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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속에서 만나는 죽음 (1)

뒤돌아보면 유독 부고 소식이 많은 한 해였다. 지도자나 유명인사였던 공인들의 죽음과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알려진 서민들의 부고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자비한 ‘공평함’을 떠올림으로써 실감하게 되는 필멸성의 슬픔이 몸서리 처진다.

2009-10-09 김혜신

뒤돌아보면 유독 부고 소식이 많은 한 해였다. 지도자나 유명인사였던 공인들의 죽음과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알려진 서민들의 부고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무자비한 ‘공평함’을 떠올림으로써 실감하게 되는 필멸성의 슬픔이 몸서리 처진다. 그러나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듯이, 죽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삶을 성찰하고 그 소중함을 가슴으로 깨우치게 한다. 따라서 죽음을 직면하는 과정은 괴롭고 쓰라리지만, 현명하고 가치 있기도 하다. 그 성찰의 과정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천자만태의 죽음의 형상들: [샌드맨]


샌드맨

의인화로 형상화된 7개의 영원들 중에서 꿈의 이야기를 동서고금의 신화와 전설을 망라하며 방대하고도 세밀하게 그려낸 [샌드맨] 시리즈에서 ‘죽음’은 중요한 테마이다. 우선 주인공 꿈의 가장 절친한 형제인 누나 죽음, 즉 의인화된 죽음이 있다. 전통적으로 음산하고 남성적인 저승사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누이 죽음은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매력적인 고스풍 여성이다. 그녀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기에 가장 강력하고도 자유로운 존재다. 친근함을 느끼게 하는 성격은 어쩌면 죽음이 그만큼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카오스로써의 죽음이 있다. 기실 자연상태는 인과관계나 약육강식의 질서보다는 카오스가 지배하며 이 카오스를 그대로 포용한 [샌드맨]의 세계에서는 어처구니 없고 때로는 부당해 보이는, 하지만 자연 본연의 속성 그대로 혼란스러운 사건사고와 죽음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죽음이 삶에 의미를 주듯이, 혼란은 질서와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야기(꿈의 영역인)가 의미를 가지게 한다. 마지막으로 파괴와 변화로써의 죽음이 있다. 죽음은 끝을 상징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하고, 장례식이 끝나도 삶은 계속되며, 무언가가 죽어야만 변하는 것들도 있기에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이렇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죽음의 측면들은 언뜻 두렵고 혼란스럽기만 한 죽음을 고찰하는 탐색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준다.



어느 죽음의 기록: [개를 기르다]

개를 기르다


[개를 기르다]는 제목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어가는 개를 보내는 과정을 그린 실화적 기록이다. 주인공 부부는 아이도 없이 탐이라는 개를 14년 동안 길러왔다. 늙은 탐은 다리에 힘을 잃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급기야 드러눕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 채 점점 쇠약해져 간다. 그러면서도 지켜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삶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가는 탐의 상태를 적고 점점 말라비틀어지는 몸을 스케치하며 죽음의 기록을 남기고 실제로 만화에 묘사된 것은 건강하던 탐과의 추억보다는 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실화를 다루고 있고 짧은 단편이기에, [개를 기르다]는 극적인 사건 없이 끝까지 담담하고 잔잔하게 탐의 죽음을 조명한다. 그만큼 마침내 다가온 죽음의 순간은 강렬하고 생생하게 가슴에 꽂힌다. “사람의 죽음도 개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는 작가의 독백은 똑 같이 생명을 부여 받은 존재로써 죽음 앞에 느끼는 겸허함과 생의 찬란함을 깨닫게 한다.


기억과 추모: [재미난 집]

재미난 집


같은 실화 바탕의 작품이라도 [개를 기르다]가 죽음의 기록이었다면 [재미난 집]은 죽음 그 이후의 회상과 기억의 과정을 그린다. 물론 화자의 아버지는 사고(혹은 자살)로 갑작스럽게 죽었기에 기록할 여지도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은 아버지를 기억하고 추모하며 동시에 필연적으로 그 딸인 작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가 된다. 아버지의 죽음의 아이러니는 생전의 직업이 장의사였다는 점 외에도 수없이 드러난다. 허름한 집을 완벽하게 리모델링하여 이웃들에게 과시하는 일면에는 어린 자식들을 거칠게 부리고, 이상적인 가정을 연출하는 데에 집착하는 반면 집안에서는 위압적인 가장이었고 또한 은밀한 동성애자였다. 한편 죽음의 풍경이 일상이었던 성장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를 향한 여정이 온갖 아이러니, 투박한 일상의 기억, 씁쓸한 유머와 문학적 코드로 가득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 여정은 죽은 사람과 작별하며 그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의식적 측면에서 일종의 장례식이기도 하다. 진정 만화로써 가능한 장례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태일이]


태일이

죽은 사람은 떠나고 장례식은 끝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좀더 발전적으로는 고인의 삶과 죽음과 업적에 비추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성찰이 뒤따르게 된다. 전태일은 그 죽음으로 인해 조명을 받게 된 인물이다. 그가 분신자살을 했을 때의 심정이 절망인지 희망인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공공장소에서 행해진 필사적인 의사표명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태일이]는 현명하게도 자칫 충격과 선정성에 치중될 수 있는 죽음 그 자체의 순간보다는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평범한 소년이자 인간으로써의 ‘태일이’를 그려냄으로써 그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어린 태일이는 어느 누구처럼 잘 먹고 잘 살고 싶고, 가난한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때로는 충돌적인 가출을 하기도 하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년으로 그려진다. 그 평범함 덕분에 조금 상냥했던 어느 노동자 청년이 가까운 타인의 고통부터 공감하고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키워가며 노동자 인권운동을 하게 되는 과정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진솔하고도 소박한 설득력은 이번에 소개된 작품 중 유일하게 아동용으로 그려졌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낮은 시선에 맞추어 ‘삶’에 주목한 시점은 죽음은 곧 삶과 상통하고 서로가 서로를 정의한다는 진실을 깨우쳐준다. 태일이의 죽음 후의 후일담에서는 어머니와 동료들이 그의 의지를 받들어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독자에게도 과거의 죽음을 통해 미래와 삶을 성찰하게끔 한다. 우리는 죽은 이를 통해 배우며 이로써 죽은 자는 죽되 죽지 않게 된다. 이것이 죽음으로써 필멸하는 인간이 죽음을 통해 불멸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