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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오픈마켓 지원작 #01 오연, <삼국유사 - 위만왕>

글로벌 오픈마켓 지원작 #01 오연, <삼국유사 - 위만왕>

2013-12-30 최승우
만화 콘텐츠 오픈마켓 활성화 지원 사업이라는 것이 있다. 2011년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시작해 2012년과 201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옮겨와 3년 째 지속 중인 지원사업으로, 미디어 환경과 소비방식(전자책 단말기와 타블렛 PC의 확산, 전자책 자체에 대한 수요 증가)의 변화에 맞춘 경쟁력 있는 만화 콘텐츠 개발과 사업화를 지원하는 것이라 한다. 사업화의 범위는 번역, 전자출판물로의 제작, 아이북스나 아마존 구글 플레이 등의 글로벌 오픈마켓에 유통하는 것 까지를 포함한다. 지난 3월 공고가 난 후 5월에 지원작이 발표되었으며 현재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해외 전자책 시장에서 판매 되기 시작했다. 열한 편, 한국작가들이 해외시장을 겨냥해 만든 만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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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 <삼국유사-위만왕>
 

INFO
 
한 남자의 복수극을 통해 보는 거대한 역사적 파워게임
 
<삼국유사-위만왕>은 결코 쉽지 않은 작품이다. 아니, 작가 스스로 말하듯 어려운 작품이다. 역사 해설을 듣는 듯한 텍스트의 분량, 감각적인 연출보다는 묵직한 정공법으로 밀어붙이는 스토리 전개 등. 독자 입장에서는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시중에 널린 얼기설기한 학습용 역사만화를 생각하고 손에 들었다가는,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녹다운되기 딱 알맞다.
 
물론 그만큼의 수고를 감당할 준비가 된 독자, 혹은 역사에 대한 탐구욕이 끓어 넘치는 독자라면, 이 작품은 적지 않은 지적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를 알고 나면 그 주변에 있는 다른 하나가 궁금해지고, 이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다보면 집요하게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이 없을 때면 역사 게임을 한다는 오연 작가는 “역사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역사 오타쿠’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삼국유사-위만왕>의 메인 캐릭터는 제목 그대로 위만조선의 창시자 위만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대까지도 여러 모로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인물이다. 작가는 그의 생애를 문화가 다른 집단 간의 갈등, 주류와 비주류를 결정짓기 위한 파워게임의 상징으로 바라본다. 말하자면 위만이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이 일종의 거대한 역사적 복수극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지점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학적 배경을 방대하게 펼쳐놓는다. 그러니 최소한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창이라도 띄워놓고 궁금증을 하나씩 해소해가며 본다면 이 작품은 훨씬 흥미로워질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오연 작가는 전통적인 수묵화 기법을 만화 작업에 고스란히 옮겨왔다. 섬세한 붓의 필치로 그려낸 인물의 표정은 한 번 보면 쉬이 잊히지 않는다. 단지 선이나 색채뿐만 아니라 화면의 구도까지도 동양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특히 작가가 강렬한 보색 대비로 재현해낸 복식은 기존 한복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날려버릴 만큼 강렬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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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02] 오연, <삼국유사 ? 위만왕> 중에서.
 
INTERVIEW
 
“힘들게 만들수록 합당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역사물”
 
그림체가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하고 독특하다. 작업과정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붓으로 한지에 천천히 그린다. 붓과 먹, 물감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화원들이 그리던 옛날 방식 그대로다. 먼저 붓에 먹을 묻히고, 파지破紙로 많은 양을 덜어낸다. 그 후 견본 종이에 한 번 그려서 먹을 조절한 다음에 그림을 그린다. 몇 번 칠하다가 붓이 마르면 다시 묻히고… 이런 과정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한다.
 

뒤늦게 역사학도가 될 만큼 오랫동안 역사물에 집중해온 작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사실 그림의 형식미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완성됐다. 그런데 수묵만화라는 방식으로 어떤 것을 그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역사를 좋아해서 시작한 건 맞지만, 어린 청년의 입장에서는 끝없이 넓고 깊은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역사공부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했고, 대학의 역사학과에도 들어갔다. 그러면서 기본적인 역사관이 생기게 된 것 같다. 지금도 일 끝나면 역사책 읽고, 역사게임하고, 답사나 박물관 유람을 지속적으로 다닌다. ‘역사 오타쿠’가 되어야 역사를 잘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독자가 아닌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는 역사물의 묘미가 있다면?
발로, 땀으로 힘들게 만들면 합당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역사만화다. 어떤 인물이나 시대를 그리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에 관련된 서적을 전부 찾아본다. 그 방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혹은 일부분만 나온 것이라도 전부 읽고, 전반적인 개념을 머릿속에 담아둔다. 그 다음 어떤 역사관에서 시작할지 고민하고, 현장 답사를 다니며 분위기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배경이 되는 현장에는 무조건 직접 가봐야 한다. 책에서는 절대 접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답사가 끝나면 세계관과 인물 등을 설정한다. 그 다음에는 이미지 형상화를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 과정을 다 언급하자면 수십 장이 넘어갈 거다. 완성된 만화에서 처음 구상했던 이미지가 나오면 기분이 좋다.

<삼국유사-위만왕>이 사람들이 쉽게 친숙해지기 어려운 작품인 건 부인하기 힘들 듯하다.
사실 굉장히 어렵다. 이 작품은 동아시아 역사의 기본개념인 농경민족과 북방초원유목민의 대결을 그린 것이다. 문화와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두 집단의 갈등이 결국에는 전쟁으로 표출된다. 그런 갈등의 과정을 세세하게 나타내는 한편, 당시의 인문학이나 시대적 비전, 역사적 철학의 개념도 담고 싶었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역사이야기, 역사철학서 같은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고조선에 대해 알려진 이미지가 없다. 기껏해야 털옷을 입고 ‘우가우가’ 하는 이미지가 대부분일 것이다. 동시대의 주나라, 춘추시대, 진나라를 생각해보라. 웅장한 마차와 갑옷, 제자백가들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 이런 문화적 패배주의로 인해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생산하지 못했고, 우리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 이미지를 미개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고대의 역사를 웅장하게 표현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위만왕은 후대에 논란도 많은 파란만장한 인물이다. 어떤 관점으로 그리고 싶었는가?
단군이야기의 곰과 호랑이 중에서 추방당한 호랑이 부족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역사를 통틀어보면 추방당한 자가 나중에 복수를 하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어 고려 시대 반역자의 후손인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고, 광해군에게 반역자로 몰려 죽은 자의 형제가 광해군을 죽인다. 위만은 호랑이가 상징하는 부족의 후예다. 그가 조선을 공격하는 복수극을 기본 틀로 삼고. 그 안에서 신화와 역사를 다루고 명분을 입히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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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03] <삼국유사 ? 위만왕> 캐릭터 설정 컷
 
이 작품은 해외 특정 시장을 겨냥한 공모에서 선정된 작품이다. 한국 역사가 콘텐츠로서 해외에서 눈길을 끌 만한 부분이 있다면?
다들 한국 역사가 있다는 것도 모를 거다. 서양과 수백 년간 교류한 일본이나 중국과는 비교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니 콘텐츠를 개발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꾸준히 하다보면 그들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전자책의 발달이 만화라는 매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15년간 극화, 교양만화, 학습만화, 웹툰, 동화책, 회화 등을 다양하게 그렸다. 결국 기본기가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남는 것 같다. 10년 전 출판사 기획과장으로 출판만화를 온라인 매체에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그때도 전자책이나 관련 기술은 이미 있었다. 전자책이 발달해도 만화책은 존재할 것이며,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전자책을 이용할 것이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다 같은 만화다.

어떻게 보면 전자책의 발달이 작가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스마트폰과 타블렛의 보급 추세가 관건이겠지만, 전자책 시장규모는 더 커질 것이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전자책 유통을 단순화하는 시도를 하면서, 작가도 수익을 좀 더 명확하게 분배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환경이라면 전자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다만 글로벌한 유통업체가 없다는 게 아쉽다. 미국에는 아마존이나 아이북스, 일본에는 코보 등이 있는데 우리는 아직 없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