 관복 이야기
웹툰으로 보는 우리나라 복식 이야기

 

권병훈(복식사 전공 <오례> 대표/영화 '남한산성' 복식 자문)


 

지난 시간에는 레진코믹스의 《야화첩》이라는 작품을 통해 조선 시대 한량과 별감 등 화류계를 쥐고 흔들던 인물들의 복식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그럼 이번에는 다시 진지하게 궁중의 복식으로 넘어가서 2019년 완결된 다음(Daum) 웹툰인 《발자국이 녹기 전에》라는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조선 후기 관복 이야기를 한번 짚어 보도록 하자.

 


조선 후기 관복 제도

일단 관복 官服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어떤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을까? 복식사를 전공한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조선 시대 관리들이 입었던 다양한 예복들을 죽- 열거하면서 지식을 뽐냈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복=사모관대라는 공식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모관대라는 것은 조선 시대 관리들이 머리에 쓰던 사모 紗帽라는 모자와 관대 冠帶라고 해서 관리들이 입는 의복의 총칭을 말한다. 흔히 우리에게는 전통 혼례 속 신랑이 입는 차림새, 혹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볼 수 있는 신하들의 궁중 근무 시에 착용하는 옷으로 연상하기 쉽다. 또한, 이들의 품계 品階를 구분하기 위해서 홍, 청, 녹색으로 구분된 관복을 착용하면서 서로 간의 신분을 알아보기 쉽게 연출하는 까닭에 시청자들도 그것이 실제 조선 시대 관복제도와 일치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실제 조선 후기 관복도 이와 같았을까?


△ <표 1> 조선 후기 문무백관들의 차림새 : 조복, 제복, 공복, 상복, 시복, 융복, 군복, 편복

먼저 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부터 알아보자. 앞서 으스대며 자랑하던 필자의 말처럼 조선시대 관리들의 관복을 나열할 경우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 상복常服, 시복時服, 융복戎服, 군복軍服으로 나열된다. 그 종류만 해도 총 7가지인데 조복은 왕의 즉위식이나 조회와 같은 성대한 의식에 착용하는 최고급의 차림새를 말한다. 흔히 즉위식에서 문무백관들이 금관을 쓰고 붉은색 포를 걸친 모습이 곧 조복 차림이니 바로 연상될 것이다. 제복은 조선왕조에서는 유교 국가 운영을 위한 오례五禮 중에 하나인 길례吉禮라고 해서 각종 왕실의 제례가 길례에 속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는 종묘·사직대제에 착용하는 제관들의 복식이 바로 제복이다. 조복과는 달리 흑색의 관을 쓰고 흑색의 포를 걸친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공복은 조선 전기에는 그나마 착용례가 보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가례 시 주인主人이, 혹은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거나 삼일유가 시에, 그리고 저번에 언급했던 왕세자 성균관 입학 시 스승인 박사博士가 착용하는 지극히 소수의 의례에만 착용하는 의복으로, 복두幞頭라는 사모와 비슷한 관모를 쓰고 홍, 청, 녹색의 소매 넓은 포를 입으며 야자대也字帶라고 하는 허리띠를 두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관복 제도는 중국 송나라의 관복 제도와 유사한 것으로서 고려 시대에도 이를 관복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상복이 곧 우리가 익숙한 관복 제도로서 흔히 흉배가 달린 관복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시복은 상복과 흡사하지만 옷감의 재질, 용도, 색깔 등의 차이가 보이는 것으로 관료들이 의례에 참석하지 않고 단순히 해당 관청이나 궐에서 집무를 볼 때 착용하던 간편하고 담백한 차림이었다. 융복이나 군복은 왕이 궐 밖으로 나서서 선대왕들의 능에 능행陵幸을 나서거나 혹은 피난을 갈 때 등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며 왕을 모시거나 전투에 임할 때 신하들과 왕이 겉옷 혹은 갑주甲冑의 받침옷으로 착용하는 의복이다.


먼저 요즘 사극을 보면 1품에서부터 3품에 해당하는 당상관들은 홍색포를 입고, 4품에서부터 6품까지는 청색포를, 그리고 7품에서부터 9품 말단 관리들은 녹색포를 입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와 같은 차림은 우리가 앞서 언급한 상복常服의 차림과 유사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경우 이러한 흉배 달린 관복, 즉 상복의 색은 현록색玄綠色 빛깔로 통일된 상태였다. 이해하기 쉬운 상태로 설명하자면 인터넷을 켜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검색해보자. 가령 예를 들면 정조의 라이벌로 알려진 심환지沈煥之 선생이나, 혹은 정조의 최측근 인물로 유명한 채제공蔡濟恭 선생, 혹은 대동법大同法으로 유명한 김육金堉 선생, 아니면 조선 말기 권력을 틀어쥐고 국정을 운영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검색해보면 그들의 관복 입은 초상화를 볼 수 있다. 그들 모두 당상관의 품계에 해당하는 차림을 하고 있지만 사극에서 흔히 보던 짙고 붉은 홍색 관복은 입고 있지 않고 있고 오히려 봄날 들판에 자리한 쑥색의 색과 흡사한 색으로 된 짙은 초록색의 관복을 입고 있다. 이를 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사극에서 녹색 관복은 7~9품 관리들이 입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품계가 낮은 시절에 초상화를 그렸나?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이러한 색깔의 관복을 조선시대에는 흑단령黑團領이라고 불렀다. 단령團領은 곧 목깃이 둥글게 만들어진 옷을 말하고, 흑은 곧 흑색을 말하는데, 흑색 역시 검정색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조선 초기에는 어두운 청색 빛깔의 관복을 입고 흑단령이라고 불렀으나 후대에 와서는 관복의 유행 색깔이 녹색 계열로 변화하면서 명칭은 흑단령으로 그대로 두고 색깔만 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색깔이 둘 다 쑥색 계열인데 그들의 품계는 어떻게 구분했을까? 그제서야 바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 관모와 허리띠, 흉배라는 장치다. 관모는 앞서 얘기했듯 사모라는 모자를 쓰게 된다. 그렇다면 사모에 좋은 비단을 썼거나 조금 더 화려하거나 정교하게 만든 것이 당상관과 당하관을 구분했을까? 실제 조선 시대의 초상화나 문헌 기록을 보면 당상관은 문사각紋紗角 사모, 당하관은 단사각單紗角 사모를 썼다는 것이 확인된다. 문사각의 경우 사모의 뒤편에 달린 두 개의 뿔에 무늬가 있는 옷감을 사용하면 문사각, 그리고 무늬가 없을 경우 단사각이라고 부른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관복 허리띠의 경우 품대品帶라는 것을 사용했는데, 이 품대의 재료는 서각, 금칠한 나무, 은칠한 나무, 흑각 등 다양했다. 정 1품과 종 1품의 경우 서대犀帶라는 것을 사용했는데 물소뿔을 이용해서 만든 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말한다. 그리고 정 2품은 삽금대鈒金帶, 종 2품은 소금대素金帶를 사용했는데, 여기에서 삽鈒이라는 글자는 허리띠 장식을 조각했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되며, 소素라는 글자는 조각이 없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삽금은 조각한 장식에 금칠을 했다는 것이며, 소금은 조각 없는 장식의 테두리에 금칠을 했다는 뜻이다. 이어서 정 3품은 삽은대鈒銀帶, 그리고 종 3품부터 4품까지는 소은대素銀帶를 사용했다. 삽금, 소금과 마찬가지로 조각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5품부터 9품까지는 흑각대黑角帶를 사용했는데, 검은 빛깔을 띄는 뿔로 장식한 허리띠를 말한다. 다음엔 시선이 흉배로 향하게 된다. 흉배는 관복의 가슴과 등 부위에 짐승과 온갖 길상문을 자수해서 붙인 것을 말한다. 흔히 문관은 학, 무관은 호랑이를 연상하면서 쌍학과 단학, 쌍호와 단호로 구분 지어 당상관과 당하관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물의 개체 수를 흉배에 몇 마리를 표현했느냐로 품계를 구분하는 것은 1800년 정조 임금 말엽에 시행된 정책이고, 그 이전까지 흉배에 동물 몇 마리를 수놓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17세기 인물인 김확(1572~1633)의 출토 복식 속 단령포에 달린 흉배를 보면 백한白鷳 3마리가 표현되어 있으니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당상관의 경우 운학雲鶴흉배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지만, 당하관의 경우 앞서 언급한 백한白鷳흉배를 사용했으며, 무관의 경우 사자 獅子와 호虎흉배를 섞어서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을 볼 때 조선 후기 관복 제도를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가 그 차림새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홍, 청, 녹색의 관복 제도가 지금 우리 안방 사극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2가지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첫 번째는 문헌을 잘 못 해석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회전》을 살펴보면 명나라의 경우 상복 常服 차림에 홍, 청, 녹색을 사용하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제도이며, 조선의 경우 《경국대전》의 공복 公服 차림을 설명할 때 품계에 따라 홍, 청, 녹색의 포를 입는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를 잘못 본 학자들의 오해로 빚어진 일일 가능성이 높으며, 두 번째는 옛 고증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극에서 일반 시청자들이 지위 고하를 구분하기 좋은 것은 복색 服色이기 때문에 옷의 색이라는 장치를 통해 품계를 구분 짓는 것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상복 차림에는 쑥색에 가까운 녹색 단령포를 입고 문, 무관의 지위와 품 등에 맞춰 흉배, 허리띠, 관모를 착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겠지만, 웹툰에서 묘사되는 시각적 장치로서 관복색을 활용하는 부분이라면 보는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서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발자국이 녹기 전에》에서 묘사한 관복
△ (출처 : 다음 웹툰 《발자국이 녹기 전에》 5화 中)

《발자국이 녹기 전에》에서는 문무백관 및 종친의 관복 색으로써 종친의 자적색 포와, 당상관의 홍포, 당하관의 청녹포, 그리고 녹포 차림으로 총 4가지의 복색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 조선 시대 사극에서 제시하고 있는 관복의 색상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위와 같은 색상 구분은 구체적인 장신구의 묘사가 부재하더라도 복색만으로도 충분히 신분을 구별할 수 있는 장치로써 활용되고 있다. 실제 역사 고증과는 거리가 있지만, 작가 역시 이를 고려하여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민들에겐 평생 한 번 허용됐던 관복 차림 

조선 시대는 원칙적으론 양민들도 과거 시험을 볼 수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관련 연구에 따르면 양민 출신 중에서 벼슬에 올라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지극히 소수였다. 고된 농사짓고 사는 양민들 입장에서 글공부까지 겸해가면서 과거 급제의 꿈까지 이루기에는 현실적으로 무척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백성들에게 평생 한 번 관복 차림이 허용됐으니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의 차림새가 우리가 알고 있는 관복이기 때문이다.


△ [그림 13] 김홍도 作 《신행》


관복 차림은 조선 시대의 지배 계층이었던 관료들이 착용할 수 있던 옷으로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의 입장에서 위와 같은 차림을 입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비록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발달하고 양반 계층이 경제적 압박에 의해 몰락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도포를 입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그들이 관복 차림까지 넘볼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관료들이 궁이나 관청에 출근해서 일할 때 입는 의복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의 경우 백성들에게 혼례식만큼은 가장 최고급 예복을 입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와 같은 풍습을 섭성(攝盛)이라고 한다. 섭성은 백성들이 결혼할 때 왕실 종친 중에서 가장 높은 대군 大君과 명부 命婦의 복색을 특별히 신랑, 신부에게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혼례식 당일 신랑은 김홍도의 작품인 《신행》처럼 자적색의 단령 혹은 흑단령이나 청단령과 같은 옷을 입고, 신부에게는 원삼이나 활옷과 같은 옷을 입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가난한 백성들이 관복 차림과 활옷 또는 원삼과 같은 화려한 복색을 어떻게 장만했을까? 실제 기록에 따르면 이미 조선 전기부터 혼례나 상례(喪禮)에 쓰이는 물품들만 보관했다가 돈을 받고 빌려주는 점포나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신랑에 비해 신부는 여러 겹의 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해야 했는데, 이는 장파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돈을 받고 빌려줬다고 한다. 장파는 신부의 단장과 그 밖의 일을 주선해 주던 여성으로, 수모手母·首母라고도 하였다. 이외에도 해당 고을에서 잘 나가는 부자들이 자신의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단령, 원삼 등을 잘 보관했다가 혼례가 있을 때마다 빌려주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단령이나 원삼 등 이들이 혼례식 때 입었던 옷들은 그 품질이 관료들의 것에 비해 조악한 것이 현실이었다. 모든 유물이 그렇진 않겠지만, 남아있는 대부분의 혼례복 유물을 보면 자수의 도안이나 실력이 떨어지고 옷의 바느질 역시 수준이 낮은 것이 확인된다. 평생 한 번 입는 옷이라고 할지라도 수준 높은 옷까지 입지는 못한 것이다.

 





마치며 

이를 통해 조선 후기 관료들의 복식과 그들이 입었던 상복常服 차림의 유행색까지 알아보았다. 웹툰의 특징은 1주일 혹은 10일에 한 번씩 수십여 컷이 담긴 그림을 그려야 하는 특성상 속성 速成으로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 까닭에 훗날 단행본이 연재되거나 작가 스스로가 아쉬움을 느낄 때는 완결 이후 혹은 휴재 기간 동안 개연성이 부족했던 장면 혹은 대사나 그림체를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 때 다시 수정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품대며 흉배의 경우 자세하게 그림으로 묘사하고 채색할 경우 인체 못지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런 까닭에 색으로 품 등을 구분하는 방식을 사극에서 차용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관복의 디테일 한 장식까지 모두 신경 써서 작업하는 웹툰이 나온다면 고증을 중요시하는 필자로서는 더더욱 기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필진이미지

권병훈

전통복식전문가, 전통복식재현단체 "오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