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에몽>의 애호가로 소문난 모 탤런트 만큼은 아니지만, 필자도 나름 도라에몽을 좋아한다. 고향의 친구들은 나만 빼고 모두들 진즉에 결혼하여 부모로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친구 중 한 녀석의 딸은 무려 10대가 되었다. 예전에 삼촌이라 불리는 수상한 아저씨로서 그 아이가 갓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선물했던 게 <도라에몽> 단행본 세트였다. 나름 뜻 깊은 선물을 전했다고 혼자 뿌듯했는데, 친구의 아내로부터 나중에 전해들었던 말은 좀 섭섭한 것이었다. 그동안 아이에게 만화책과 접촉할 기회는 물론 그런 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선물한 도라에몽 단행본 때문에 아이가 만화책과 결국 접하고 말았다는 거였다. 만화책이 나쁜 것도 아니고, <도라에몽>처럼 건전하고 어린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만화가 어디 있냐는 나의 주장은 여태 나잇값 못하는 키덜트 삼촌의 허튼 소리로 무시당했다.
어쨌거나 아이는 컸고 다른 온갖 것들에 마음이 빼앗길 테니, 소녀는 스스로 이젠 만화책 볼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화책이 내다버려지지 않고 어디엔가 처박혀만 있어도 다행이다. 나는 전해주려고 사놓았던 도라에몽 플러스 6권(5권이 나온 지 한참 후에 뜬금없이 작년에 발매되었다)을 도로 내 서재에 꽂아두었다. 쳇, <도라에몽>은 다시 내가 사 모을 테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항상 아이처럼, 만화책과 장난감 같은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어른. 그게 나고, 이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거다. 누가 무슨 땅에 집을 사고 차를 샀대도 별로 관심이 없는 대신, 새로 나온 게임기나 초합금 로봇 따위에는 마음이 꽂혀 욕망을 주체할 수 없다. 친구들이 주식의 오르내림을 걱정하면 이쪽은 ‘닌텐도 스위치’의 정발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걱정하는 식이다. 나는 친구들의 아내들에게 공공의 적이다. 혼자 결혼도 안 하고 대체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사는지 미스터리인 남자가, 밤만 되면 직장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남편들을 콘솔 게임기의 온라인 놀이터로 불러낸다. 이 나이 먹고도 여전히 옛날처럼 “○○아, 노올자!”하고 외치는 이는 나뿐이고, 호호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계속 그럴 작정이다.
△ 대원씨아이 <도라에몽> 개정 완전판(전 45권)의 일부 표지.
故 후지코 F 후지오(藤子 F 不二雄) 선생의 <도라에몽ドラえもん>. 1969년 12월부터 시작한 원작 만화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애니메이션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주인공 진구와 이슬이, 퉁퉁이와 비실이는 22세기 미래에서 온 고양이형 로봇 도라에몽과 함께 언제나 무한 반복하는 어린이 시절을 산다. 잘 만든 캐릭터의 힘은 무섭다. 상업적인 위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창조주인 작가의 수명마저 초월하여 더 오랜 삶을 산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쇼는 계속되어야 하고, 팬들은 캐릭터와의 이별을 바라지 않기에 다음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주길 요구한다. 몇 번이나 마지막 시즌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던 <심슨 가족>은 1987년 레이건 시대에 시작하여 세기를 지나 오늘날의 트럼프 정권에도 건재하다. 때문에 바트와 리사는 스프링필드 공립 초등학교를 같은 학년으로 30년째 다니는 중이다. 작가의 느닷없는, 안타까운 사망에도 불구하고 <크레용 신짱>의 짱구도 여전히 요절복통 장난꾸러기의 삶을 산다. 우리의 <아기공룡 둘리> 역시 여전히 ‘아기’공룡이다(‘성인’이 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보고서>(2003, 최규석)는 잠시 잊자). 어려서 캐릭터와 작품을 접한 이가 성인이 되고, 그의 아이가 태어나 이들과 새로 만난다. 이들 만화와 캐릭터는 어린 시절에 거쳐 가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거나, 또는 끝내 헤어지길 거절하는 나이 많은 팬에게 영원히 늙지 않는 친구가 된다.
이유는 자명하다. 캐릭터가 ‘팔리는’ 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즌이 끝날지언정 세계가 끝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 끝없는 이야기란 의도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작가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어 하는 자인 동시에 반드시 끝내고 싶어 하는 자다. 한 가지 이야기만 계속 하는 일은 따분하고, 무엇보다 극심한 작업량은 작가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킨다. 창작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적인 노동이다. 그 노동을 멈출 수 없는 것엔 작가 내적인 의지보다는 외부의 요구가 더 크게 작용한다. 돈만이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떼돈을 벌기 위해 기획하는 캐릭터는 묘하게도 수명이 짧다. 오직 대중의 감정과 영혼에 도달한 캐릭터만이 오래 살아남는다. 죽일 수 없는 캐릭터를 두고 대개 작가가 먼저 떠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소년은 어쩌면 좋을까? 소년의 성장을 돕기 위해 미래에서 온 만능의 친구는 그의 곁을 떠나질 않는다. 소년은 반복되는 세계에 갇혀 자라지 못한다. 이야기 밖의 독자는 성장하여 작품과 캐릭터를 떠나 끝내 어른이 되지만 만화 속 소년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엉뚱한 짓을 해야만 오늘의 사건 사고가 진행되는 이 시트콤 같은 세계에서 소년은 공부 꼴찌에 운동 신경 제로, 근시에 허약하고 노력은 귀찮고 늘 요행만 바라면서 이성에 대한 관심만 많은 실뜨기와 수면 전문가로 남아야 한다. 국가가 자신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면 이 세상은 끝인 소년. <도라에몽>의 마지막 회가 필요한 것은 독자가 아니라 진구다.
알다시피 <도라에몽>의 본편 원작 만화에는 명확한 의미로서의 ‘마지막 회’가 없다. ‘텐토우무시(てんとう虫=무당벌레) 코믹스’ 레이블로 나온 45권짜리 단행본(국내 정발된 단행본과 같은 판본)의 지면상으로 마지막인 에피소드는 ‘갈라파 별에서 온 사나이’다. 매회 결말이 있는 단편 시트콤 형식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분량이 길었던 이 모험극 이후, 후지코 F 후지오 선생은 극장판 애니메이션과 연계한 긴 호흡의 장편 시리즈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그런데 기존 에피소드들 중에는 <도라에몽>의 실질적인, 또는 잠정적인 최종회로서 거론되는 몇 개의 에피소드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갈라파 별…’과 함께 단행본 6권 말미의 ‘안녕 도라에몽’, 그리고 미수록 작품집 도라에몽 플러스 5권 마지막에 실린 ‘45년 후’이다. 필자는 갑작스레 플러스 6권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 ‘45년 후’를 최종회로 간주하고 있었다.
△ 소학관 <후지코 F 후지오 대전집>의 광고와 대전집의 <도라에몽> 1권 표지.
1기만 33권 분량! 총 4기에 걸쳐 발간되었다. 전권을 꽂으면 책장 하나를 온전히 다 채울 정도.
그런데 일본 위키에 의하면, 소학관에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간행한 전 115권(!) 분량의 ‘후지코 F 후지오 대전집’에 기존 텐토우무시 단행본에 실리지 않았던(플러스에도 없는) <도라에몽>의 에피소드들이 완전하게 수록되어 있고 그 중 ‘도라에몽 미래로 돌아가다’(1971)와 ‘도라에몽이 없어져버려?’(1972) 역시 마지막 회로 거론되는 작품들이라고 한다. 이 대전집은 <도라에몽>의 잡지 연재 당시 초등학생 독자가 만화 속 진구와 같은 자신의 학년으로 작품을 읽도록 한 시스템을 되살렸고, 이 에피소드들은 학년별로 마지막 회에 해당한다는 것. 그러니까 1학년에서 6학년까지 1년마다 일종의 시즌 피날레가 있었던 셈이다. 이 대전집이 국내에 발간되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이라 그 실체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도라에몽이 진구와 우리를 몇 번씩 떠나곤 했던 녀석이라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2015년에 개봉한 3D CG 버전 극장판 <도라에몽:스탠바이미 STAND BY ME ドラえもん>(2014)가 좋았던 것은 후지코 F 선생의 정겨운 그림체를 CG로 잘 옮겨낸 것도 있지만, 무리하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대신 원작 만화의 기존 에피소드를 충실하게 엮어 작품과 캐릭터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극장판의 마지막은 단행본 6권 ‘안녕 도라에몽’의 내용을 충실하게 따른다. 이 에피소드는 이미 애니메이션으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다. 곁에 있어달라는 뜻의 부제와 예고편에서부터 이런 전개가 될 것임을 뻔히 알 수 있도록 노출이 많이 된 까닭에 다시 마음이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고, 도라에몽 녀석은 분명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극장판을 보고 울기 직전의 상태에서 간신히 참아냈다. 집으로 돌아와 기존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버전 ‘안녕, 도라에몽さようなら、ドラえもん’(2009)과 ‘돌아온 도라에몽帰ってきたドラえもん’(1998)을 연달아 찾아보았다. 애니메이션에선 캐릭터의 눈동자를 떨리게 만들어 울기 직전의 상태와 감정을 표현한다. 이 기법을 처음 시도한 애니메이터는 누구였을까? 그는 위대하다! 울기 직전 진구의 눈처럼 내 눈 역시 부르르 떨렸다. 만화책을 펼치면서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원작 만화의 ‘안녕 도라에몽’은 표지를 합쳐 불과 10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분량이다. 진구는 오늘도 자신을 못살게 구는 퉁퉁이를 피해 집으로 도망쳐서 도라에몽에게 싸움에서 강해지는 도구를 부탁한다. 그런데 도라에몽은 전과 달리 “혼자서 감당 못할 싸움은 아예 하지마!”라고 버럭 화부터 낸다. 그리곤 미래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어렵사리 꺼낸다. 깜짝 놀라는 진구가 도라에몽을 붙잡지만 애니메이션에서처럼 격렬하게 엉엉 우는 장면은 없다. 부모님과 함께 조촐한 송별회를 하고 나란히 이불 속에 눕지만 둘 다 잠이 오지 않는다. 둘은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약을 먹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해가 뜰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진구가 걱정되어 혼자 숙제할 수 있는지, 퉁퉁이나 비실이가 괴롭혀도 이겨낼 수 있는지 묻는 도라에몽에게 진구는 시원스레 웃으며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훌쩍이며 잠시 자리를 피하는 건 도라에몽이다. 진구는 도라에몽이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라며 웃는다.
이 때, 몽유병 증상이 있는 퉁퉁이가 나타나 진구 앞에 선다. 다시 시비를 걸고 싸우려는 퉁퉁이에게 진구는 도라에몽이 모르게 혼자 맞선다. 실컷 얻어맞지만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진구는 퉁퉁이 몸에 끝까지 매달린다. “혼자 힘으로 널 못 이기면 도라에몽이 안심하고 미래로 돌아가지 못해!” 질려버린 퉁퉁이는 졌다고 선언하고 쓰러진 진구를 내버려두고 도망친다. 도라에몽이 진구를 찾아내 부축하고 돌아오는 길, 진구는 맞은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서도 웃으며 “나 혼자서 이겼어.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겠지?”라고 말한다.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도라에몽은 해가 뜰 때까지 잠든 진구 곁에 가만히 앉아 있다. 해가 뜨고, 도라에몽은 없다. 책상 서랍만이 열려있다. 양치질을 하는 진구에게 엄마는 “도라에몽은 갔니?” 묻고 진구는 “응.”하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리고 마지막 컷. 텅 빈 방 한가운데 혼자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는 진구. ‘곧 익숙해질 테니 걱정 마, 도라에몽.’ 속으로 말하며 미소 짓는다.
△ 떠나기 전, 진구 곁을 밤새 지키는 도라에몽
(2015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감동을 전하기 위해 다분히 신파적인 요소들을 더하고 표현을 더했지만 만화는 의연할 정도로 단순하게 표현했다. 일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를 떠나보낸 소년은 울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진구는 분명히 한 단계 성장했다. 나는 이 컷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방에 혼자 앉아 있는 소년이 지긋이 웃고 있는 그림이 전해준 감정은 가슴에 오롯이 새겨졌다. 어쩌면 도라에몽은 마음 속, 공상 속의 친구이고 소년은 내내 방에 홀로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꿈이었고 즐거운 꿈이었다. 어른이 되어 끝내 잊힐지라도.
끝내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사람은 행복한 나머지 나이를 잊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애써 행복하기 위해 나이를 잊고 살려 노력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건 나잇값을 물어야 할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친구들은 본인을 도라에몽처럼 여겨 둘도 없는 소중한 벗으로 귀하게 대해야 할 것이다. 뭐, 아무튼 각설하고. 필자 개인적인 의견으로 <도라에몽>의 마지막 회로 가장 합당한 에피소드는 역시 ‘안녕, 도라에몽’인 것 같다. 그러나 <도라에몽>은 알다시피 마지막 회 같은 건 없다. <도라에몽>의 마지막 회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 <도라에몽 최신 비밀 도구 대사전> 유민선 옮김, 대원키즈 2010
‘거짓말 800’의 의미를 되새기기 전에 필자가 개인적으로 뽑았던 최고의 도구는
‘인생을 다시 한 번’과 ‘영혼 타임머신’이었다(...)
필자가 몇 해 전 생일에 셀프 선물했던 책은 <도라에몽 최신 비밀 도구 대사전>(2010)이었다. 이 책은 정말로 대사전이다. 커다란 판형과 두터운 굵기, 충실한 내용은 그저 훌륭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는 이 책이 우리 어른이와 어린이들 모두의 서재와 책장에 꽂혀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다. <도라에몽>에서 나온 온갖 기상천외하고 환상적인 도구가 총망라되어있는 이 책에서 최고의 아이템을 딱 하나만 뽑는다면, 아니 <도라에몽>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템을 뽑으라면 그 도구의 이름은 ‘거짓말 800’이다. 절대적으로 그렇다! ‘안녕, 도라에몽’의 감동을 간직한 채 단행본 7권을 펼쳐 든 독자라면,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