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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출판사, 만화와 손을 잡다 (2) : 나쁜 예와 좋은 예

2009년, 일본 서점에서 이스트프레스 출판사에서 출간한 ‘만화로 독파’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명작소설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같은 인문서를 만화로 만든 시리즈였다.

2010-09-14 박인하

나쁜 예


2009년, 일본 서점에서 이스트프레스 출판사에서 출간한 ‘만화로 독파’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생텍쥐베리의 <야간비행>,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은 명작소설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같은 인문서를 만화로 만든 시리즈였다. 작가를 보니 ‘버라이어티 아트워크스’였다. 기획만화가 대세인 한국에서야 팀 활동이 많지만, 여전히 잡지를 중심으로 한 장르만화시장이 살아있는 일본에서 만화 창작팀을 보는 것도 신선했고, 장르만화의 언어로 번안된 명작소설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모 출판사 사장님께 편지를 보내 ‘만화 독파’ 시리즈의 출간을 권했다. 한참 뒤 답장을 받았는데, 이미 판권이 팔렸다고 했다. 그 뒤 2009년 연말 만화연감을 집필하기 위해 지난 1년간 출간되었던 만화도서들을 검색하다가 신원문화사에서 라이센스로 출간한 ‘만화로 독파’ 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마치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아니, 신원문화사에서도 만화를 출판하고 있었네?’


▲ ‘만화로 독파’ 시리즈 중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죄와 벌> 표지


시리즈 1 <죄와 벌>에서 11 <까라마조프의 형제들>까지 총 11권 타이틀이 출간되어 있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받아본 뒤, 판권을 확인해 보았다. 시리즈 1 <죄와 벌>은 2009년 5월 22일 발행, 시리즈 11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은 2009년 11월 10일 발행. 근 5개월간 11권의 타이틀이 출간된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2010년 8월 16일 현재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한 결과 2009년 11월을 끝으로 더 이상 시리즈가 출간되지 않고 있다. 일본 이스트프레스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만화로 독파’ 시리즈는 최신작 <속 논어>와 <손자병법>까지 총 65 타이틀이 출간되어있었다. 신원문화사가 ‘만화로 독파’ 시리즈를 출간하며, ‘독서논술만화필독선’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으니, 일본의 원래 시리즈에서 속해있는 <자본론>이나 맹자의 <논어>, 시이튼의 <동물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입문> 같은 인문서들도 출간할 계획이었으리라. 일본 시리즈에 속해있는 우리에게 낯선 일본소설을 제외하면, 전체가 번역되어 나왔어야 한다. 그런데, 2009년 11월을 끝으로 시리즈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시리즈는 목표인 100권을 향해 속속 시리즈를 더해가고 있는데 말이다.

신원문화사의 ‘만화로 독파’ 시리즈의 출간이 이렇게 꼬여버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생각보다 판매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잘 팔리면 책이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이 판매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첫 번째, 우리 출판시장의 구조는 독자와 책이 만나는 접점이 부족하다. 왜? 서점과 도서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거진 없다. 세계적인 출판대국 일본을 보면, (주로 전철로 출퇴근하는 그들의 동선에 따라) 주요 전철역에는 대형 서점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책을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다. 책을 사러 서점에 가서, 새로 나온 신간을 접할 수 있다. 면대면(face to face) 접촉이 가능하다. 그러니 정성껏 책을 만들면 반응이 온다.

두 번째, 새롭게 만화 시장에 접근하는 대형 출판사가 만화시장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만화로 독파’ 시리즈의 타겟은 누구일까? 만화 독자? 일반 책 독자? 어린이? 청소년? 대체로 중고교생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신원문화사가 ‘중학생 독후감 필독서 100’, ‘밀레니엄 시리즈 100’, ‘우리 고전 다시 읽기 50’과 같은 청소년 시리즈물을 출간했던 출판사니까. 그런데 홈페이지에서는 이 시리즈를 ‘일반도서’로 분류해 놓았다. 서점이 부재해 면대면 접촉이 불가능한 한국 출판시장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시리즈는 오히려 초중학생 부모를 겨냥했어야 한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전개하여, 시리즈를 적극적으로 알려야 했다. 나름 어린이 만화와 신간 만화를 열심히 찾아보려는 전문가조차도 출간 사실을 모르고 지나쳤다면 그건 분명 홍보와 마케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11권 시리즈를 묶어 박스판매를 해야 하고, 이벤트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도 yes24를 보면, 박스도 없고, 묶음 판매도 없고, 이벤트도 없다. 이래서야 새로운 시리즈가 팔릴 턱이 있나.

‘만화로 독파’ 시리즈가 나쁜 만화가 아니다. 다만 우리 만화 독자와 거리감이 있다. 이런 류의 만화라고 하면 독자들, 특히 이 만화를 구매해 줄 부모님들은 ‘기획만화 = 컬러만화’를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의 좋은 학습만화들이 속속 실패했다. 따라서, 흑백만화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소설의 경우 다이제스트판이라도 읽을 수 있다. 핵심은 오히려 비소설 인문서들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나 <자본론>이나 <정신분석학입문>이 좋은 책이라는 걸 모르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읽은 부모도 없(많지 않)다. 그래서 아쉽다는 말이다. 좀 다른 식으로 접근했으면 좋았을 텐데, 기왕 시리즈를 구성하는 김에 한국 작가들과 함께 한국의 걸작들도 번안해서 시리즈 전체를 균형감있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대로 마케팅하고 홍보해 알려줬으면, 후속권으로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좋은 예


좀 섣부른 판단 같아 걱정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앞의 사례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어 소개한다. 2010년 7월 26일,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블로그 안부게시판에 사계절 출판사에서 안부글을 남겼다. 좀 길게 인용하면,

“만화가 최규석과 관련된 글을 블로그에 작성하신 분들께 실례를 무릅쓰고 신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저희 사계절출판사는 『100˚C』와 『대한민국 원주민』으로 널리 알려진 최규석의 신작 『울기엔 좀 애매한』을 출간하게 되어 관심 있는 블로거 분들께 이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고자 글을 올립니다. 『울기엔 좀 애매한』은 대한민국 청소년이 처한 [울기엔 좀 애매한] 상황을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작가는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이 목 놓아 울만큼 극단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슬픈지 모를 만큼 복합적이기 때문에 애매하다는 것을.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깊어진 펜선과 세련된 색감의 수채 만화로 보는 즐거움을 더하였습니다. 또한, 본문 뒤에 들어간 작업 노트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 최규석의 열정을 담아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까지 저자의 사인본을 드리는 예약판매 이벤트를 온라인 서점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YES24, 알라딘, 인터파크, 교보문고)”

사계절 출판사의 블로그 운영자(일수도 있고, 시리즈 담당 편집자일수도 있다)가 최규석을 검색해 그와 관련한 글을 쓴 블로그를 찾아가 안부글을 남긴 것이다. 소비자와 면대면 접촉이 사라진 만화시장에서 새롭게 낸 만화를 어떻게 알릴까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활동이었다.


▲ 온라인 대표 서점 yes24 메인 페이지에 노출된 <울기엔 좀 애매한> 이벤트



뿐만 아니라 앞서 나쁜 예에서 하지 않아서 아쉽다고 이야기한 온라인 서점 이벤트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11권짜리 시리즈도 아닌데, 딱 1권이 나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그럴까? 사계절은 1318만화라는 청소년 만화 시리즈를 새롭게 런칭했고, 그 첫 타이틀로 최규석의 <울기엔 좀 애매한>을 출간한 것이다.

시리즈의 첫 타이틀을 오리지널 작품으로, 신작으로, 출판시장(만화시장과 다른 느낌으로 읽으시길)에서 가장 잘 먹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으로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당연히 나쁜 예와 비교해 더 좋은 결과를 낳고 있다.

문예출판사는 만화출판사(좀 더 정확히 서울, 대원, 학산, 삼양 등)와 달리 출판시장의 기획과 마케팅에 장점이 있다. 이들이 만화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출판시장에서 만화의 지형이 넓어진다는 의미다. 만화생태로 볼 때 전혀 새로운 가치사슬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문예출판사들의 만화 성적표가 좋았으면 좋겠다. 나쁜 예보다 좋은 예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나쁜 예로 거론한 ‘만화로 독파’도 만화 시리즈 자체의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획과 마케팅의 방향수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니, 다시 힘을 내 좋은 예가 되었으면 좋겠다.


* http://www.eastpress.co.jp/manga/index.php?category=31&page=0

*이스트프레스 홈페이지 ‘만화로 독파’ 시리즈 소개 페이지

필진이미지

박인하

만화평론가, 서울웹툰아카데미(SWA) 이사장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
前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정책그룹 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