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커뮤니티로서의 웹툰 댓글’을 주제로 논문을 한 편 쓰라고 한다면 단연코 <유미와 세포들>을 사례로 삼겠다. 일상툰이라는 장르와 ‘컷툰’이라는 형식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독자와 독자 간 상호작용은 물론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 또한 전례 없이 활발했던, 댓글 문화를 논함에 있어 상징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완결을 기념하는 작가의 후기 만화와 그 만화의 컷마다 달린 댓글은 그 자체로 증거가 된다. 작가는 감사의 말과 함께 트로피를 건네는 장면으로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선두에서 수상의 영예를 차지한 이는 ‘네오 외 538명’의 ‘설명 세포’들이었다. 연출이 유독 복잡하거나 지나간 회차의 내용이 가물거릴 때면 설명을 자처했던 독자들의 공헌에 작가가 만화를 빌려 감사의 뜻을 표한 것이다. 독자들끼리 서로를 지칭할 때 ‘oo 세포’로 부르는 식의 장난은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이 만화만의 문화 같은 것이었다. 사람의 몸 안에는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세포들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에 한껏 몰입한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유희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유미와 세포들>은 독자들이 작품을 넘어 댓글까지도 웹툰 향유 경험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준 사례1)다.
△ “기다릴 세포들 머리 위로 똥글뱅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말에 댓글 창을 도배했던 ‘똥글뱅이’ 이모티콘.
처음 그 대사가 등장했을 때부터 연재 내내 작가와 독자 모두가 애용하던 유행어다.
대부분의 웹툰이 수년간 장기 연재의 형태로 제공되며 각각의 작품이 고유한 페이지를 갖는다는 점에서 웹툰 댓글은 기사 댓글보다는 유튜브 댓글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사실상 독백에 가까운 불특정 다수의 말들이 잠깐 모였다 흩어지는 광장이 아니라 채널 운영자를 중심으로 구독자가 모여 지속해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랑방에 가깝다는 뜻이다. 작가와 독자, 독자와 독자 간에 형성되는 이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연결고리는 웹툰을 감상하는 일에 생각보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댓글 창은 단순히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가를 공유하는 것 이상의 자리가 되었다. <유미와 세포들>이 보여준 것처럼 작품 이해에 필요한 설명이나 추가 정보를 공유하고, 비평 수준의 심도 있는 해석을 공유하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에게 별명을 붙이거나 임팩트 있던 대사가 꾸준히 언급돼 결국 유행어가 되는 일 또한 가능하다. 작가의 말과 독자의 댓글이 시차를 두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베스트댓글이나 대댓글 기능을 통해 독자들끼리 대화하거나 단합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웹툰에 관한 다양한 방식의 발화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공유됨으로써 작품 감상에 커뮤니티성을 덧입히고 감상을 보다 두텁게 만든다. 댓글만큼 웹툰을 ‘웹’툰으로 있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댓글에 관해 밝은 면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이 그렇게나 활발할 수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방향에서도 같은 밀도로 작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웹툰 독자가 마치 유튜브 구독자와 유사하다고 할 때, 작가와 독자 집단이라는 일 대 다의 구도에서 웹툰 댓글이 빚는 문제에 가장 먼저 위협받는 이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피드백을 가장한 조롱과 간섭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제 되어 왔다. 작품의 전개 방향이나 인물 설정, 그림체에 대한 불만은 물론 연재 속도와 분량 등 성실성에 관해서까지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엄격하게 평가되고, 이 과정은 자주 표현의 여과 없이 이루어진다. 작가는 정제되지 않은 공격의 말에 고스란히 노출됨은 물론, 독자가 지적한 문제들을 실제 연재 과정에 반영해 ‘개선’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는 댓글의 영향력이 적지 않은 것에 비해 책임의 몫이 상당 부분 작가 개인에게 함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 어떤 안전망도 제동도 없이 분위기에만 의존해 최선과 최악을 오가는 댓글 문화의 불안정성은 결국 독자에게로 그 피해가 돌아온다. 작가가 독자의 무리한 요구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작품이 방향을 잃기도 하고 심한 경우 휴재나 연재 중단에 이르러 작품의 감상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감상을 풍요롭게 했던 댓글 문화의 순기능 역시 쉽게 훼손될 위험에 처한다. 댓글의 표현 방식 전반이 저급화될 때 합리적인 의견은 나오기도 받아들여지기도 힘들어지며, 작품과 완전히 무관한 내용의 말들이 댓글 창을 점령하기도 한다.
커뮤니티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해결책은 일차적으로 커뮤니티 안에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작가와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의견을 표현하는 방식에 관한 합의안의 개편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란 어렵다. 개별적으로 뱉어지는 댓글 하나하나가 작가나 타 독자에게 유무형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댓글이 공론의 장 안에서의 발화라는 인식이 웹툰 댓글이라는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플랫폼의 역할 또한 간과돼서는 안 된다. 플랫폼이 작품을 선별하고 제공하는 방식, 작가의 연재 환경을 마련하거나 문제 상황에서 작가를 보호하는 방식 등은 독자가 작품과 작가를 접하고 평가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명절이나 정기 휴재가 당연한 플랫폼이 있는가 하면 휴재 한번 없는 작가가 성실한 작가로 평가받는 곳도 있다. 작화를 중시하는 경향의 플랫폼이 있는가 하면 서사의 탄탄함이나 젠더 감수성이 기본값인 플랫폼 역시 존재한다. 독자의 댓글 문화는 자주 플랫폼 내 문화와 연동돼 있다.
댓글 문제의 개선은 플랫폼의 시스템 변화만으로도 어렵고 독자들의 자정작용만으로도 어렵다. 교과서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공존하고 길항하며 어느 한 곳에 책임을 몰지 않는 태도가 전제될 때, 댓글 문화를 포함한 웹툰 문화 전체가 지속 가능할 것이다. 독자와 창작자, 웹툰에 관련된 누구도 배제되지 않은 형태로 말이다.
1) <선천적 얼간이들> 또한 그러한 사례다. 재연재됨에 따라 원래 작가의 말과 베스트댓글이 빠지자 독자들 스스로 작가의 말과 댓글을 새로운 댓글에 옮겨 적었고, 결국 중간부터는 작가의 말까지 포함해 연재하게 된다. 이 일련의 ‘복원’ 과정은 독자가 상정하는 작품과 감상의 범주를 고민하게 한다. 감염병을 소재로 한 만화 <좀비딸>이 연재 도중에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독자의 몰입이 가중되고, 주인공의 독단 행동을 실제 상황처럼 힐난했던 한 독자의 댓글을 작가가 시민 인터뷰 장면에 활용한 사례 역시 작품과 댓글,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새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