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만화라는 장르는 아직 낯설다. 장르가 형성될 만큼 작품의 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만화는 충분히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장르다. 일반 서적의 경우, 해외여행 가이드북 형태에서 시작한 여행관련 서적은 해외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점차 실용적 가이드북 보다는 까페나 쇼핑 같은 미시적 주제를 담거나, 작가의 느낌을 담은 에세이가 일반화되었다. 에세이라면, 오히려 만화가 더 경쟁력이 있다. 책이라면 고작해야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정도를 활용하지만 만화는 그림으로 여행지의 느낌이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만화는 큰 구분에서 자전만화의 하나로 존재해야 한다. 여행가이드 만화나 여행에 대한 만화보다는 ‘자기가 경험한 여행을 그린’ 만화여야 더 독자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 개인의 경험’이다. 작가 개인의 경험이 없으면 여행만화는 여행에 대한 픽션, 여행소재 만화가 된다.
작가 개인의 경험을 정리하면 지식이 된다. 여러 지식 중 오래도록 기억되는 지식은 경험을 통한 지식이다. 끓는 물에 손을 넣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당연히 끓는 물이 뜨겁다는 지식을 더 강렬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물에 손가락을 넣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어떤 지역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하기 위해, 흥미로운 지식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작가 개인의 경험이다. 그래서 여행만화는 다큐멘터리, 논픽션 만화와 일맥상통한다. 큰 틀에서 보면 자전만화의 지류이다. 그러다 보니 여행만화라 부를만한 작품들은 주로 서구의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에 의해 창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만화는 기 들릴(Guy Delisle)이 발표한 두 권의 만화 <센젠(Shenzhen: A Travelogue From China )>과 <평양(Pyongyang: A Journey in North Korea)>이다. 기 들릴은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애니메이터이자 만화가다. 1988년 유럽으로 건너가 주로 애니메이터로 활동하며 동시에 만화를 그렸다. ‘센젠’과 ‘평양’ 모두 애니메이터로 작업을 위해 들렸고, 그곳에서 체류한 경험을 철저히 서양인의 시각에서 해석한 만화다.
부제를 보면 모두 여행기(Travelogue), 여행(Journey)이라는 단어가 붙어있지만 사실은 체류하며 관찰하고 느낀 자신의 경험을 옮긴 만화로 자전만화에 더 가깝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오영진의 만화 <남쪽손님 :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상>(길찾기)과 <빗장열기 :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하>(길찾기)가 있다. 오영진도 경수로 건설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신포에서 1년6개월간 체류한 경험을 옮겼다.
자전만화의 범주에서 여행만화인데, 여행이라기 보다는 장기체류자의 시각에서 본 ‘어느 곳’을 그린 만화라 정확하게는 자전만화에 가깝다. 무릇 여행이란 체류와는 다르지 않을까?
▲ 기 들릴의 <센젠>과 <평양>. 낯선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동양, 그것도 공산주의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평양>은 문학세계사에서 한국어판이 출판되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기 들릴이나 오영진 만화와 또 다른 사례는 미국의 논픽션 만화가 조 사코(Joe Sacco)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도 논픽션 만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번역, 소개된 <팔레스타인(Palestine)>과 <안전지대 골라즈데(Safe Area Gorazde: The War in Eastern Bosnia 1992-1995)>, <풋노트 인 가자(Footnotes in Gaza)>(국내 미출간) 등이 있다.
조 사코는 만화를 그릴 의도로 특정 지역에 들어가 취재를 통해 얻은 경험을 만화로 옮겼다. 기 들릴이나 오영진 모두 ‘취재’를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일(자신의 직업) 때문에 만화의 배경이 되는 특정 지역으로 간데 비해 조 사코는 특정 지역을 목적을 갖고 취재하기 위해서 간 것. 조 사코의 만화는 여행만화, 체류형 자전만화도 아닌 르뽀만화다.
우리에게 익숙한 기 들릴의 <평양>, 오영진의 <남쪽손님>, <빗장열기>,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안전지대 골라즈데>는 모두 여행만화라기 보다는 상위구분인 자전만화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구태여 더 미세하게 구분하자면, 조 사코의 작품은 르뽀만화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짧게 여행을 가고, 그곳의 느낌을 만화로 옮긴 여행만화는 없을까? 우리나라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 라소시아시옹에 좋은 사례가 있다. 라소시아시옹은 1990년 프랑스의 언더그라운드 작가들이 모여 설립한 출판사. 픽션보다는 논픽션, 허구보다는 경험을 중시한 이들은 주로 자전만화를 창작, 출간했다. 이들은 만화가들이 특정 지역을 여행하며 경험, 느낌 등을 담은 책을 출간했는데 1998년 이집트를 시작()으로 2000년에는 멕시코(), 2006년에는 인도()로 시리즈를 계속 진행시켰다. 개성 넘치는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은 여러 스타일로, 여행에서 느낀 경험, 여행과정에 대한 설명, 여행지에 대한 지식 등을 풀어 설명했다. 여행만화를 통해 독자들도 여행의 즐거움을 아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된다. 마치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보통의 만화보다 더 흥미롭고, 생생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구미, 김미정의 <오사카 고베 교토 :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 일행의 일본여행>(안그라픽스, 207)이 있다. 이 만화는 단기적 체험을 다루었지만, 형태가 가이드북에 가깝다. 여행만화라고 하면 ‘가이드<에세이’의 느낌인데, <오사카 고베 교토>는 ‘가이드>에세이’다. 하지만 다른 가이드북보다는 개인의 경험이 훨씬 강조되어있는 책으로 꼭 여행지에 가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여행만화로 꼽아볼 수 있겠다.
최근 하야세 준의 <에키벤>(AK)이라는 일본의 여행만화가 출간되었다. 기차여행을 하며 에키벤(역이나 기차에서 파는 도시락)을 먹는 경험을 만화로 옮긴 작품이다. 큐슈에서 시작해 일본 열도 전체를 기차 여행을 하며 도시락을 먹는 독특한 만화다. 단지 아쉬운 점은 작가 개인 대신 허구의 주인공이 등장해 ‘개인적 경험’이라는 자전만화의 매력을 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여행만화로 꼽아보자.
여행만화는 만화로 만든 가이드북이 아니다. 여행을 떠난 작가의 개인의 경험이 녹아있는 자전만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대신 여행을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경험에 의한 정보는 마음을 움직인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짜릿함을 느낄 수 있어야 여행만화다. 자전만화의 한 갈래로 여행만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생생한 만화로 여행지의 감정을 전달하는 여행만화, 21세기 한국만화에 여행만화를 제안한다.
※참고링크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한 지식의 공유 http://comixpark.pe.kr/130003592957
지식이 재미와 만난 구르메 만화들 http://comixpark.pe.kr/130009243339
라소시아시옹 출판사의 여행만화에 대한 기사
http://www.comicsreporter.com/index.php/briefings/eurocomics/5544/
자전만화 http://comixpark.pe.kr/130086601290
만화로 그려진 북한의 모습 http://comixpark.pe.kr/120005367094
※※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2011학년도부터 콘텐츠스쿨 만화창작전공)와 연을 맺은 만화가들이 그린 여행만화, 드디어 완성되어갑니다. 곧! 출간될 예정. (세미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