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용어 정의부터. 문예출판사라고 하면, 경제나 경영, 교재 등과 같은 실용서를 내는 출판사가 아니라 인문서, 소설, 예술서 등을 내는 출판사들을 통칭하는 용어다. 문예(文藝)가 문학과 예술을 아우르는 말이니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21세기 들어 문예출판사들이 만화출판에 진출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같은 주제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출간하는 오프라인 매체인 <코믹타운>에 쓴 칼럼을 자기인용 해 본다.
만화생태계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출판사의 참여는 시장 확대로 이어졌다. 70년대 후반, 고우영의 고전극화를 고급 단행본으로 출간한 우석이나, 명랑만화를 출간한 백제, 까치 같은 출판사의 참여로 서점용 만화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2000년에서 2010년,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새로운 출판사 특히 문예출판사들의 참여가 눈에 띈다. 창비와 문지라는 양대 문예출판사는 물론 문학세계사, 샘터 등도 모두 문예출판사다. 여기에 문학동네는 애니북스로, 민음사는 세미콜론과 비룡소로 만화를 출판하고 있다. 이 모든 출판사가 지난 10년 동안 만화시장에 진출한 문예출판사들이다.
창비사단, 문지에콜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창비와 문지는 한국 문학지형을 양분한 출판사들이다. 이 두 출판사는 70년대에서부터 시작해 지난 30년간 한국 문학의 축이었다. 그런데 이 두 출판사에서 만화가 나오다니!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창비의 경우 아주 우연에 가깝다. 인권위원회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인권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사진 프로젝트를 기획, 진행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콘텐츠를 가지고 창비를 찾았고, 창비는 좋은 일 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을 출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소위 대박이 난 것이다. 어! 만화가 되네? 이후 창비는 단행본 팀을 중심으로 만화출판을 고민했다. 하지만 늘 창비전통과 문화가 발목을 잡았다. 2006년 인권만화 두 번째 타이틀인 <사이시옷>을 낸 뒤, 오영진의 가상 르뽀만화 <평양프로젝트>를, 그리고 2008년 최규석의 <한겨레21> 연재작 <대한민국 원주민>과 역시 오영진의 <수상한 연립주택>을, 2009년에는 최규석의 <100℃>를, 그리고 2010년에는 채민의 <그녀의 완벽한 하루>를 출간했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총 7타이틀. 박하다. 그것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 진행한 인권만화 두 타이틀을 빼고,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에서 기획, 진행해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던 <100℃> 빼고, 애니메이션센터 창작지원작품인 <그녀의 완벽한 하루>를 빼면 오영진 만화 두 권만 남는다.
▲ 사계절 출판사에서 진행한 <울기엔 좀 애매한> 이벤트 페이지(온라인 서점 yes24)
문지(문학과지성사)의 형편은 어떨까. 문지의 만화하면 바로 홍승우의 <비빔툰> 시리즈가 떠오른다. 문지는 2001년 시리즈 3권부터 <비빔툰>을 출간하기 시작해 2007년 총 7권까지 시리즈를 출간했다. 신문에 계속 연재가 되고 있는데 비해 만화출간은 현재 중단된 상태. <비빔툰>을 제외하면 정연식의 <또디>와 현태준의 <뿌지직 행진곡>, 그리고 홍승우의 <야야툰>을 모두 2002년에 출간했다. 2002년 뭔가 의지를 갖고 만화출판에 뛰어들었지만, 현재는 개점휴업 중. 권수는 창비보다 많지만 박하기는 마찬가지.
샘터도 잡지 <샘터>로 유명한 문예출판사다. 샘터가 만화를 출간한 것은 2003년. 이진이의 인터넷 에세이 만화 <하루일기 : 하루의 인연 만들기>를 ‘샘터만화세상’이라는 시리즈로 출간했다. 이후 2004년 대만의 카툰작가 지미의 카툰집 <내 마음의 정원>, <지하철>, <왜 Pourquoi> 세 권을 Jimmy Fantasy라는 타이틀로 출간했다. 샘터만화세상의 출간도 계속되었다. 2003년 구상렬의 <목숨 깎아 어디에 쓰시려고?>, 2004년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 살>, 마정원의 <나른한 오후>, 김대성의 <쿠니쿠니>, 2005년 정화영의 <오후 내내>, 이진이의 <하루일기 : 두 번째 이야기>, 루이 트롱댕의 <미스터 오>, 다니구치 지로의 <느티나무의 선물>, 장진영의 <건달 농부의 집 짓는 이야기 1>, 2006년 박은영의 <어떤 그리움>, 2007년 미우라 에이지의 <챔프!>, 2008년 다니구치 지로의 <동토의 여행자>를 펴냈다. 종수도 제법 많은 데 뭔가 정리되지 않는다. 이진이의 <하루일기>나 지미의 카툰 시리즈, 김대성, 박은영의 만화까지는 감성적이고, 일러스트레이션의 표현양식 같은 그야말로 <샘터>와 일맥상통하는 콘셉이 있었다. 그런데 다니구치 지로와 미우라 에이지의 만화가 함께 하고 있어 뭔가 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아직까지 샘터라는 출판사와 만화 시리즈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고 있는 느낌.
사진, 미술 서적을 주로 출판하는 열화당은 미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모두 5권을 천천히 출간했다. 2007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테마로 작업된 만화 니콜라 드 크레시의 <빙하시대>, 마르크-앙투안 마티외의 <어느 박물관의 지하>, 에릭 리베르주의 <미지의 시간 속으로>를 펴냈다. 8권 모두 프랑스 만화며, 특별한 이벤트도, 또 절판도 없이 10년째 열화당 다운 느긋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세계사는 문예지 <문학세계>를 출간하던 출판사다. 문학세계사도 2003년 프랑스 만화출판이 한창 유행할 당시 파스칼 크로시의 <아우슈비츠>와 2004년 기 들릴의 평양 여행만화인 <평양>을 냈다. 여기까지는 당시 현실문화연구나 교보문고, 비앤비 등 프랑스 만화를 번역, 출판하던 유행과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렵다. 결정적 반전은 2004년에 출간한 강풀의 <순정만화>다. 인터넷 스크롤 만화의 신성 강풀의 첫 타이틀을 시작으로 이후 2010년 <어게인>까지 강풀의 모든 작품이 문학세계사에서 나왔다. 강풀의 작품이 일정한 브랜드를 형성하면서, 양우석, 김태건의 <로보트 태권 V> 양우석, 풍경의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면>, 풍경의 <블러드 오션>과 같은 인터넷 만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들의 스타일을 보면 비교적 한 놈만 팬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강풀의 만화를 출간하는 문학세계사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만화출판의 브랜드는 형성되지 못해 보인다. 창비의 만화? 문지의 만화? 열화당의 만화? 샘터의 만화? 뭔가 개성은 있는데 세월에 비해 펴낸 종수가 너무 적다.
반면, 명확한 개성으로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는 문예출판사가 있다. 문학동네와 민음사다. 이렇게 말하면, ‘응? 그 출판사들이 만화를 냈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애니북스와 세미콜론이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애니북스는 문학동네의 자회사고, 세미콜론은 민음사의 출판 브랜드다. 한 출판사와 한 브랜드(판권을 보면, 출판사는 민음사의 자회사 ㈜사이언스북스로 되어있다.)는 지난 10년 동안 다른 문예출판사에 비해 말 그대로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이들이 성공의 달콤함 만을 맛보지도 않았다는 것. 먼저 애니북스. 2001년 앞서 거론한 서구 만화 출간 붐에 기대 마이클 터너의 <심연>을 출판했고, 당연히 피봤다. 흔들리던 애니북스를 살린 것은 2002년 10월 출간한 고우영 <삼국지>였다. 당시 <딴지일보>에서 고우영 <삼국지>의 완전판을 온라인을 통해 연재한 후 CD로 출시했고, 그 여세를 몰아 애니북스에서 10권짜리 시리즈로 펴냈던 것. 입으로만 전해지던 명작 <삼국지>는 흔들거릴 뻔한 애니북스의 만화라인업을 견실하게 견인하게 된다. 이후 어린이 기획만화 개발, 고전만화 복간, 웹 만화 출간, 일본의 작가적 만화출간이라는 뼈대를 세우게 되고, 착실히 종수를 늘려갔다.
고우영의 원작을 자음과 모음과 사이좋게 나누어 <삼국지>, <일지매>, <십팔사략> 등을 펴냈고, 곽백수, 츄리닝, 메가쇼킹, 강도하 등 젊은 인터넷 작가들의 인기작을 펴냈다. 그리고 호연의 <도자기>와 굽시니스트의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를 높은 안목으로 발굴했다. 주목할만한 것은 애니북스가 펴내는 일본만화의 라인업이다. 일본의 대형 만화출판사(슈에이, 고단샤와 같은)은 다른 일본 기업들처럼 연계를 유지하는 일부 출판사들에게만 라이선스를 부여했다. 애니북스는 서울, 대원, 학산, 삼양 등 일본과 거래하던 만화전문 출판사가 선점하지 않은 작가를 물색했다. 마츠모토 타이요, 다니구치 지로, 오노 나츠메처럼 작품성은 물론 풍부한 이야기의 재미를 겸비한 작가들을 선정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형 출판사들이 월 수십 권을 밀어낼 때, 그 틈새를 파고들어 국내에도 지명도 있는 작가의 작품을 골라 출간한 2010년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졌다.
세미콜론의 모델은 애니북스와 조금은 비슷하고, 조금은 다르다. 조금은 비슷한 모델은 일본 만화 출간이다. 세미콜론은 보고 싶은 만화, 가능성 있는 만화를 출간한다. 이가라시 다이스케나 이와오카 히사에, 후루야 우사마루, 아사노 이니오 같은 개성이 넘치는 작가의 만화를 발굴, 출판했다. 여기에 일본 만화 역사 속에서 걸작이라고 칭송받는 작품도 출간했다. 대표적인 타이틀이 데즈카 오사무의 반전만화 <아돌프에게 고한다>와 하기오 모토의 SF <11인이 있다!>다 애니북스의 모델을 설명할 때 작가’적’ 만화출판이라고 했다. 작가주의라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일본만화라 하기에는 너무 평범해 부득 작가’적’ 만화출판이라 부르는 무리를 감수했다. 부가적으로 설명하자면, 이 모델의 핵심은 ‘선택’에 있다. 그런데 둘의 선택은 종종 겹친다. 뭐, 어쨌든 좋은 만화를 보는 독자의 기분은 즐거울 뿐이다.
조금 다른 모델은 서구만화의 출간이다. 애니북스는 <심연> 이후 바로 포기했지만, 세미콜론은 서구의 그래픽 노블을 출간하는 모델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2009년 펴낸 크리스 웨어의 <지미 코리건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나 2010년 펴낸 브누아 페터스와 프랑수아 스퀴텐의 ‘어둠의 도시들’ 연작 같은 만화는 보통 수년에 걸쳐 공을 들인 만화들이다. 한편, 미국의 슈퍼 히어로 만화도 출간했는데, 프랭크 밀러가 참여한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이어원>, <300>, <신시티>를 펴냈다.
여기에 2010년 세 곳의 문예출판사가 새롭게 만화출판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먼저 시작한 문예출판사의 성공과 실패를 교훈 삼아 경쟁력이 제일 큰 분야에서 조심스레 도전장을 냈다. 청소년 도서에 경쟁력이 있는 사계절은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으로 청소년 만화 시리즈를 런칭했고, 디자인 도서에 경쟁력이 있는 디자인하우스는 ‘디자인그림책’이라는 시리즈로 김재훈의 <디자인 캐리커쳐>, 최호철, 박인하의 <펜 끝 기행>을 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남다른 관계의 열린책들은 베르나라 베르베르의 원작을 김수박이 번안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출간했다.
문예출판사들의 만화진출이 늘어나며, 사계절, 디자인하우스, 열린책들의 사례처럼 이제 자기 경쟁력에서 출발해 만화 시리즈를 기획하는 단계로까지 진보했다. 문예출판사들의 만화출판이 정체된 한국만화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이 될까? 몰락하는 장르만화의 대안까지는 아니겠지만,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