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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기준의 사진으로 보는 만화야사 10 : 만화계의 세대교체
2015-09-08
박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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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계의 세대교체
식민지 시대 신문화의 국내 유입으로 인해 신문, 잡지, 출판계가 활성화되면서 점차 일거리도 많아졌다고 할 수 있다. 소설, 만화, 만문, 삽화 등 능력에 따라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만큼 일자리가 많아진 것이다. 이 시기의 화단과 문단에서 활약하였던 인재들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능력과 학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해방을 앞두고 만화를 비하하는 현상이 하나둘 싹터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만화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만화작가들을 두고 소위 ‘쟁이’라고 얕잡아 칭하며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풍조 때문에 당시 만화를 발표해 오던 대략 4~50명 선에 이르는 작가들 중 반수 이상은 자기 이름을 장난기 어린 가명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만화가로 한창 명성을 굳혔던 최영수는 만화전문지 <만화만문>의 창간호를 펴냈는데, 석학 노산 이은상은 창간 서두에 만화를 비하하는 글을 실어 만화계를 온통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만(漫)이란 것은 회화상의 이단자요 만문이란 것은 문학상의 방랑아다. 그것들이 정통의 법칙을 벗어난 자이기 때문에, 본래의 규도를 버린 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예의와 도덕을 삼가지 아니한다...”라고 설파하였다.이에 앞서 1930년 9월에 발행된 신문평론 전문지 <철필>에는 한 신문삽화쟁이가 쓴 ‘신문소설과 삽화와 삽화가’라는 제하의 글이 실렸다.이 글을 통해서는 당시 신문사 소속 삽화가들의 고단했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모씨가 어느 날 <별건곤>지에 만화가 권구현을 공격한 비평문도 실렸다. 하루에 삽화를 2~3장 내지는 4~5장, 그밖에 만화, 광고도안, 컷 등 인조인간처럼 기계화된 인간이 생산품을 그렇게 쏟아내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라는 투의 글이었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에 우리 만화계를 리드했던 미술계의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나혜석, 그리고 문필계의 김동성, 안석주, 이주홍 등의 인명록을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다. 어떤 인물사전을 찾아봐도 이들의 만화 창작 활동에 관한 이력 사항은 빠져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당시 만화계에 대한 사회인식이 어떠했으며 어떤 푸대접을 받았을지 짐작케 하는 심히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군국주의 일본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 군국주의 당국은 국책에 협력하라는 문화 예술 인사 동원령을 내린다.일본 만화 봉공회가 결성되고, 오카모도 잇베이(岡本一平)를 고문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의 주도하에 회원들이 성전 필승 앙양을 선도하는 만화전을 개최, 전국을 순회하면서 1944년 5. 1 결전 만화집도 출간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으로 국가 방침에 협조했다. <아사히 신문>의 인기작가로서 ‘후쿠짱’을 그렸던 요코야마 유이치(橫山降一) 등 만화가들은 동남아시아까지 출장에 나서며 홍보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다가와 스이호(田川水泡)의 ‘노라구로 일등병’, 시마다 게이조(島田啓三)의 ‘모험 당길이’ 같은 작품들은 승전 영웅담을 주제로 한 청소년용 장편 만화로서, 이를테면 젊은이들에게 군에 입대하도록 부추기기 위해 만들어졌던 선전만화들이다.그러나 일부 작가 중에는 이와 같은 국책에 반대하여 붓을 꺾고 낙향한 만화가들도 적지 않았다고 알려진다.
한편 주축 작가들은 패전 후에도 만화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선진 구미에 대적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고용, 전수시키는 등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들의 제자 중 연속만화의 달인이 된 스기우라 유키오(杉浦茂), 캐리커처의 달인 곤도 히데조(近藤日出造), 신문만화의 달인 요코야마 유이치(橫山降一) 등이 1932년 <신만화집단(新漫畵集團)>을 구성하게 된다. 이 단체가 20인으로 확대되면서 만화작가들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수준 높은 인재가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나아가서는 모두 합심하여 만화의 위상을 높이고 만화평론가도 옹립, 만화를 다양하게 발전시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 ‘아톰’의 데츠카 오사무도 신인으로서 막내로 소속되어 있었다.
이 기구가 오늘날 만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게임, 완구를 망라하여 세계를 주름잡는 인재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다. 즉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는 원천인 사단법인 <일본 만화가협회>의 전신이었다.
△ 최초의 일본 만화가 친목단체 ‘만화집단’회원들과 심볼 마크(1944년 5월 1일, 결성)
△ 얼마 되지 않아 인재들이 점차 많아져 갔다.
△ 노라쿠로 상등병
1931년 일본 근대 청소년 스토리 만화의 선구자. 아시아를 일본이 지켜준다는 일본 군국주의 침략을 도운 도물 의인화 연속 만화. 전쟁놀이가 유행하고 징병제도를 홍보하는데 기여한 만화다. 다가와 스이호(田河水泡)
△ 모험 당길이
1933년 전쟁영웅 만화 붐. 2차대전 종전까지 맹활약. 이들 제자들이 만화집단 단체를 구성하여 오늘 일본 만화가협회가 되었다. 시마다 게이조(鳥田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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