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한 좀비 :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2020년 상반기, 세계를 덮친 코로나19의 여파는 사회를 단절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리적, 심리적 장벽이 견고해지고 세상은 배타적으로 변해갔다. 한 확진자가 모임에 참석하여 단체 감염을 야기했다는 뉴스는 비난하는 반면, 친구와 잠깐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은 예외로 여긴다. 그 친구와는 큰맘 먹고 몇 개월 만에 잡은 약속이었고 겨우 한두 시간밖에 만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그들이 감염의 위험을 잠시 내려두고 기꺼이 마스크를 벗은 까닭은 서로가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친밀함 앞에서 너그러워지는 마음이 아는 것은 안전하다고 착각하게 했고, 치명적인 전염병은 사람들의 그런 인정(人情)을 발판 삼아 멀리 퍼져나갔다.
전염병, 팬데믹, 감염, 바이러스… 최근 사회 근간을 이루는 키워드는 ‘좀비(Zombie)’ 장르의 설명을 보는 것 같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으로 장르의 입지를 다진 좀비는 마니아들의 니즈가 변함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하였으나, ‘좀비는 사람을 먹고, 좀비에게 먹힌 사람은 좀비가 된다.’는 여전히 제 1법칙으로서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생존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벽 너머의 존재를 적으로 규정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설령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라도.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vs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이윤창 작가의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이하 좀비딸)의 주인공 ‘이정환’은 그 딜레마 한가운데에 있는 인물이다. 어느 날 서울 한복판에 좀비가 나타난다. 서울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정환의 실수로 그의 딸 ‘이수아’는 좀비에게 물린다. 아무리 좀비가 되었다지만, 차마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일 수 없었던 정환은 수아를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로부터 1년. 더 이상 감염자가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좀비 사태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렇게 수아는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좀비가 된다.
같은 딜레마에 놓인 인물로는 모래인간 작가의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이하 좀나없)의 주인공 ‘호이찬’이 있다. 좀비 사태가 종식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는 <좀나없>의 좀비는 치료가 가능한 좀비다. 치료제를 맞은 좀비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치료가 되어도 신체에 남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기에 부상 정도가 심한 좀비는 전문가의 판단에 따라 그 자리에서 사살된다. 깨진 두개골 사이로 뇌가 보이는 좀비 ‘이선혜’는 사살 대상인 좀비다. 이찬은 남들 몰래 아내 선혜를 사육한다.
△ (좌)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 (우)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두 작품은 좀비물이라는 것을 포함하여 여러 유사점을 보이는데, 진지하고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각종 밈(meme)과 개그가 난무한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이는 작가 고유 스타일에 해당하므로 일단은 차치하고, 서사적인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좀비딸>과 <좀나없>은 좀비와 함께 살아가길 원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좀비 공존 이야기’ 이다. 기존의 ‘좀비 포맷’의 좀비는 장벽 밖의 존재로,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쓰러뜨려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좀비 공존 이야기’에서의 좀비는 배제 대상이 아니라 장벽을 무너뜨리고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좀비딸>은 나름대로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수아를 공존이 가능한 좀비로 묘사한다. 야생동물과 비슷한 습성을 보이는 수아는 훈련을 통해 제어가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수아는 자주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작가 특유의 연출 때문에 대부분이 개그용 드립인지 복선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무엇보다 수아는 인육을 먹지 않아도 되는 좀비다. 동물 내장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빨리 발견한 덕분에 수아는 인륜을 져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유예를 얻는다. 좀비가 되고 처음 마주친 인간인 정환을 물어뜯는 것에 실패한 덕분에 사람 고기 맛은 한 점도 보질 못했다. 거기에 아직은 중학생에 불과한 나이, 사회적으로 보호 받아야 할 계층인 학생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부성애의 대상이 되는 건 반칙에 가까울 정도로 유리한 캐릭터성이다.
반면, 선혜는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좀나없>의 좀비는 인육만을 먹는 좀비다. 좀비였던 자들은 치료를 받아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들이 먹어 치운 것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 <좀비를 위한 나라는 없다> 22화 ‘Stage 20’ 中
‘사람들은 자신들이 좀비였을 때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좀비였던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하는 새로운 인종차별자가 사회에 대두하고 있다.’
누군가의 가해자가 누군가의 피해자인 세상. ‘서지혜’는 치료받은 좀비다. 그는 선혜와 마찬가지로 가족이 구해다 준 인육을 먹고 연명했다. 모종의 사건으로 억울하게 구금되어 있던 지혜는 친좀비운동가들의 공세 덕에 석방된다. 서지혜가 석방되던 날, 현장에 모인 반좀비운동가들은 그에게 돌을 던진다. 군중들 속에는 지혜가 먹은 남자의 동생 ‘이진아’도 서 있었다. 일찍이 그에게 돌을 던진 이들과 같은 이유로 지혜를 원망했던 진아는 훗날 지혜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불쌍하고 외로운 소녀. 진아가 지혜를 동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자화된 존재가 아니라, 그 역시 저와 같이 울고, 웃고, 고통을 느끼는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야기(story)가 삶의 은유라는 지론에 따르면, 좀비 장르가 말하는 우리네 삶은 경계선 너머의 타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인 세계다. 하지만 상심할 필요는 없다. 첫째로는 무수히 많은 작품이 저마다 각기 다른 은유를 내놓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것만이 좀비가 시사하는 유일한 은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좀비 공존 이야기’의 좀비는 인간적이다. 인간적인 좀비는 피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더이상 그곳에 ‘타인’의 상징이었던 좀비는 없다. 좀비는 미지(未知)의 공포에서 이지(已知)의 존재가 된다.
우리는 아는 얼굴 앞에서 얼마나 너그러워지는가. 옛말에 애급옥오(愛及屋烏)라 했다. 지붕에 앉은 까마귀는 사실 그저 우연히 그 지붕에 앉았을 뿐. 까마귀가 예뻐 보이는 까닭은 사랑에 눈먼 자가 무관한 것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환의 집에 군인이 차마 수아를 쏘지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 역시 진아가 그러했듯, 타인이 아니라는 감각이 눈앞의 존재와 방아쇠에 닿은 제 손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돌고 돌아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구원했고, 복수심에 사로잡힌 이를 서로가 내민 손이 구했다. 이지(已知)의 연쇄 작용이 타자화를 끊어내고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서로에게 너그러워진 세상에서 진정한 공존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