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43,000명이 사는 보르도 근처의 작은 도시. 이 도시에서 매년 4일간 열리는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올해도 22만명이 몰려들었다. 이를 보면 처음 방문하는 이들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단언하건데 이 정도라면 한국만화페스티벌의 모델로 낱낱이 분석해볼 필요가 있으리라. 몇몇 눈에 띄는 겉모습, 몇 가지 루머들같은 자극적인 것에 눈치 볼 것 없이 말이다.

제37회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포스터
앙굴렘 만화축제라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1974년에 시작해서 2010년 1월로 37회를 이어오고 있는 이 행사의 지속성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며, 아마도 이 이유들이 모여서 상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부천국제만화축제가 많은 관람객을 모으지 못하는 이유도 복합적이며, 자그마한 원인들이 함께 뭉쳐 서로 나쁜 시너지를 형성, 전체적으로 끼리끼리의 행사로 만족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앙굴렘 페스티벌이 성공을 이끌어내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활기찬 출판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페스티벌 조직위원회와 앙굴렘시, 그리고 기타 공공기관의 노력 덕분이다. 이번 호에는 첫 번째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자.
1. 활기찬 출판만화시장
프랑스 출판만화시장은 1996년부터 2009년까지 연 14년째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만화시장, 대본만화시장, 학습만화시장이 포함된 것이 아니다. 왜? 거의 없다고 봐도 되므로. 오로지 프랑스판형의 만화들, 번역 출간된 아시아권의 망가판형들, 미국 코믹스 만화들이 위주이며 그 이외에도 만화관련 이론서와 재판본들을 포함할 뿐이다. 전세계적으로 출판만화시장이 줄어들고 있다고 아우성인데,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프랑스 출판만화시장만 성장한다는 것일까? 밖으로 보이는 이 성장의 동력은 무엇일까? 네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제37회 앙굴렘 축제의 야경
1) 풍부한 작가군들의 형성
1990년, ‘아소시아시옹(Association)출판사를 중심으로 한 20대 중반 작가들은 각개 약진을 시작했다. 1980년대 하반기만 하더라도 모든 출판사들이 출판을 거부하는 바람에 허무하게 거리를 헤매야했던 이 작가들은 오늘날 프랑스 만화계의 대표적인 40대 작가군들로 성장했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트롱다임(Louis Trondheim)을 들 수 있는데, 그는 2009년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축제위원장으로 임명되고, 델쿠르(Delcourt) 출판사의 샴푸앙(Shampoing) 컬렉션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명실공히 프랑스 만화계의 대표적 작가군의 한명으로 자리잡았다. 그 뿐만 아니라 다비드 베, 마르얀 사트라피, 엠마뉴엘 기베르, 에드옹드 보도왕, 요한 스파 등, 아소시아시옹 출판사를 거쳐간 작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군으로 우뚝 섰다. 이들을 이어서 생겨났던 신인작가들의 모임은 후속세대로 자리잡았으며, 오늘날 ’신진 재능들’이라는 섹션을 페스티벌의 빠질 수 없는 영역으로 고정시켰다. 신인? 비록 어리다고는 하나, 바로 만화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2009년 한 해에 프랑스산(産) 만화만 해도, 1,429권이 출간되었다는 결과를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거장 뫼뷔우스? 여전히 활동 중이시다. 중진들? 만화판의 허리를 확실히 부여잡고 있다. 신인에서 거장까지, 바로 이 풍부한 작가군이 만화의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행사기간중 열린 쁘띠 니콜라 일러스터 상페와의 만남
2) 작가들의 만화계 전체에 대한 자구적 노력의 지속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그릴 놈은 그리고, 못그릴놈은 못그리는겨~”.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 뒤에는, 개인이 아니라 함께 노력해야할 만화창작, 유통 및 정책적 과제들에 대해서는 나와는 상관없으며,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라는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안만화 세력으로 등장한 만화가들, 특히 대표적으로 트롱다임은 이른바 ‘만화가 협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지금까지 유명무실했었던 이 단체는 만화가들이 출판사로 인해 힘겨워하는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작가들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한 번은 모 신인 작가의 책이 잘못 절단되어, 삐뚤게 출간되었다. 작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불행히도 출판사로서는 그냥 넘어가고 싶은 일이다. 슬그머니 덮고 넘어가려는 이 책이 다시 인쇄된 것은 협회 덕분이다. 물론 프랑스라고 해서 모든 작가들이 적극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많은 작가들이, ‘만화계’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창작자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블로그에서도 작품들을 결코 무료로, 모두, 한없이,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흐려지게 만들어, 온라인상에서 ‘언제라도 무료로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그렇기에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만화, 또는 만화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문화콘텐츠들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3) 망가 수입의 가속화 및 안정화
1996년 이후 만화시장의 확대는 분명히 일본만화의 진출에 기인한다. 1999년만 하더라도 한 해 번역출간된 아시아 만화가 200권에 불과했다면, 2009년에는 1,429권이 아시아(한국만화 107권, 중국만화 23권을 제외한 모두가 일본 망가)만화이다. 현재 전체 만화출판시장규모로는 25, 전체 출판종수로는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년 만에 700 이상의 성장을 이뤄내고 있다. 2009년 들어서야 그 성장이 겨우 0.5로 상당부분 감소했으며, 서서히 멈추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번역 출간될만한 일본만화들은 거의 모두 다 되었으며, 이전처럼 급격한 성장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앙굴렘에 위치한 망가 건물 내부
4) 만화관련 담론의 지속적 존재
프랑스에서도 잡지시장의 약화는 눈에 띈다. 이 약화가 만화관련 담론의 숫자를 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건들은 많은 부분 독자나 팬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매주 발간되는 국립만화진흥기관인 국제만화이미지도시(이하 ‘CIBDI’)의 온라인 소식지, 그리고 아주 자주 업데이트되는 Actua BD같은 만화 전문 언론이다. 이 외에도 CIBDI가 1년에 한번 씩 기획하는 ‘여름만화학교’와 같은 오프라인 모임 역시 중요하다.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 다양한 의견을 개진해야 할 문제들 등을 더 깊이 토론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는 2박 3일의 토론회이다. 이러한 기반이 있기에 페스티벌 기간 동안에도, 다양한 컨퍼런스가 벌어진다. 37회 축제의 핫이슈는 국가가 국비지원을 줄인다는 것, 그에 따라 앙굴렘 시장이 축제지원을 줄이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축제가 열리느냐 못 열리느냐로 논란이 지속되었지만, 일단은 축제 폐막식에 참석했던 현 문화부장관의 지속적인 예산투자의지를 밝힘으로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논란들 중 제기된 다양한 의견들은 이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소식들은 재빨리 파장을 일으킬 수 있도록 제공되며 그에 대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담론들의 역할은 여전히 충실하다.

만화상 후보작들을 직접 읽고 투표하는 공간
건강하고 활발한 만화출판시장의 존재 없이, 시끌시끌하고 활력 있는 페스티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앙굴렘 페스티벌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요소? 절대 문화행사가 아니다. 수많은 팬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출판사 부스이다. 출판사는 신나게 책을 들고 와서 중간마진을 떼이지 않고 신나게 독자들에게 팔아서 직원들의 출장비 및 작가들의 초대비용을 대야 하고, 독자들은 사비와 시간을 투자해서 달려온 만큼 흠모하는 작가들로부터 사소한 것이나마 더 얻어내고 싶다. 이렇게 몰려드는 사람들로 지역주민들 역시 신명나야한다. 축제의 가장 기초적인 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축이, ‘부천국제만화축제’에 부족 하다. 붐비지 않는 사인회, 텅 빈 출판사 부스들, 잘 보이지 않는 신인작가들과 편집자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축제를 준비하여 진행 하더라도 휘장만 걷으면 공동(空洞)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페스티벌에 대한 고민이, 만화출판시장의 현황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다음호에는 앙굴렘시를 비롯한 공공기관의 노력, 그리고 조직위원회의 능력 등에 대해 언급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