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앙굴렘이라는 도시는 지역산업발전의, 또는 국가적 단위에서의 이미지 산업 발전의 균형적 모델로써 참조할 만하다. 유럽 대륙의 가장 큰 출판만화 페스티벌이 자리를 잡자, 점차적으로 “국립 만화이미지센터(CNBDI)”의 건립, 고등학교에서 박사과정까지 이어지는 교육기관들의 유입, 그리고 이미지 산업 관련 업체(출판사, 스튜디오 등)의 유치 등 문화, 교육, 산업을 한 자리에 모으는데 성공한 모범적인 클러스터이다. 따라서 페스티벌 기간 동안 이 도시를 방문한다는 것은, 만화가는 만화가대로, 출판사나 기관들은 그들대로, 다양한 네트워크를 개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1월이 되면 많은 수의 만화가, 출판사, 제 기관의 담당자들이 인구 7만명의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다.
한국만화와 앙굴렘의 인연은 1999년에 시작해서 벌써 올해로 10년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지원과 정책 하에서 어떻게 유럽시장으로 진출했는지, 장단점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상황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이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때라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 그리고 그를 통한 유럽으로의 진출은 세 개로 나눠지는 만화권역(유럽, 미국, 극동권)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하나의 사례에 대한 세세한 분석이 여러 사례에 대한 수박 겉핥기식 언급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자세한 권역별 현황은 다음의 기회로 미뤄두도록 하자.
현재 출판만화 주 지원기관으로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하 코카), 서울 애니메이션센터(이하 애니센터), 부천만화정보센터(이하 부천)가 있다. 유럽지역과 관련해서 이 기관들이 벌이는 해외진출사업은 크게 1) 현지 페스티벌, 북페어의 작가, 작품 소개(콘진, 애니센터, 부천), 2) 현지 해외마케팅 활성화/해외진출 마케팅 지원 :(콘진 해외사무소) 3) 한국 만화 소개서 발간(‘만화’, ‘한국만화100선’ 등: 콘진) 4) 해외 수출 기획만화 제작 지원(애니센터)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다른 부문 사업과 연계된 사업도 있겠지만, 일단 이 글에서는 이 맥락만 짚어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1. 만화(manhwa)의 앙굴렘 진출 과정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앙굴렘으로의 제 기관들의 진출은 주로 행사기간 내 저작권 관련 부스를 마련하고, 한국만화를 번역 없이 그대로 들고 가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사실 저작권 부스는 관계자들만 입장 가능하고 일반 관람객들은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어서 대중적 접촉이라기보다는 전문가와의 접촉이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기초적 정보나 관심이 부재했었기에 실질적인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유일하게 소개되었던 만화라면 일본만화(이하 망가)의 수입에 섞여있었던 이현세의 몇 작품에 불과했다. 결정적인 전환기는 2002년부터 준비한, 콘진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마련된 2003년의 "한국 만화 특별전"이었다. 만화는 커녕, 한국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을 포착,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만화사를 비롯 동시대 작품들까지 함께 보여주었다. 이 전시와 행사는, 앙굴렘 페스티벌의 역사 속에서도 몇 순위 안에 꼽힐 정도로 훌륭했다고 평가받았다. 당시에 소개된 작품 대부분이 일본의 망가스타일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주로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만화였다는 점은 한국의 만화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수준이 꽤 높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었고, 앙굴렘에 모여든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의 출판사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모았다.
당시의 프랑스 만화 출판계의 상황을 한번 알아보자.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의 가장 괄목할만한 현상은, 망가의 확고한 자리매김이다. 70년대부터 소개되기 시작한 망가들은 소규모의 망가전문 출판사를 통해 유통되거나, 아키라처럼 전체 채색과 판형을 완전히 유럽식으로 바꾸어서 소개하는 것, 또는 주로 성인포르노물이 그 주류였다. 하지만 20여년에 이르는 꾸준한 진출,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와의 연계는 독자층을 서서히 확보시켜왔고,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의 신간들이 빠른 속도로 소개되었다. 대부분의 거대 출판사들이 망가 관련 독립 섹션을 만들거나 아예 따로 담당 출판사를 차리는 등, 일본 망가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잘 팔려나갈 만화들을 사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와중에 한국만화라는, 극동권의 또 다른 만화의 존재가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접촉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전 이후의 수순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했다. 예정된 준비위원회의 해체, 차후 담당주체의 부재는 여러 번의 문의와 연락을 무효로 만들었다. 화려하게 피어 낸 꽃을 뽑아내 시들게 한 것과 다름없다. 한국 측에서 어떤 적극적인 활동도 벌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세베데 출판사(See BD)’가 한국 만화를 번역 출판하는 도깨비(Tokebi)섹션을 만들었고, 이어서 사피라(Saphira)라는 섹션으로 순정만화를 소개했다. 새롭게 망가 시장에 뛰어든 후발주자 중의 하나였던 이 출판사는 힘들게 거대출판사들과 경쟁하며 망가를 수입하기보다는 한국만화 중에서 일본망가와 유사한 작품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이를 제외하면, 몇몇 작품이 ‘파께’나 ‘델쿠르’같은 출판사에서 약간씩 소개되다가, 2006년 하반기에 이르면 ‘카스테르만’ 출판사가 ‘한국’이라는 섹션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형식의 만화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 시점은, 더 이상 웬만한 망가 형식의 만화의 저작권은 거의 다 구입했다고 판단했을 때, 그리고 망가 형식만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아시아만화도 보고 싶다는 욕구가 드러나올 때와 시기를 같이 한다. 이제 ‘한국만화 특별전’에 소개되었던 대부분의 만화는 소개가 끝났고, 웹툰의 출간물, 그리고 학습만화에까지 다양한 한국의 만화가 소개되고 있다. 얼핏 보면 우리만화의 유럽권 진출은 상당히 활발하며, 이러한 결과만 두고 보자면 제 기관들의 도움은 적절했던 것처럼 보인다.
2. 프랑스 진출과정의 문제점이제 결과 중심이 아니라, 제 기관들의 지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2003년 특별전 이후 해외관련 사업의 특징은 수동성, 반복성, 소비성이다. 하나의 케이스를 비교해보자. 세베데 출판사는 한국으로부터 한국만화 전문 출판사라는 이유로, 한국 작가 초청 비용이나 행사 비용의 일부를 지원받아왔다. 반면 2003년, 카스테르만 출판사에서 제안했던 박건웅의 꽃 출판 일부 지원요청은 "콘진은 예술이 아니라 산업을 지원하는 곳이다"라는 말로 거절당했다. 이 책은 결국 3년 뒤, 동일한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이 사례는 우리 기관들, 또는 만화전문 인력들의 수동성, 현장 파악수준이나 전문적 판단수준의 일천함, 일관성의 부족을 잘 보여준다. ‘한국망가’라는 기묘한 표현, 즉, 한국인들이 그린 ‘망가’라는 표현이 있다. 아무리 망가가 두 가지 의미, 즉 ‘일본 국적의 만화’와, ‘일본만화 형식의 만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도 기분 좋지 않은 표현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표현이 통용되는 데 기여한 세베데 출판사에 지원한 것은 한국의 기관들이다. 만약 한국만화특별전이 그런 이미지의 탈피를 위해 한국엔 다양한 만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꽃’ 대신 ‘세베데’만의 지원은 망가식의 한국만화에 대한 편파적 지원으로, 특별전의 노선과는 정반대라는 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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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 작가의 [꽃] 표지 이미지 |
물론 초기에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우리는 터를 닦을 필요가 있다. 한국만화특별전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잘 닦은 터였다. 그러나 오늘날 프랑스의 출판사들을 보면, 한국의 기관들이 지원한다는 점을 아주 잘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작가의 개발에 나서기보다는, 이미 출판된 책의 저자들을 불러 독자들에게 헌정을 하도록, 즉 책을 더 많이 파는데 기여하도록 한다. 한국은 만화의 ‘프로모션’이라는 원칙하에 줄기차게 출장비용을 대고 있다. 이런 행사에 일본 만화가들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들을 불러들이는데 드는 많은 비용을 페스티벌 조직위에서도, 그리고 출판사에서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망가’ 전시 공간이 따로 있어도 거기엔 단 한 명의 일본 작가도, 원화도 찾기 힘들다. 물론 일본은 망가의 대국이고, 서비스 품목을 끼워 망가를 팔아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며, 우리의 현황은 일본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진출 초기의 형태와 동일한 지원을 반복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 기관들의 지원 방식은 해외 출판만화상황의 변화와 무관하다. 이미 프랑스에 발간된 책, 그리고 그 책의 판매고를 올리기 위한 작가 초대, 그런 방식을 계속 지원하는 것은 지금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이미 프랑스와 유럽에서의 한국만화 시장은 형성되어 있다. 각 출판사의 편집진들은 출판된 한국 작가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가만히 두어도 이 작가들의 신작을 위한 접촉은 증가될 것이다. 아직도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의 부재이다. 지금 절실한 일은 훌륭한 콘텐츠의 지속적인 생산이며,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미래의 책들,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작가들, 이들을 위해 준비하는 일이 아닐까? 페스티벌 지원 사업을 제외하고도 보면, 프랑스에 진출하면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시장의 특수성 때문에,콘진의 유럽지역 해외사무소는 런던에 있는 탓인지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다. 또한 콘진의 지원 사업 중 하나였던 3개 국어로 제작된 ‘만화’ 소개서나 ‘한국만화100선’의 발행은, 국책으로 할만한 사업이 아니다. 산업적인 도움을 주기엔 너무 늦었고, 외국 연구자나 전문가를 위해 도움을 주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 올해 처음 만들어진 애니센터의 ‘해외 수출 기획만화 제작 지원 사업’은 그 과정을 한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사업은 현재 우리나라의 출판사나 기획사, 에이전시의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3. 앞으로 해야 할 일현재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의 상황은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을 필요로 하고 있다. 물론 해외 시장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필요성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이 시장이 창작역량의 강화와 만화콘텐츠의 활발한 생산에 도움이 될 것만은 확실하다. 국내의 출판시장에 활기를 넣기 위한 대책과 더불어, 해외시장으로의 더 적극적인 진출을 위한 정책의 생산은 기관들이 지금 힘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더군다나 앙굴렘은 맨 처음에서 언급했듯이 페스티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립만화이미지 센터, 다양한 학교들, 출판사 및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모여 있다. 이런 교육, 문화, 산업 방면에 있어서의 한국 측의 상황과 요구에 필요한 사업들을 얼마든지 만들어 볼 수 있다. 학교간의 교류를 통한 교수와 학생들의 교류, 전시에 필요한 자료들의 상호교환, 만화 콘텐츠에 대한 수출과 그를 통한 다른 매체들로의 이전을 위한 상호협력, 해외기금의 도입 등 무한한 가능성들은 여전히 처녀지로 남아있다. 이렇게 본다면 10년간의 탐방과 교류, 진출은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물러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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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앙굴렘 행사장 전경 |
가장 좋은 방식은 해외 시장개척을 위한 담당주체의 마련이다. 상시적으로 해외 사장의 동향을 파악해서, 그에 적당한 방식으로 새로운 작가들과 작품들을 준비해야 하며, 가능하면 그 창구는 일원화되어야 한다. 한국의 단체를 구분하기 힘드니, 서로 협의해서 교류 방안이나 전시 방안을 가져와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콘진은 지원기관이지 실질적 실무를 볼 수 있는 기관이 아니므로, 부천이나 애니 센터 중 한 곳에 해외시장개척 주체나 조직을 마련하고 이를 중심으로 상호협력 하에 사업을 진행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만약 이런 담담주체가 2003년 준비위원회가 해체되자마자 생겨났다면, 향후 만화의 소개방식은 상당히 달랐을 것이며, 지금쯤은 단지 출간된 만화를 판매하는 수준이 아니라, 젊은 작가들의 현지 출판역시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찌 본다면 전문적인 담당주체의 부재야말로 수동적이고 반복적이고 때늦은 지원의 원인이다. 해마다 동일한 사업이 진행되며, 담당자의 수시적인 교체는 매해 똑같은 의문, 똑같은 문제제기의 무한반복을 만들어 왔다. 작가와 작품 리스트를 가지고 각 작품의 성향에 맞는 출판사와 상시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해외 네트워크의 형성, 출판만이 아니라 교육과 산업, 문화, 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의 커뮤니케이션 통로로서의 역할,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만 내일의 책, 내일의 작가를 산출할 수 있는 건전한 해외출판, 해외협력 사업의 모범적 사례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총괄적이고 적극적이고 통일적인 시스템만이, 페스티벌 작가 작품 소개나, 현지 해외마케팅 활성화, 또는 해외 수출 기획만화 제작 지원 등의 사업들 역시 상대방의 요구에 응하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그 맥락을 정확히 짚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출판공간의 부족으로 웹과 학습만화로 향해야만 하는 젊은 예비 작가군에게, 독자들과의 교감의 공간의 부족으로 사라져가는 시간을 안타까워만 하는 중진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 할 우리의 사랑하는 점차 나이먹어가는 만화가들에게, 또 하나의 희망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