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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의 미래 : 근심이 아닌 긴급함으로서의 만화

웹툰은 그저 만화가 웹으로 옮겨온 것인가? 시대 흐름에 따라 웹툰은 만화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웹툰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

2021-11-29 오혁진



웹툰의 미래 : 근심이 아닌 긴급함으로서의 만화


 웹툰을 언급할 때면 으레 반복되는 어떤 비판이 있다. 열등한 만화 형식으로서의 웹툰. 웹툰은 출판 만화와 달리 ‘복수적 칸의 상호작용’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수긍이 가면서도 한편 의아스럽다. 비교는 동일한 범주의 대상을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출판만화와 웹툰의 가족 유사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출판만화와 웹툰이 각기 다른 속성의 지지체와 결합 됐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만화 형식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게 차라리 웹툰에 관한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출판만화와 웹툰의 지지대를 살펴보자. 근대적 형식인 출판만화는 인쇄술의 도입 이래 상당히 안온하게 종이라는 지지대에 기거한다. 반면 웹툰은 디지털로 뭉뚱그려 언급하긴 했지만 불과 십여 년 사이 자신의 지지대를 웹페이지에서 모바일 디바이스로 옮겼다. 디지털 지지대를 거듭 변화하는 웹툰. 그러면 이번에는 디지털 만화의 역사적 관점에서 웹툰을 조망해보자.



△ 세대별 웹툰 시기와 특징

 웹툰은 시기와 특성에 따라 4단계로 분류된다. 0세대-출판만화를 스캔하는 방식으로 웹툰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식, 1세대-인터넷 웹을 기반으로 하는 세로스크롤 웹툰 형식, 2세대-이전 웹툰에 사운드와 특수효과를 첨가한 형식, 3세대-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디바이스에 최적화된 형식이다1). 이처럼 웹툰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끊임없이 다른 매체의 특성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2) 컷툰, 무빙툰, 스마트툰, VR툰, AR툰, 인터렉티브 웹툰, 이 모든 변화는 다름 아닌 디지털에 기반한 웹툰의 역량이다.  

 그런데 우리는 열린 개념의 웹툰에 관해 무엇을 말해야 할까. <옥수역 귀신>, <봉천동 귀신>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할 것이 기어코 움직일 때, 또는 <고고고>에서 감각적 확장이 모험적 경험을 화사하게 수 놓을 때, 만화에 추가된 무언가를 이야기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웹툰에서 진정으로 논의해야 할 것은 잉여가 아닌 결여다. 웹툰은 이러저러한 형태에도 하나의 큰 흐름에 귀속돼 있는데, 그것은 분절/연결이라는 만화의 본질적 속성이 반(反)만화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웹툰은 칸과의 연대가 와해 되고, 침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으며 그리고 멈춰있을 특권마저 빼앗겨 버린다. 사실 이런 변화에 대한 가치 평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만화가 아니라며 근심할 수 있지만, 실로 긴급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웹툰이 만화적 속성을 이렇게 계속해 버려 나간다면, 우린 어느 순간 그리스인이 그러했듯 테세우스 배의 역설에 직면해야만 한다. 이것은 여전히 만화라 할 수 있는가. 아니 만화를 만화로 성립시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 되물으며. 


칸 둘레의 붕괴 그리고 파편화

 반(反)만화라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무적핑크 작가의 <조선왕조실톡>을 검토해보자. <조선왕조실톡>은 마치 ‘웹툰의 재매개화’라는 주제를 구현하기 위한 작품처럼 보인다. 무적핑크의 웹툰은 기존 웹툰과 다르게 만화 형식을 해체함과 동시에 다양한 SNS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3). <조선왕조실톡>이 재매개한 카카오톡4)이라는 만화 형식을 보자. 이때의 카카오톡 형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카카오톡 대화방 이미지만으로 만화를 재구성하겠다는 작가의 야심이 돋보이며 또한 카카오톡 대화방 자체가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이라는 작가의 직관 역시 탁월하다. 그러니까 카카오톡 대화방의 나열로도, 카카오톡 대화방 그 자체로도 만화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인스타그램 형식이다. 178화 <자격루를 만드는 이유>에서 인스타그램 형식은, 과거 사건을 재생하는 유튜브 형식과 달리, 일상의 기록과 주변인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사진, 코멘트, 작성 일자는 세종대왕의 개인적 소회와 세종 16년(1434년) 자격루가 완성된 역사적 사실을 제공하며, 좋아요와 해시태그의 기능은 세종 대왕의 인간관계(장연실, 세자, 수양대군)를 제공한다. 한편 SNS 이미지는 스크린을 ‘창(window)’으로의 사유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SNS 이미지가 스마트폰의 스크린을 어떠한 빈틈없이 꽉 채운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의 스크린에 떠 있는 이미지는 ‘칸’일까 또는 ‘페이지’일까. 이 질문은 기존의 만화의 문법으로는 답할 수 없으며 대신 스크린을 창으로 이해해야 잠정적인 답을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선우훈 작가의 작업을 들 수 있을 텐데, 거기서 직사각형 스크린의 ‘창’은 수직으로 연장된 거대한 이미지를 훑어 나가면서 ‘가장 평면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을 나타남과 사라짐으로 현상시킨다. 



△ <조선왕조실톡>의 카카오톡 형식과 인스타그램 형식

 그러면 이제 무적핑크의 작업이 분절과 연결을 어떻게 반만화적으로 구성하는지를 정리해보자. <조선왕조실톡> 기존 웹툰보다 과격한 방식으로 이미지를 분절시킨다. 이는 무적 핑크 작가의 기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것으로, <조선왕조실톡>은 유튜브,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를 재매개하는 것을 넘어 그것의 표면 전체를 그대로 뜯어 내버린다. 게다가 <조선왕조실톡>은 연속적 칸의 결속성을 등한시하며 SNS의 단면을 느슨하게 늘어놓는 것만으로 만화가 성립하지 않겠느냐며 넌지시 제안한다. <조선왕조실톡>이 새로이 구축한 반만화적 세계는 대략 이렇다. 더이상 칸의 관계망이라는 전체상을 그려낼 수 없으며 심지어 수직의 스크롤에서 흐르는 이미지 단면을 칸이라 불러야 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무적핑크 작가의 기획은 예언적인데, 가령 수신지 작가는 실제 ‘인스타툰’ <며느라기>를 만들어 이를 사후적으로 입증한다. 그런데다 무적핑크가 인스타그램 형식을 만화 기호로 환원시키고, 수신지는 만화 기호를 인스타그램을 경유하여 현실 세계로 진입하는 차이에도, 두 작품 모두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동하는 감각을 생산한다. 이를테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뚜렷한 간격으로 각 이미지는 유기적인 연속체로 매끄럽게 봉합되지 못한 채 파편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레 인스타툰과 같이 이미지를 손으로 넘기는 ‘컷툰’을 떠올리게 된다. 컷툰은 이름에서 암시하듯 이전 웹툰보다 파편화의 감각을 보다 강화한다. 각 컷마다 댓글 다는 기능은 칸의 지속과 함께 서사의 지속까지 파편화시킨다. 또한 컷 편집기능의 경우 이미 규격화된 크기로 절단된 컷을 다시금 절단시켜 다른 SNS와 콘텐츠에 무맥락적으로 접합시켜 버린다. 아울러 지적할 것은 이런 파편화의 흐름이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만화의 영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웹소설의 끊임없이 분절되며 연속되는 짧은 서사4), 넷플릭스에서 영상을 끊어서 보는 시청 습관 그리고 유튜브 쇼트에서 요구하는 시간과 프레임의 제한은, 파편화를 수행하는 웹툰과 모종의 관계를 구축한다.


운동의 해체 또 다른 운동의 구축

 지금 웹툰에서 ‘분절’이 파편화의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연결’은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운동의 도입이다. 움직이지 않는 만화를 움직이려는 어떤 지향.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지점은 만화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만화에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잭 커비,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작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그들이 재현한 동적인 만화 세계에 얼마나 매혹되었는가. 당연히 전통적 만화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련의 칸이 나란히 놓일 때 우리는 그사이 빈 공간에서 운동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독자의 정신에 투영된 운동을 만화적 운동이라 규정해보자.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웹툰에서 새롭게 도입한 운동은 무엇일까? 만화적 운동과 대비되는 이 운동은 손쉽게 영화적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선형적이며 비가역적인 연속체에 정렬된 운동5)이다.

 이러한 점에서 연결과 운동에 관한 최근 웹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빙툰보다 오히려 컷툰과 스마트툰이 보다 적절한 예시라 할 수 있다. 컷툰과 스마트툰은 출판 만화의 자유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터치와 밀어내기라는 육체적 행위는 책을 넘기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미지가 동일한 공간에서 이어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완결성의 연상으로 만화를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는다 한들, 우리는 결국 컷툰과 스마트툰에 프로그램된 예정조화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지의 표면과 매끄러운 전환이 진실을 가리긴 하지만, 컷툰과 스마트툰은 독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종의 인과적 선형체다. 독자는 연쇄하는 이미지의 열차에 탑승한 승객으로 정해진 경로 이외에 다른 선택권은 없다. 만약 만화의 선구자 로돌프 퇴퍼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어떠한 견해를 표명했을까.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다. 오직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기획한 근대성 은유로서의 ‘칸-기계’는 마침내 웹툰에서 실현됐다는 것이다. 



△ <만화의 이해> 시간 이미지

 물론 웹툰의 반(反)만화적 운동이 칸의 연결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칸 내부로도 진입하여 만화적 운동을 부정한다. 칸 내부의 만화적 운동.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칸 내부의 정지된 이미지에서 어떻게 운동이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모순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시공간을 조직하는 칸의 근본적 속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진의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아주 짧은 하나의 순간이다. 하지만 칸 이미지는 사진 이미지와 달리 모든 사건이 단 한 순간에 발생하지 않는다. 가령 빌 비올라는 이 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는데, 폰토르모의 16세기 회화를 동영상으로 만든 에서는 원작에 얼마나 많은 동작과 그로 인한 시간이 동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6). <만화의 이해>에서 스콧 맥클라우드 역시 가족 모임을 그린 만화 이미지를 예시하며 이 하나의 이미지에는 기이한 시간 달리 말해 지속의 시간이 흐른다고 언급한다. 이뿐만 아니다. 만화에서 각기 다른 시간 시간을 점유하는 인물들도 정지된 이미지로 존재하기를 거부한다. 도미에의 풍자만화가 그 적확한 예라 할 수 있는데, 도미에는 자신이 그린 인물을 계속 이어지는 어떤 과정의 일부로,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절대 완결될 수 없는 이미지로 보았다7). 요컨대 만화 이미지는 정지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엔 풍부한 지속의 운동이 봉합되어 있는 것이다. 웹툰에 다양한 효과를 연출하는 ‘웹툰 효과 에디터’가 반만화적이라고 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웹툰 효과 에디터는 표면에 잠재해 있는 만화적 운동을 정지된 이미지의 연속이라는 운동으로 부상시킨다. 

 다만 이때 오해해선 안 될 사실이 있다. 반(反)만화라 언급하긴 했지만 웹툰의 변화를 비판하는 건 아니다. 기존 만화와 다른 만화를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고 새로운 만화가 성취한 가능성은 매혹적이다. 그럼에도 웹툰의 어떤 실험이 만화의 근본적 속성을 소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빙툰 <0.0mhz>가 기괴하게 보이는 이유는 결코 호러 만화여서만은 아닐 것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사이 어딘가 위치한 이 웹툰은 그로테스크하게 뒤섞여 있다. 대원씨아이가 만화를 영상화한 ‘튜브툰’은 어떠한가. 대원씨아이는 지난 6월  “동적인 연출과 음향효과로 만화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튜브툰을 통해 유튜브 콘텐츠에 익숙한 MZ세대를 비롯한 일반 독자들이 만화를 보다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튜브툰의 취지를 밝힌 바 있다. 개인적으로 웹툰에 뒤처진 흑백출판 만화가 오히려 웹툰에 앞서 유튜브와 결합하는 시도는 흥미로웠지만, 만화의 경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시도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양재현 작가가 페이스북에서 “유튜브 오리지널 만화 연재도 좀 기획합시다. 영상처럼 구성해서 불법으로 올리는 콘텐츠들 적발하다 오히려 빠져들어서 보게 됐네요. '튜브툰' 가자!!!”8)라는 글을 접했을 때, 튜브툰이라는 변화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튜브툰을 볼 때의 경험은 만화를 읽는다는 감각일까, 아니면 영상을 본다는 감각일까. 더욱이 튜브툰의 영상으로도 만화적 감각을 경험했다고 한다면 그때의 만화적 감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금 제기한 질문을 어찌해서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 가속화될 기술 변화는 기존 만화의 정체성은 더욱더 빠르게 해체할 것이다. 당장 AR툰, VR툰을 포함한 메타버스 공간에 구현된 만화만 해도 그렇다. 2차원 평면이라는 근본적인 지지대를 상실한 만화가 게임, 영화와 당혹스럽게 마주칠 때, 우리는 만화에 관해 무엇을 말해야 할까. 무언가를 말한다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예전의 만화는 아닐 것이다.



1) 한창완 외, 『웹툰 산업 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15

2) 고민정, 「디지털 기술과 웹툰의 재매개」, 『문화콘텐츠연구』 7, 건국대학교 글로컬문화전략연구소, 2016

3) 김은진, 「무적핑크 웹툰의 형식과 서사전략」, 가톨릭대학교, 2019

4) 사실 <조선왕조실톡>이 패러디하고 있는 대화창은 카카오톡이 아니라 라인의 대화창이다. 하지만 국내 메신저 어플 중 카카오톡의 점유율이 압도적이고 인지도가 높은 만큼 이 글에서는 '카카오톡'으로 통칭한다. 

5) 이융희,  「한국 장르판타지 수용자들의 장르 의식 연구」

6) 데이비드 노먼 로도위,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 김지훈 옮김, 그린비, 2005

7)  데이비드 호크니, 미틴 게이퍼드, 『그림의 역사』, 민윤정 옮김, 미진사, 2016

8) 존 버거, 『초상들』, 김현우 옮김, 열화당, 2019

9) 서찬휘, 「튜브툰, 만화를 움직여 보려는 시도의 종착역」, 『디지털만화규장각』, 2021.10.28. http://dml.komacon.kr/webzine/cover/28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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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혁진

만화평론가
「만화 형식의 역사 - 윌리엄 호가스에서 장 자크 상페까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