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카오루를 소개하는 글을 쓰기를 꽤 오랜 기간 기다렸던 것 같다. 작가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작품 <엠마>는 필자가 처음으로 구입한 순정만화이기도 한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의 성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만든 작품이니 여러모로 나의 선입견을 깨기도 한 작품이다. 어쩌면 <엠마>가 없었다면 이번 연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재의 마지막 작가로 아껴 놓았던 모리 카오루 작가를 소개한다.
국내에 발행된 모리 카오루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신흥 젠트리 계층의 청년과 그 집에 고용된 메이드 사이의 운명적 사랑을 다룬 <엠마>, 메이드에 대한 작가의 취향을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한 단편집 <셜리>, 1900년경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여러 신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옴니버스식 만화 <신부이야기>, 그리고 기타 단편들과 일러스트들을 담은 <모리 카오루 습유집> 네 작품이다. 모두 소년만화와는 거리가 멀고, 순정만화라 칭하는 파트에 속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필자뿐만 아니라 함께 남고를 다니며 소년만화만을 즐기던 친구들까지 작가의 팬이 되었으니 모리 카오루의 위치는 다소간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 왼쪽부터 모리 카오루의 <셜리>, <엠마>, <신부 이야기>, <습유집> 한국판 표지 이미지
연재를 시작하면서 일본 만화 산업 구조의 특성과 그 구조의 영향을 받은 남녀 만화가의 고정된 역할을 소개한 바 있다. 그 이후로 그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여성 작가들을 소개했다. <강철의 연금술사>를 쓴 아라카와 히로무는 통해 소년만화 업계의 왕도를 따르면서도 남성 작가들이 놓치는 지점들을 보완하여 더 나은 소년만화를 만들어 냈다. <충사>의 우루시바라 유키는 업계의 남녀 스테레오 타입이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지점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 냈다. <엠마>의 모리 카오루는 여성 작가들과 여성 독자들의 영역인, 그래서 스테레오 타입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순정만화의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결을 가미함으로써 순정만화의 독자층을 확대하고 장르에 새로운 결을 추가했다.
<엠마>를 보기 전에도 순정만화를 본 적이 있다. 동네 대여점의 소년만화를 다 봐 버린 순간, 순정만화 칸의 만화들에도 손이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만화는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거부감이 들어 읽을 수 없었다. 그림체나 소재도 낯설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야기 전달 방식에 있었다. ‘왜 순정만화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 데 관심이 없는가?’, ‘왜 배경을 제대로 그리지 않는가?’, ‘배경을 그렸다 하더라도 왜 입체 공간으로써 활용하지 않는가?’, ‘공을 들이는 인물 작화 역시 카메라 워킹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캐릭터의 모습을 얼짱 각도로 보여주려 하는가?’, ‘이런 식으로 그림 연출이 이야기 전달에 도움이 되지 않다 보니 모든 것을 대사로만 설명하는 것은 너무 불합리 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 몇 권의 책을 본 후부터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함은 작품의 온전한 감상을 막는 진입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유리가면>이나 <오디션> 등 이런 불만을 감수하고라도 볼 만큼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나, 고전 취급받는 몇 작품만을 감상한 뒤 여성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간직한 채 순정만화 칸을 피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때 가졌던 의문 중 일부가 소년만화에 익숙해졌기에 한 반응임을 알지만, 여전히 일부 의문은 작가들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이유로 행한 태업의 결과임도 안다. 미국의 그래픽 노블들도 일본 만화와 비교한다면 말풍선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달하고 그림은 삽화 역할 이상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그래픽 노블을 보면 입체적 카메라 워킹 등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소설과 같은 기존의 요소와 적절히 융화시킨 작품들을 보게 된다. 글과 그림의 분리를 의도한 작업이 아니라면, 이렇게 작품 내 카메라 워킹을 적절히 사용하여 마치 영화를 보듯 감상 가능하게 만든 작품을 그렇지 않은 작품보다 높게 평가하게 된다. 뻔히 보이는 단점이 존재하고, 그 단점을 개선할 명확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개선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세밀하고 꼼꼼하며 입체적인 모리 카오루의 세계 <엠마>와 <신부이야기>는 앞서 제시한 어떤 의문도 들지 않는다. 자칭타칭 메이드, 공예품 마니아인 작가는 단순히 해당 소재를 선호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해당 소재가 존재했던 당대 시대상 자체를 옮겨 놓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낸다. 단행본마다 붙은 후기의 일부는 항상 자료 수집에 대한 이야기일 정도다. 그렇게 그가 지면에 재현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이나 20세기를 맞이한 중앙아시아의 모습은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경험을 안겨 준다. 이를 위해 작가는 등장인물들만큼이나 배경을 꼼꼼히 그린다. 마치 애니메이션 배경 설정집과 같이 세밀한 배경 작화를 그의 만화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세밀함은 수많은 패턴 장식으로 이뤄진 중앙아시아 의상이 드러나는 <신부이야기>에서 기가 질릴 정도가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켜 인물들이 그 세밀한 그림 속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니 그냥 잘 그린 그림이라 부를 수밖에. 그리고 이 잘 그린 그림들이 만들어내는 당대 세계관은 만화의 중심에 있는 연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고 힘 있게 만들어 준다. 무의미하거나 작위적인 에피소드 없이 해당 시대, 그 지역의 문화를 소개하는 에피소드들에 주인공들이 살짝 끼어들면 이야기 진행에 흥미를 더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의 한 장면
일본 만화계에서 메이드는 무슨 기본 옵션처럼 되어 실제 역사 속, 혹은 오늘날 현실 속 메이드와 동떨어진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와 달리 <엠마>에서는 (작가에 의해 취사선택되긴 했지만) 빅토리아 시대 메이드를 만날 수 있다. 엄한 플라톤을 끌고 와 말하면 일반적인 일본 문화에서 만날 수 있는 메이드가 현실의 모방의 모방인데 반해 모리 카오루의 만화에서 나오는 메이드는 현실의 모방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예술 장르 자체를 다루는 메타적 성격이 없는 이상 대체로 현실의 모방이 한 다리 건넌 모방의 모방보다 감상자를 즐겁게 한다.
입체적인 공간 활용이란 면에서도 남성작가들의 소년만화 중 가장 뛰어난 수준의 작가들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카메라 워킹이 눈에 띈다. <엠마> 때부터 일반적으로 느끼기 힘들 정도의 공간감을 배경에 그려 넣던 모리 카오루 작가는 <신부 이야기>를 그리면서 과시적일 정도의 카메라 워킹을 보여 준다. 스토리와 상관이 없는 토끼 사냥 장면 등은 대사 하나 없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역동적인 그림만으로 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 모리 카오루, <신부 이야기>의 한 장면
이 장면을 감상할 때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던 장면은 <슬램덩크> 산왕전의 대사 없이 이어진 페이지들과 <나루토>의 사스케와 나루토의 첫 결전에서 대사 없이 이어진 페이지들이었다. 일본 소년만화의 정점에 이른 장면들이 순정만화 속 보너스 페이지처럼 쓱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묘사는 양몰이 장면에서도 빛을 발하더니. 중앙아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의 전투와, 이를 조장하는 러시아의 이야기라는 <신부이야기>의 한 축은 작가의 액션 연출 실력에 온전히 기대어 진행된다. 아마 주인공 일행이 마주하게 될 위기와 연관될, 어쩌면 비극으로 연결될 이 서브플롯을 작가는 대사로 처리하지 않고 직접 감상자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가산점을 준다. 그의 만화에서 정보 전달 방식은 소년만화의 방식, 아니 영화 등 시각 예술의 연출방식을 따르고 있다. 앞서 말한 이야기 전달 방식에서 만들어지는 진입장벽 하나가 사라진다. 장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장점에 기존에 없던 장점까지 더해지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연재의 전제는 여는 글에서 밝혔듯, 일본 주류 만화계에서 작가의 성별이 작품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했다. 남성 작가가 주로 그리는 소년만화를 봐왔던 수요자인 필자의 선입견을 깨버린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기존 만화계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그 너머의 가능성을 살펴봤다. 물론 세 작가의 작품이 독자를 사로잡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기에 이러한 논의가 가능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사실 요리만화, 운동만화, 음악만화 등 만화 같은 이야기의 전형보다도 실제 존재하는 해당 소재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된 만화는 남성, 여성 만화가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종종 보여줘 왔다.(물론 스포츠만화나 요리만화의 다수는 점차 강한 상대와의 배틀이 이어지는 소년만화의 룰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도 많다.) 진짜 문제는 만화업계의 주류 장르인 소년만화, 순정만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만약 일본만화계에서 나타나는 성별 스테레오 타입들이 일본 사회에서 성장한 남성과 여성이 자연스럽게 띠게 체득하게 되는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들 작가를 사회적 한계를 넘어선 예외적 개인이라 할 수 있다. 소년 만화 팬들의 지지를 받는 여성 순정만화 작가라는 점은 확실히 작가만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오늘날 순정만화는 어려서 만화방에서 거부감을 느꼈던 그때와 달리 연출 방식에 있어 많은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지금 변화가 더욱 필요한 건 소년 만화계일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만화계 내부에서 새로운 지점을 보인 <강철의 연금술사>나, 소년만화 팬들도 즐기고 있는 순정만화인 <엠마>, <신부이야기> 같은 만화는 더욱 가치 있다. 성공한 예시가 있으면 사람들은 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얄팍한 만화 지식으로 글을 쓴 만큼 이번 연재에서 놓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리 카오루 이전에 이야기의 배경을 치밀하게 구축하고 섬세한 그림과 유려한 카메라 워킹으로 작품을 완성한 여성 순정만화가 있거나, 아라카와 히로무 이전에 입체적인 여성캐릭터가 활약하는 소년만화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란다. 읽고,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런 이들의 그린 뛰어난 작품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해야 그러한 긍정적 변화가 더욱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 모리 카오루, <엠마>의 일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