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는 지면을 할애 받고 잠시 고민했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만화와 가까운 거리에서 살아왔지만(현재도 가방에 『모브 사이코 100』과 『아이 엠 히어로』가 들어있다.) 만화에 관해 글을 쓰는 기회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끝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나 추천하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가장 열정을 가지고 글을 쓸 수 있는 주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좋아하는 수많은 만화들을 어떤 주제로 묶어 소개하는 것이 재밌을까 고민이 들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도달한 지점이, 소년만화만 읽던 나의 편견은 깬 여성 만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해보기로 했다. 아라카와 히로무, 우루시바라 유키, 모리 카오루. 이 세 작가를 소개하는 과정은 각각의 독자층에게 벽으로 다가가기도 하는 일본 만화계에서 소년만화와 순정만화의 서로 다른 특성을 살펴보고, 이들의 만화가 소년 만화 팬인 필자를 사로잡은 부분과 기존의 소년 만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부분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 왼쪽부터 <강철의 연금술사>, 아라카와 히로무 / 충사의 우루시바라 유키 / <신부 이야기>, 모리 카오루
이 과정에서 남녀의 성차, 특히 관습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차라는 요소가 글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만화 소개하자고 꺼내 들기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요소지만, 피곤하다고 덮어두기에는 흥미로운 지점이 너무나 많다. 혹여 글에서 문제시되는 부분이 나타난다면 지적은 언제나 환영이다. 독자와의 소통은 글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목표기 때문이다.
소년 만화 뒤의 남성 작가와 순정 만화 뒤의 여성 작가 만화를 포함한 예술 작품을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나는 작품을 만든 작가를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을 즐긴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작품 너머의 작가와의 대화라고 문학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 않았는가, 이점만큼은 교과서가 옳았다. 작가가 작품에 담고자 의도한 것은 물론, 의식하지 못한 작가의 특성들도 작품에 녹아든다. 개별 작품들을 따로 보았을 때는 흐릿하게 보였던 특성들도 모아 놓으면 선명해짐은 물론, 시기에 따라 변화하는 흐름까지 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작품 자체를 감상하는 재미에 더해, 작품 이면에서 작가가 추구하는 것, 말하는 것의 내용과 표현 방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게 되는 아주 흥미로운 감상법이다.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특성은, 작가 개인의 고유한 개성뿐만 아니라 작가가 속한 문화, 정확히는 작가에게 녹아든 문화를 포함한다. 작품을 창작하는 이는 자신이 이해한 세상의 논리를 바탕으로 그것에 순응하거나, 깨뜨리거나 하며 작품을 제작한다. 작가의 성차에 따라 만화에서 드러나는 특성들도 그러하다. 그 중 일부는 신체적인 요건에 의한 것일 것이나, 그 이상으로 많은 부분이 작가를 둘러싼 문화 맥락 속에서 고정된 남·여 이미지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한국의 만화 독자에게 가장 친숙할 일본의 주류 만화계는 작가의 성별에 대한 사회적 관습이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주로 남성이 그리고 남성이 감상하는 ‘소년 만화’와 주로 여성이 그리고 여성이 감상하는 ‘소녀·순정 만화’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성별에 따라 작품의 장르가 바뀌어 버린다. 물론 할리우드도 대형 액션 영화는 남성감독이 독점한다는 비판을 듣곤 하지만, 여성 감독의 영화와 남성 감독의 영화가 팬 층을 구분할 만큼의 극명한 차이를 보이진 않는다.
소년만화의 순정만화의 일반적인 특징들을 나열해보자. 소년만화는 잠재능력을 가진 주인공(많은 경우 소년)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동료들을 모으고 자신 역시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자체에 방점이 찍힌다. 비교적 현실적인 경쟁을 하는 스포츠물이든 초능력을 사용하며 전투를 하는 이능력배틀물이든 이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 업계 논리가 끼어든다. 만화가 연재되는 잡지의 편집부는 인기 있는 만화의 연재가 지속되도록 유도하고, 작가 역시 궤도에 오른 작품을 통해 안정적 수입을 얻고자 한다.
△ 왼쪽부터 <블리치>, 쿠보 타이토 <드래곤볼>, 토리야마 아키라
만화가 장기 연재 될수록 주인공 점차 강해지고 동료까지 얻은 주인공이 계속해서 위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점차 강한 악역이 순서대로 등장해야 한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전개를 해명하기 위해서인지, 소년만화는 점차 ‘세계관 설정’이 중요해졌다. 결과적으로 재미있는 소년만화를 위해서는 재밌는 액션 장면을 그릴 수 있는 인체와 공간 묘사 능력과, 그 액션 장면이 지속되도록 하는 배경설정을 갖춰야 한다.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액션이나, 작가가 주체하지 못하는 등장인물간의 파워 밸런스 붕괴는 좋은 소년만화가 되기 위해 반드시 피해야할 함정들이다.
반면, 순정만화라 불리는 장르는 대체로 등장인물간의 감정묘사가 극을 이끄는 핵심이 된다. 인물 중심의 에피소드 위주로 작품이 진행되다보니,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센스’는 순정만화 분야에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 캐릭터의 매력이 극을 이끄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적지 않은 소년만화가 캐릭터의 내면은 얇디얇지만, 순정만화의 경우 얇디얇은 캐릭터가 주요 인물이 될 수는 없다. 순정만화 역시 장기연재를 위한 수순에 들어가면 작품이 꼬이기 시작한다. 불치병, 이민 등 극단적인 사례가 등장하거나, 주요 인물들 사이에 갈등을 만들어줄 새로운 등장인물이나 설정이 추가된다. 도입은 재밌었으나 후반부는 아침드라마처럼 되는 만화도 적지 않다. 극의 진행에 따라 등장인물간의 감정선이 미묘하게 이어지며, 이를 관객에게 적절히 전달해야, 좋은 순정만화가 탄생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특징들은 작가들의 성별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작품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볼 수 있는 지점, 묘사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별에 따른 일반적 차이가 작가 개개인의 차이보다 클 수는 없다. 현재와 같은 장르 구분은 부자연스럽다. 일본 만화계의 성별에 따른 장르 구분의 직접적인 원인은 남성작가들이 그리는 소년만화를 남성이 보고, 여성작가들이 그리는 순정만화를 여성이 본다는 업계 논리다. 이러한 형식적인 구분은 작가의 성별에 따른 능력에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고 강화시킨다.
각 만화의 독자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성별의 작가가 그린 특정 장르의 만화를 접할 확률이 매우 높고, 각 장르는 장르에 특화된 그림체와 문법을 내재화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작가로서 데뷔 했을 때, 소년만화를 그린다면 액션을 그리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인체 뎃셍과 싸움이 일어나는 공간에 대한 그림 실력에 더욱 신경 쓰게 될 것이다. 순정만화를 그린다면 인물의 감정을 직접적인 대화 외에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해 섬세한 연출에 능해질 것이다. 이는 작가 개인이나 팬들의 욕구일 뿐만 아니라, 장르별로 분리되어 있는 연재 잡지 편집팀의 요구이기도 하다. 작가의 성별별로 요구되는 장르에서 요구되는 기술을 익히는 길은 많은 이가 당연한 수순으로 생각하고 있다.
△ 왼쪽부터 <카드캡터 사쿠라>, CLAMP / <세일러문>, 타케우치 나오코
다행히도, 여성작가의 경우 이러한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 역시 업계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다. 만화잡지 『점프』로 대표되는 소년만화들의 경우 애니메이션화 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띠고 있어 단순히 만화 연재로만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소녀만화는 그들을 벤치마킹 하고 있다. 소년만화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 구조를 띈 <세일러문>, <카드캡터 사쿠라> 등 마법소녀만화는 과거부터 인기애니메이션 대열에 있었으니 여성작가들이 이 소년만화의 장점을 흡수하는 것은 업계논리로도 자연스럽다. 일찍이 창작집단 CLAMP가 이러한 틈새를 파고들어 성공을 거둔 선례가 있지 않은가.
이번 연재에서는 이들과는 조금 다른 여성작가들을 소개할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순정만화 작가가 아니고, 소년만화처럼 공식화 되어가는 변신소녀류를 그리는 작가도 아니다. 각자 자신의 색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작품세계를 확장시켜 나가기에 그들의 작품을 즐길 때 성별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여성작가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작품에 나타난다. 소년만화의 정석과 같은 작품을 만드는 아라카와 히로무는 남성 작가들이 소년만화를 그릴 때 흔히 범하는 평면적인 캐릭터(특히 여성 캐릭터)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가장 뛰어난 소년만화를 그리는 작가 중 한 명이 된다. 우루시바라 유키는 소년만화나 소녀만화의 틀로나눌수 없는 독특한 세계관과 만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작가의 세계는 남성독자도 매혹시킬만큼 매력적이다. 마지막으로 모리 카오루는 빅토리아 시기 메이드 문화와 중앙아시아 문화라는 작가 개인의 관심사에서 출발해 세계를 재현하고 드라마를 이어간다. 여성이 중심인 멜로 시대극이라는 가장 여성적일 것 같은 그 세계에 액션과 디테일한 세계묘사라는 소년만화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 요소들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내공으로 그려낸다. 이 요소들은 아주 큰 매력이다. 이제 이들을 만나보자. 그 첫 번째는 아라카와 히로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