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보다 맛있는 밥은 없다지만, 아마 대다수의 현대인은 가정보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점심시간에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 식당이 싸고 맛있는 맛집으로 인정되는 이유는 바꿔 말해 그만큼 바깥에서 사먹는 밥, 즉 외식이 자주 이루어지고 외식에 대한 관심도 매우 높다는 뜻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외식산업은 급격한 도시화, 무한팽창적 성장주의, 불안정한 사회보호망 속에 가장 번창하면서도 위태로운 자영업으로써 존재하고 있다.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인간은 태어나고 먹고 죽을 것이며 그 중에서 먹을 것을 만드는 일이 가장 진입장벽이 낮으므로.) 결과적으로 수많은 식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없어지는, 마치 외식산업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다. 그만큼 식당의 정글을 탐험하며 훌륭한 맛집을 발굴하였을 때의 기쁨과 보람은 크지만 그 ‘모험’에 시간적, 금전적, 미각적 리스크가 크게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중요해지는 것은 ‘정보’다. 초기에는 사적인 입소문 네트워크였던 맛집 정보망은 점차 잡지로, 신문으로, 인터넷으로 평가되고 소개되며 해외에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된지 오래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표지이미지
식당도 많고 음식 관련 미디어도 발달했고 만화도 많은 일본에서 맛집을 소개하는 만화가 다수 출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격적인 맛집 소개 만화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정도지만 사실 이러한 종류의 “음식 에세이 만화”는 일본에 굉장히 많다. 물론 그런 책들이 국내에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명백하다. 작품 속의 맛있는 가게들이 전부 도쿄에 있다는 현실에 피눈물을 흘리며 군침을 삼킨 독자라면 누구나 실감했듯이, 맛집 소개 서적은 근본적으로 지역정보물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가 예외적으로 국내 출판된 것은 작가의 유명세 덕분이지 한국에서는 본래의 목적인 유용한 지역정보 제공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물론 일본 여행을 겸해 만화에 소개된 맛집을 찾아 다니는 열성 미식가들도 있으나, 그래도 휴가 신청, 여권, 비행기표 혹은 배표, 숙박비, 치밀하게 짠 여행 스케줄은 많은 이에게 부담스럽다.)
[식객] 표지이미지
하지만 점차 한국만화의 장르가 다양해지면서 음식만화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맛집도 소개하는 만화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식객]은 우리 식문화와 식재료, 그리고 부분적이지만 맛집을 소개하는 기실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음식만화로 그 포괄성과 만화사적 의의에 있어서 일본의 [맛의 달인]과 비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식객]에 소개된 오뎅식당, 임진 대가집, 벽제갈비 등의 식당은 대부분 식도락가들에게 많이 알려진 유서 깊은 맛집들이라 홍보효과는 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맛집들을 맛집으로 만드는 이유에 대한 통찰이다. 북적거리는 부대찌게 음식점이든, 강가의 고급스러운 복어요리 전문점이든 공통적으로 식재료의 선정과 조리과정이 성실하고 정직하며, 아주 기본적이지만 지키기는 어려운 원칙을 지킨다. 이 성실함에서 오는 지속성은 손님들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고, 사람들이 맛집 정보를 탐색하는 배경을 엿보게 해준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미각적 쾌락도 중요하지만, 급박한 현실 속에 단 몇 분이라도 맛집이라는 검증과 신용을 받은 공간이 주는 안도감과 만족감과 행복감을 맛보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에 더해 [식객]과 맛집의 관계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성찬과 봉주가 수업했고 그 경영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고급 한식당 운암정을 모델로 만든 실제 운암정이 개점했다는 점이다. 만화가 맛집을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맛집을 만든 셈이니, 현실이 예술을 모방한 현상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차이니즈 봉봉클럽] 표지이미지
[식객]은 작가의 음식에 대한 깊은 조예와 폭넓은 취재로 가능한 음식만화였고, 전문소재 만화를 그리는 데에 있어 요구되는 각종 부담과 책임 때문에 음식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아예 맛집으로, 그 중에서도 특수하면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폭을 좁히면 어떨까. [차이니즈 봉봉클럽]은 부유하지만 바쁜 부모님을 둔 탓에 외식이 빈번한 여고생이 차이니즈 봉봉클럽이라는 (공식적으로는 바둑부를 가장하고 있는) 희한한 교내 클럽과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다. 은근히 전통 있고 유서 깊은 이 클럽의 목적은 오로지 맛있는 중국음식을 먹기 위해 중화요리 맛집을 찾는 것이다. 그렇다, 이 만화는 본격 중화요리 맛집 소개 만화인 것이다.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새로운 음식점이 주 메뉴와 약도, 연락처와 함께 소개된다. 짜장면 짬뽕을 넘어서 오이를 넣지 않는 볶음밥의 미학, 대만식 경양식의 매력, 중국 과자의 달콤한 세계로의 초대가 기다리고 있다. [차이니즈 봉봉클럽]은 유익한 정보물이자 국내 음식만화의 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훌륭한 맛집 소개 만화이기도 하다. 음식에 대해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어려워도, 가령 한국 만화가 맛집 앤솔로지 같은 프로젝트는 어떨까. 누구라도 마음 속에 한 곳 정도는 자기만의 맛집과 그에 대한 사연을 품고 있을 것이다.
[고독한 구르메] 표지이미지
마치 [고독한 구르메]의 다소 무계획적이고 따라서 운명적으로 만나는 ‘맛집’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다니구치 지로 작화,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국내 미발매.) 이 만화에 나온 식당들은 [차이니즈 봉봉클럽]과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의 맛집처럼 전부 실존한다. 하지만 굳이 찾아갈 정도로 특출하거나 비범한 곳은 아니다. 자영업 세일즈맨인 독신 중년남성 주인공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렀는데 마침 맛있었던 그런 가게들이다. 따라서 식당이 아닌 포장마차나 기차에서 먹은 식사도 있고 맛없는 음식도 있다. 음식도 상세히 묘사되지만 먹은 장소의 분위기와 소소한 사건도 세밀하게 그려지며 주인공의 먹는 체험을 구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령 음식은 맛있지만 주방장의 험악한 태도 때문에 입맛이 떨어지기도 한다. 역으로 이 불쾌한 체험 덕분에 독자는 주인공의 식사라는 체험, 식당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상론을 듣게 된다. “혼자서 조용하게 풍족하게…” 이 문구에는 극히 개인적인 체험으로써의 ‘먹는 행위’와 [식객]에서 암시되었던 진정한 맛집의 매력이 동시에 들어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충족하려는 포만감은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정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먹는 행위가 그렇듯이, 맛집에 대한 체험과 견해 역시 결국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별하며 소중하다. 먹는다는 보편적인 행위로 묶여 있으되 맛집을 알리고 찾음으로써 그 포만감과 행복감을 공유하고 탐닉하고자 하고, 때로는 [고독한 구르메]처럼 우연히 맞닥뜨린 맛집에는 운명적인 인연을 느끼기도 한다. 편안한 공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아주 잠깐이지만 행복을 느낀다. 맛집의 진정한 존재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