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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롤 쌍 빠삐에 Paroles sans papiers 의 표지 |
프랑스에서는 불법체류자를 체류 허가 서류가 없다는 뜻에서 ‘쌍 빠삐에 sans papiers’ 라고 부른다. (불어로 빠삐에는 종이란 뜻도 있지만 증명서, 신분증이라는 의미도 있다) 델쿠으Delcourt 출판사에서 최근에 출간된 『빠롤 쌍 빠삐에 Paroles sans papiers』은 그동안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프랑스 사회에서 만들어내는 문제에만 집중하던 일부 언론들과 정치인들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불법체류자로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연들을 가지고 프랑스까지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들의 증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만화책이다.
참여한 작가들은 로렌조 마토티를 비롯해서, 2006년 『어떤 전쟁이야기를 위한 기록 Notes pour une histoire de guerre』으로 앙굴렘 만화페스티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작가 gipi, 2007년 『lupus』로 앙굴렘 페스티발 essentiel상을 수상한바 있는 frederic peeters, 그리고 최근 프랑스 만화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Bruno, cyril pedrosa등 9명이다. 신구를 아우르고 각자 자신만의 작품세계가 뚜렷한 작가들이다.
만화책은 여배우 임마뉴엘 베아르와 2008년 앙굴렘 페스티발 심사위원장이였던 아르헨티나 만화가 조세 뮤뇨즈의 서문으로 시작된다. 임마뉴엘 베아르는 1996년 쌩 베르나르 성당에 경찰이 들이닥쳐 그곳에 피신해 있던 불법체류자들을 체포했을 때, 불법체류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그곳에 있다가 목격했던 경찰의 무자비한 체포 장면을 상기하며, 독자들에게 불법체류자들의 비참한 상황과 그들에게 가해지는 인권유린의 심각성을 호소한다.
죠세 뮤뇨즈 역시 모국 아르헨티나의 불안정한 정치상황 때문에 망명을 했지만 수년간 불법체류자로 유럽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설명하며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이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몰아내기에 바쁜 유럽의 이민정책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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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집에 참여한 Bruno의 작품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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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집에 참여한 jourvry의 작품중 일부 |
9개의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짤막하지만 절박하다. 부모가 살해된 고향을 떠나 유럽에 가기위해 세 번이나 사막과 바다를 건너야만 했던 콩고여인의 이야기,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혀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코트디브아르인의 이야기, 프랑스 인에게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매춘에 나설 밖에 없었던 콩고소녀의 이야기, 전쟁통인 체첸을 떠나 프랑스로 왔지만 체류심사 과정에서 서류미비로 체포되어 곧바로 국경으로 내쫓기는 체첸인 가족의 이야기 등이다.
책의 마지막은 최근 수십 년간의 프랑스 이민의 역사와 프랑스 이민정책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가 실려 있다. 프랑스 내 인구조사에 의하면 1천 4백만의 프랑스인이 부모 중 한명 또는 조부모 중 한명이 이민자인 사람들이다. 프랑스 고속도로의 90퍼센트, 프랑스에서 생산되는 기계 7대중 1대, 프랑스 건물 2채 중 1채는 외국 이민노동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건설되었다.
좀 더 자세히 프랑스의 상황을 살펴보자. 사실 1990년대 들어 프랑스 이민법은 점점 더 강화되기 시작하고 불법이민자에게 피신처를 마련해준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한 일까지 생기게 된다. (이 사건은 유태인을 숨겨준 사람을 처벌하던 나치치하의 프랑스를 연상케한다.) 현재 프랑스 대통령인 니콜라스 사르코지(Nicolas Paul Stephane Sarkozy de Nagy-Bocsa)가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던 시점부터 이민법은 더더욱 강화되고, 그는 각 도청에 불법이민자를 잡아내기 위한 세세한 지시사항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경찰이 하교하는 손자를 마중 나온 불법체류자 중국인 할아버지를 교사와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체포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사르코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많은 인권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민 국가정체성부를 만들고 2007년 연말까지 27000여명의 외국인을 국외로 추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도 노령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그들에게 연급을 지급해야할 현역 노동인구는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노동인구 수급을 위해서는 이민은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해결책이다. 이민자를 쫓아내기보다 오히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 각계의 의견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부풀려서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지지층을 확보하고 더 많이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이 벌게 해서 프랑스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이겠다면서 대통령이 된 니콜라스 사르코지는 이민자 쫓아내는 정책 말고는 하나도 제대로 해 놓은 게 없어서 취임 1년을 맞은 지금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최악의 지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유래 없는 유로화 강세와 원유 값 폭등으로 원인을 돌리며 변명하고 있지만 그를 향한 프랑스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은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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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유로의 벌금형을 받았던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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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금형에 반발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일러스트레이션집 ≪ 모두 유죄다Tous coupable ! ≫ 의 표지 |
2007년에는 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책 표지에 경찰을 돼지로 묘사한 그림 때문에 50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 내무부장관 이였던 사르코지가 공권력에 대한 도발을 강력히 처벌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유죄선고를 받은 일러스트레이터는 수많은 만화가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메일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호소했고, 그것은 많은 공분을 불러일으켜 모두들 경찰을 돼지로 묘사한 그림들을 그리고, 그 그림들이 『모두 유죄다 Tous coupables!』 라는 책으로 발간된다.
취임 1년째를 맞은 사르코지 대통령은 엄청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고 있고, 정책의 수정과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그가 이제부터 어떤 정책들을 쏟아낼지 그리고 프랑스의 만화가들이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 『빠롤 쌍 빠삐에 Paroles sans papiers』가 발간된 지금 이후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