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만화 편집부는 지금 세대의 젊은이 층의 욕망에 대해서 민감하다. 그들의 야심이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을 연구하면, 그들을 대리해서 욕망을 채워주는 주인공 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주인공은 젊은이 층이 강하게 동질감을 느끼며 이것은 만화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최근, 일본 고단샤 講談社의 유명 만화잡지 [주간 소년 매거진週刊少年マガジン]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만화 [DAYS데이즈]는 최근 일본 젊은이들의 욕망과 사고를 정확히 반영한 주인공을 내세워 높은 인기를 누리며 성공하고 있다.
△ [DAYS]만화 데이즈.
만화의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다. [아무런 재능도 장점도 없어보이고 친구도 별로 없는 소심한 주인공인 츠카모토.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고교 축구선수 카자마와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을 계기로 고등학교 축구계에 들어가게 된 주인공은 눈물어릴 정도의 근성과 노력으로 축구계에 일대 선풍을 일으키게 된다...] 이건 평범함을 넘어서 기획단계에서 편집회의에 떨어져도 불만이 없을 정도의 플롯이다.
고단샤는 [내일의 죠]와 [거인의 별]이라는 초 대형 히트작 만화를 만들어내고 (이 두 만화의 대형히트로 고단샤의 잡지 [소년 매거진]은 주간 100만부 발매라는 신화를 이룩해낸다) "근성과 투지로 뭉친 주인공이 눈물과 고통으로 실력을 올려서 시합에서 승리한다"는 열혈 스포츠 근성만화 장르를 아예 창조해내게 된다. 이걸 "스포콘 만화"(스포츠와 일본어 콘조根性의 합성어)라고 부르며, 소년 매거진은 이런 스포콘 만화의 성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연재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이면에는 지금 꿈과 의욕은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일본 젊은이와 어린이들의 모습이 숨어있다.
일본은 최근 [신무소유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일본은 재건과 경제 성장에 매달렸고, 1970년대의 기록적인 고속성장 단계를 지나 1980년대에 이르면 제조업 분야에서 미국을 완전히 녹다운 시키기도 했다. 당시 일본의 주간 만화잡지 소년점프가 기록한 주간 630만부의 신화도 이런 빛나는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의 향연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 초의 버블신화 붕괴라고 부르는 경제위기와 동시에 일본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며 암울한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지금의 일본 대부분 젊은이 층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인 번영과는 무관한 어두운 분위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2006년 니혼 게이자이 신문 (일본 경제신문)의 계층 의식 조사를 보자면 자신을 중류층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1987년과 비교해서 21포인트 감소한 54, 하류층이라고 답한 사람이 17증가한 37이다. 최근 실시된 조사에서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래직업이 우체국 직원이라고 집계될 지경이다. 벌써부터 꿈이나 이상보다는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스포츠 선수"나 "꿈과 이상을 이뤄주는 과학자"나 "투지로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혁명아"같은 주인공을 보고 동질감을 느끼라고 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얼핏 우리의 88만원 세대 문제와 겹쳐보이는 점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유동성이 높아서 항상 높은 성취욕을 가져야 하는 한국의 사정과는 또 틀리다)
이러다보니 만화 주인공에게 바라는 모습도 틀리다. 1960년대 데츠카 오사무의 만화에 나오는 소년 주인공들은 "어른들의 비뿔어진 욕망-전쟁과 과학기술 오용으로 파괴된 사회와 일상을 되돌린다"는 욕망의 반영물이었다. 1970년대는 역시 피땀어린 근성으로 지금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 안에서 남에게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가 한껏 반영된 주인공들이나 이에 반하는 안티 히어로들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는 우정 노력 승리라는 슬로건을 내건 소년 점프의 대성공에서 보듯이 사회전체에 에너지가 넘처흐르는 시기였다. 하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완성된 장르공식이 사회 분위기가 변화된 지금 2000년대에는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릴때 아버지가 직장에서 잘리고 어머니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고, 이런 개개인의 사정에 비교적 냉정한 일본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만화 주인공이 천재적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사회적인 성공과 영광을 쟁취하는 이야기에 흥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 군이 그 짜증나는 면모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의 광범위한 일체감/기시감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것을 보라. 이런 바뀐 사회분위기는 일본 편집부의 골머리를 썩혔다. 일본 편집부의 분위기는 변화에 둔감하고 보수적인 분위기가 많고, 특히 아주 오랜 전통을 지닌 소년 매거진의 편집부에게 이런 저성장 사회의 의욕을 잃은 신세대 독자라는 소비자 층에게 설득력을 가지는 주인공의 창조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였다. 만화 [DAYS]의 주인공을 보면 매거진 편집부는 한 대답을 찾아낸 듯 하다.
이 만화의 주인공 츠카모토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는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보통 지금까지 만화주인공이라면 이러다가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고 실력이 좋아져 활약을 하고 팀의 중심으로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철저하게 재능이 없다. 팀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도 계속 노력을 한다. 그래서 이 주인공의 노력에 감명을 받은 다른 팀원들이 눈을 뜨고 열심히 노력을 해서 팀은 시합에서 이기게 된다... 바로 이런 부분이다. 자신이 남을 위해서 특별히 열심히 노력을 하거나 이런 것이 아니고, 자기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게 맡겨놔 주면 자신은 그것을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자신은 큰 조직이나 팀에 봉사를 했다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 기존 장르 주인공에서 약간만 비틀어서 지금 사회의 젊은이 층이 바라는 주인공 상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제 3권이 출간된 이 만화가 롱런을 하면서 어떻게 될지 점치는 것은 아직 섣부른 짓일지도 모른다. 장기연재를 하다가 결국 익숙한 장르구조가 고개를 들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지극히 평범한 만화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독자층의 생각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지면에 반영한 작품을 내놓은 매거진 편집부의 수완에는 주목을 해볼만 하다. 물론 이미 한국은 웹툰 시스템을 통해서 사회전체와 긴밀히 호흡하지 않으면 만화가 크게 흥행하기 어려운 구조가 들어서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