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이세돌 9단을 상대로 4:1의 승리를 거뒀던 인공지능(AI) 알파고 ‘사태’는 여전히 우리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인간의 독보적인 무대라고 여겨졌던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을 압도한 사건이었고, 그날을 계기로 인간만이 가능한 영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일종의 신화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 혹은 깨달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어느 무엇보다도 인간만의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야, 예술은 어떨까?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신해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도구로서의 인공지능과 인간을 대체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예술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해 크게 두 가지의 접근이 있다. 하나는 인간이 창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툴로서 활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아예 인간 대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AI의 도움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작품 활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 인공지능이 작가이며 인간은 (만약 필요하다면)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두 관점 모두와 관련해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인공지능은 성과를 내놓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알파고가 사용했던 딥러닝 기법을 사용한다. 즉, 인간이 기존에 발표한 수많은 작품 데이터를 학습한 후 그 정보와 지식을 조합, 활용하는 것이다. 툴의 관점에서는 해당 예술 분야의 전형적인 작업 방식과 과정을 익힘으로써 작가의 창의성이나 집중력을 비교적 덜 요구하는 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신 작업하게 된다. 창작의 관점에서는 기존 작품들이 가진 다양한 요소와 장점들을 자연스럽게 엮어내어 지금까지 없던 인공지능만의 새 작품을 창조한다. 전자와 후자는 기술적으로는 관련이 있지만 그 지향점이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과정과 결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만화 혹은 웹툰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로서의 인공지능
지난 2019년 네이버웹툰 AI 테크는 웹툰용 자동 채색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웹툰이 기존 만화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세로 스크롤과 컬러다. 특히 채색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된 작업으로, 원래도 손이 많이 가던 만화 작업에 더 큰 부하가 걸리게 만드는 요소다. 네이버웹툰에서 선보인 이 프로그램은 아직 프로 작가들을 만족시킬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속도로 발전한다면 근시일 안에 실사용이 가능한 퀄리티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 색을 지정하면 알고리즘이 선을 인식하고 영역을 구분하여 정확히 채색한다. 명암도 칠해준다.
한편, 작년 10월 어도비는 코믹 블라스트라는 만화 제작 툴을 선보였다. 워드로 스크립트를 넣으면 작업의 바탕이 되는 칸과 말풍선이 자동 생성되고, 스케치를 넣으면 역시 자동으로 렌더링이 된다. 스토리 분기를 설정하고 움직이는 효과도 넣을 수 있다. 출판만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라 웹툰 형식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웹 환경을 감안했음을 알 수 있다.
△ 거친 선으로 적당히 표현한 스케치(위)가 렌더링 된 결과물(아래)
이렇게 인공지능을 통해 만화 작업 공정의 효율을 높이는 것은 작업을 편리하게 하거나 시간을 절약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런 툴이 충분히 영리해져 작가나 어시스턴트의 노동 시간과 노동량을 극적으로 줄이는 경우, 보통 일주일에 한 편인 웹툰의 연재 간격이 훨씬 더 줄어들 수 있다. 이는 곧 생산성, 수익, 그리고 시장의 활성화와도 직결된다. 한편으로는 어시스턴트를 고용하기 어렵고 채색 등에 시간을 투자하기 힘든 아마추어나 신인 작가 입장에서도 부담 없이 웹툰에 도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물리적 한계로 인해 사람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는 지금의 방식이 가진 다양한 문제들을 대폭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가 웹툰 제작 환경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해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웹소설처럼 작가 혼자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수준에 근접해질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어도비의 코믹 블라스트에서 발전해 스크립트만으로 다양한 스타일의 작화를 포함한 웹툰 전체를 만들어내는 툴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는 만화가의 출현도 가능해진다. 지금의 팟캐스트와 유튜브가 라디오와 TV를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기술과 장비 없이도 누구나 만화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물론 프로작가와의 수준 차이는 분명하겠지만 지난 10여 년 간 팟캐스트와 유튜브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그 차이 역시 서서히 좁혀질 가능성이 높다.
△ 2020년 당시 서울대 석사 과정이던 이동익씨는 적대적 생성 모델 ‘스타일갠’을 활용해 이말년 작가 스타일의 캐릭터를 생성했다.
실물 사진을 이말년식 인물로 만들어 내는 것뿐 아니라 표정이나 연령 변화에 대응하는 효과도 적용 가능하다.
인간 대신 직접 작가가 되는 인공지능
그럼 이제, 인공지능이 아예 스토리부터 그림, 채색, 배경까지 모두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의 작가가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2020년 인공지능계에는 꽤 큼직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 기업인 오픈 A.I 가 발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GPT-3 라는 이름의 이 A.I 시스템은 인터넷에 있는 온갖 문서와 책, 위키피디아 등의 수많은 영문 텍스트를 딥러닝으로 학습시킨 것인데, 자그마치 1750억 개에 달하는 사전 학습된 매개변수를 갖고 있다. 이 인공지능이 세상을 충격에 빠트린 것은 글을 통해 인간과 나누는 대화의 수준이었다.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추상적인 대화나 철학적인 토론에서조차 대화가 가능한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많은 개발자들과 다양한 영역의 학자, 언론인 등이 온라인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소셜 미디어 등으로 공유했는데, 대부분의 대화에서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하다.
물론 시스템 특성상 때로 전혀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하고, ‘치즈를 냉장고에 넣으면 녹을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등 상식적인 질문에 틀린 답을 내놓기도 한다. 데이터만 쌓여 있을 뿐 상식이나 물리적 지식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력도 거의 없어서 당장의 대화는 잘하지만 그보다 전에 나눈 대화의 내용이나 맥락은 완전히 잊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미 3분 40초 길이 단편영화의 각본을 써서 작품화되는 등,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비록 짧고 아직은 다소 어색하지만 비틀어진 플롯과 예상치 못한 결과를 통해 나름의 흥미와 궁금증을 자아낸다.
△ Solicitors (2020)
첫 두 문장 이후 모든 각본을 A.I가 썼고 인간 감독이 연출했다.
타란티노의 잊혀진 습작이라고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를 내용이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 이후 5년이 지났다. 컴퓨터의 시간 속에서 5년은 무척 길다. 당시의 알파고는 인간에게서 바둑을 배웠지만, 지금 그 후손들은 기보를 학습하기는커녕 게임의 룰조차 입력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바둑이나 체스 두는 법을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게다가 1승이나마 올렸던 이세돌의 경우와 달리 이제는 인간이 상대도 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물론 툴로서 A.I의 많은 도움을 받더라도 인간의 발상과 아이디어, 그리고 손을 통해 그려진 만화가 사라지는 일은 오랫동안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만화에 대해 갖는 관심은 단지 그림이나 색, 연출, 스토리뿐 아니라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 개인의 감정과 가치관, 개성에도 닿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발전하고 있는 A.I의 방식이나 속성으로 봤을 때 기계가 고유의 감정이나 가치관까지 갖게 되는 날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현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는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인공지능의 작품이 ‘경쟁’하는 시점은 그다지 멀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인공지능을 활용했다 해도 인간은 생각하기 어려운 정교한 이야기 구조나 새로운 그림 형식, 참신한 구도와 연출 등이 담긴 작품이 나온다면, 독자들은 그 작가가 ‘내면’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들 들어 봤을, 인공지능과 관련된 해묵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A.I는 인간의 충실한 조수로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대신 해결해 줄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존재 의미마저 가져갈 것인가? 그리고 이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 갈 것인가. 수십 년간 답을 내지 못한 이 질문을 이제 만화도 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