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물’이라는 단어는 사실 ‘순정만화’만큼이나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다. 만화독자가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보편적인 용어도 아닌데다, 만화 장르적으로도 정착된 것 또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가령, ‘명랑만화’라는 단어가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등장한 일군의 만화를 가리키는 의미로 최적화된 것처럼, ‘학원물’이라는 용어 역시 학원 배경의 액션물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1990년대를 시대적인 토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유의미해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언급되는 학원물은 통상 학원‘폭력’물과 직결된다.
그래서일까. 많은 이들에게 학원물은 곧 학원폭력물로 이해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학원물에 대한 시대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시작부터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학원폭력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1990년대 이전 시기에 있어서 학원폭력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르로서 ‘학원물’에 대한 규정은 각 시대에 따라 혹은 작품이 발표된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뒤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6.25전쟁 이후 1970년대에 이르는 시간동안에서 학원물에 대한 이해는 명랑만화의 범주 안에서 정의되어질 필요가 있다. 즉, 그 시절에 있어서 학원물의 주류는 전쟁 이후 힘든 경제적 상황 아래 역경을 딛고 희망을 찾아가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1990년대 학원물의 전형은 개성 강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선배, 교사 등 기존 질서와 부딪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각 시대에 등장한 대표적인 작품들을 통해 학원만화의 흐름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학원물의 특징을 정리해볼 것이다.
우리나라에 학원물의 출발은 통상 <꺼꾸리군 장다리군>으로 꼽는다. 이는 ‘고바우’로 더욱 유명한 김성환이 6.25전쟁 중이던 1950년대 초에 청소년잡지 <학원>를 통해 연재했던 작품이다. 일단 작품이 발표된 매체 명에서부터 학원물임을 짐작하게 만드는데, 연재 후 단행본으로도 묶어지면서 당시 큰 인기를 모았다. 특히 연재 당시 작품의 인기에 대해 김성환은 에세이집 <고바우와 함께 산 半生>(1978년, 열화당, 7쪽)에서 “당시의 내 만화로는 뭐니 뭐니 해도 <학원> 잡지에 연재된 <꺼꾸리군 장다리군>이 압도적인 다수의 독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면서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젊은 기자들이나 텁수룩한 C 화백, 시인 Y도 즐겨 읽노라는 얘기였다. <학원> 잡지도 전성시대가 되어 10만 부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고 회고한 바 있다.
△ 좌측부터 김성환의 <꺼꾸리군 장다리군>, 석래명 감독의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이처럼 인기가 높았던 <꺼꾸리군 장다리군>은 1977년에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석래명 감독)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옮겨지면서 대중문화 전체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친다. 원작이 발표된 지 20여년이 지나 영화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만큼 작품의 대중적인 파급력이 상당했음을 반영해보이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1950년대로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청소년문화를 규정짓는 대표적인 키워드, 즉 ‘얄개’와도 이어진다. ‘얄개’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는 ‘야살스러운 짓을 하는 아이’로 풀이되는데, 1950년대 등장한 조흔파의 소설 <얄개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특히, 1970년대 스크린에서는 이른바 ‘얄개’를 테마로 한 영화가 여러 편 등장하여 세간의 화제를 불러왔고, <고교 꺼꾸리군 장다리군> 역시 이른바 얄개시리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대 학원명랑만화 역시 전체 대중문화와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겠다.
김성환에 이어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박기준, 방영진, 그리고 이상무 등을 통해 학원명랑만화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박기준의 경우 자신의 최고 인기작인 <두통이> 시리즈를 비롯해 고교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올림픽 소년>, <파이팅 오징어> 등을 선보였다. 이들 작품에서 학교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고, 그 속에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 좌측부터 박기준의 <두통이 만세>, <올림픽 소년>, <파이팅 오징어>
방영진은 1960년대 초 <약동이와 영팔이>를 통해 교복시대의 학원가 모습을 담아냈다. 1, 2부 총 40권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는 약동이, 영팔이, 뚱뚱이, 홀쭉이 등 네 명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영주는 <1950~1969: 다시 보는 우리만화>(부천만화정보센터, 2001년, 32쪽)에서 이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해 “다닥다닥 붙은 집들과 좁은 골목길, 공동 수도와 공동 화장실 등 1960년대 달동네 판자촌의 풍경이 정겹고, 그 속에서 알뜰살뜰 살아가는 네 명의 모습이 대견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설명한다. 즉, 이처럼 작품이 확보한 현실성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1970년대까지 널리 읽히게 된다.
△ 방영진 글, 엄국진 그림의 <약동이와 영팔이(상)>
이상무 역시 <노미호와 주리혜>를 발표하며 학원물의 초석을 다졌다. 이 작품은 원래 박기준이 1965년에 잡지 <여학생>에 선보였는데, 그것을 이상무가 이어받아 1966년부터 연재하게 된 것이다. 남녀 고등학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아내면서 청소년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10년 넘게 장기연재를 이어갔다. 특히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청소년들의 이성교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많은 또래 독자들에게 대리만족의 기쁨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 손상익은 <한국만화사 산책>(살림, 2005년, 47쪽)에서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아서 <노미호와 주리혜>의 교제는 소년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평가한다.
△ 이상무의 캐릭터 <노미혜와 주리혜>, 1966년.
이처럼 초창기 학원물의 특징은 전반적으로 명랑만화의 틀 안에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이후 한국만화의 가장 대표적인 장르라 할 수 있는 명랑만화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꺼벙이>나 <도깨비감투>처럼 주로 어린이 연령에 최적화된 작품으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명랑만화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 순박한 웃음에 있고, 그러한 웃음이 가난하고 힘겨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로 자리 잡았다면, 그것은 단지 어린이 연령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 보편적인 정서로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는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학원만화 속에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1982년과 1983년에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여가시간 활용을 스포츠 관람에 소비하는 국민들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것은 곧 1980년대 대중문화에서 스포츠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잇따라 개최하면서 스포츠는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일간스포츠>가 창간되었던 1969년 이후 26년 만인 1985년에 <스포츠서울>이 등장하면서 미디어 측면에서도 스포츠 분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들 스포츠일간지에서 만화는 독자를 사로잡는 중요한 콘텐츠로 자리 잡게 되니, 만화와 스포츠 또한 불가분의 관계를 맞이한다.
무엇보다 1980년대에 있어서 스포츠가 대중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모습은 당시 발표된 만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에 인기가 높았던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포츠를 소재로 다루고 있었고, 그러한 인기작 가운데 또 상당수가 학생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학원스포츠의 면면들을 담아냈던 것이다. 바꾸어 얘기하면, 1980년대 학원만화는 스포츠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가져오면서 일군의 학원스포츠물을 형성하게 된 셈이다. 여기에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상무의 <아홉 개의 빨간 모자>와 <달려라! 꼴찌>, 이현세의 <고교 외인부대>와 <떠돌이 까치> 그리고 허영만의 <태풍 스트라이크>와 <태풍의 다이아몬드>를 꼽을 수 있다.
△ 좌측부터 이상무의 <달려라 꼴찌>, 이현세의 <떠돌이 까치>, 허영만의 <태풍의 다이아몬드>
1980년대 초, 어린이교양지 <어깨동무>에 발표되었던 <아홉 개의 빨간 모자>는 부모 없는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1983년부터 <소년중앙>에 수년간 연재되었던 <달려라 꼴찌>는 비극적인 가정사를 지닌 주인공이 불행을 딛고 일어나 자신이 속한 고교 야구부를 우승으로 이끄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떠돌이 까치> 역시 1980년대 초에 <어깨동무>에 연재되었는데, 어머니를 여의고 가족과도 헤어진 주인공이 야구를 통해 희망과 자신감을 얻는 내용을 그려나간다. 한편, 1983년부터 <보물섬>에 연재되었던 <고교 외인부대>는 학교에서 문제아들을 모아 야구부를 만들어 주인공을 중심으로 하나의 팀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인내심과 협동심 등 학원스포츠가 지니는 가치를 일정 부분 담아낸다.
이미 1970년대 후반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통해 학원스포츠만화의 길을 열었던 허영만은 1980년대에도 학교가 주요 배경이 되는 여러 편의 스포츠극화를 선보인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태풍 스트라이크>와 <태풍의 다이아몬드>는 각각 <어깨동무>와 <보물섬>에서 연재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태풍 스트라이크>는 부잣집 아들이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하는데, 두 인물이 힘을 합쳐 야구부를 우승으로 이끄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 <태풍의 다이아몬드>는 고교야구를 소재로 하여 가족의 갈등과 주인공의 성장을 담아냈다.
이와 같은 1980년대 학원스포츠만화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대체로 주인공은 가난하고 힘겨운 환경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경을 뚫고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스포츠는 주인공을 단련시키는 수단이 되는 동시에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겨나갈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학원은 곧 그러한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도장(道場)이었던 셈이다.
1990년대를 정의내릴 수 있는 대표적인 키워드를 꼽으라고 한다면, ‘X세대’가 빠질 수 없다. 이는 ‘1970년대에 태어나 성장과정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경험하였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세대’를 묶어서 지칭하는 용어가 될 것이다.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 혹은 듀스 등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음악 그리고 새로운 패션과 어우러져 전체 대중문화를 가늠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X세대’에 담긴 시대적인 의미에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함께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녹아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학원물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되는 ‘학원폭력물’의 광범위한 인기 역시 이러한 동시대 문화적 토대 속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가령, 학교라는 공간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체제를 확고히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특히, 우리나라 교육의 실질적인 목표가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데 있다고 본다면, 그것을 위해 시험과 성적으로 학생들을 서열화 시키는 것이 학교의 당대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이데아’에서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꺼먼 교실”이라고 노래한 것처럼 학교는 보기에 따라서 학생들에게 폭압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을 만큼 냉혹한 곳이기도 했다. 일련의 학원폭력물에는 그처럼 현실에 짓눌린 공간을 배경으로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거침없이 주먹을 날리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이명진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박산하의 <진짜 사나이>, 임재원의 <짱>, 조운학의 <니나 잘해> 등을 꼽을 수 있다.
1992년 5월 <소년 챔프>에 모습을 드러낸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경우, 특히 작가가 연재 당시 고교생 신분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요컨대, 과거에는 만화가로의 진입이 기성 작가의 문하에서 일정한 시간동안 수련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헌데, 이명진은 그와 같이 일종의 고착화된 만화계 시스템을 깨뜨리는 신세대 작가였고, 그 작품 또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학원물이라는 사실은 여러 모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특징과 관련하여 황민호는 <내 인생의 만화책>(가람기획, 2009년, 317쪽)에서 특히 “독자들과의 완벽한 공감대”가 생기는 이유에 대해 “낯익은 학교의 풍경들과 교실 분위기,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 이성에 대한 감정,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 등등 또래의 독자들이 당면한 문제들이나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갖가지 이슈들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에서 고스란히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 좌측부터 이명진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것 같은 저녁>, 박산하의 <진짜사나이>, 임재원의 <짱>, 조운학의 <니나잘해!>
한편, 1992년 11월부터 <아이큐점프>에 연재된 <진짜 사나이> 역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다. 주인공 제갈길에게 부여된 반항적인 이미지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심과 여자친구를 향한 일편단심이 더해져 당시 많은 청소년 독자들에게 일종의 ‘롤모델’ 역할까지 부여됐다. 그런 만큼 이후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고, 동시에 장르로서 ‘학원물’의 산파 역할까지 담당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작품이 보여주는 학원폭력의 의미에 대해 박석환은 <코믹스 만화의 세계>(살림, 2005년, 36쪽)에서 “학교 안에는 선후배, 학생과 교사, 교사와 교장, 학부모회와 그 밖의 구성원 등 철저한 권력관계가 설정되어 있다.”고 그 원인을 지적하면서 “제갈길의 싸움은 강자가 세를 불려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의식 있는 개인이 펼쳐가는 올바른 투쟁의 방식이다.”고 설명한다. 즉, 왕따나 일진 등과 같이 현실에서 문제시되는 비윤리적인 폭력의 성격이 아니며, 오히려 억압적인 제도에 의해 구축된 더 큰 폭력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방어적 수단임을 강조한다.
<짱>은 1996년에 연재를 시작해 2014년에 마무리됨으로써 세대를 아우르는 가장 대표적인 학원물로 자리 잡았다. ‘누적 단행본 수 74권, 연재기간 18년’이라는 수치만으로도 그 명성을 쉽게 확인시켜준다. 대한민국 인천을 주요 무대로 삼고 있으며, 주인공 현상태를 비롯해 여러 고교생이 등장해서 펼치게 되는 세력다툼이 이야기의 뼈대가 되고 있다. 특히 작품의 높은 인기는 여러 아류작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연재 당시 한 일간지를 통해 “이미 <슈퍼짱>, <돌아온 슈퍼 짱>, <챔프짱>, <돌아온 챔프짱>, <난 짱이다>, <럭키 짱>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별별 짱이 다 나오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만화가 이란 이름을 달고 슬쩍 나타나기도 했다.”(<경향신문> 1997년 10월 30일 자 기사 ‘인기 급상승에 아류 <짱> 판쳐’ 중에서)고 기사화되기도 했으니, 이 작품이 지닌 대중적인 파급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1995년에 창간된 <찬스>의 창간호에서부터 연재된 <니나 잘해> 역시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0년간 장기 연재되었다. 단행본 권수 또한 50권으로서 그 분량만으로도 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특히 <니나 잘해>는 아직 만화에 대한 팬카페 문화가 널리 퍼져있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 당시 온라인에서 팬카페(http://cafe.daum.net/nina)까지 만들어지면서 이른바 ‘팬덤현상’까지 불러왔다. 2000년에는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청소년들의 진지한 삶의 모습을 다루고 있으며,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만화”(<한국일보> 2000년 7월 13일자 기사 ‘제4회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작 2편’ 중에서)라는 당시 수상 선정이 작품의 성격을 잘 반영해 보인다. 즉, 허구의 세계를 그린 학원물이지만 작품 속에 담겨진 내용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990년대가 보여주는 학원폭력만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가장 질서를 중시하는 공간에서 가장 원초적으로 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바르고 좋은 것을 가르치는 공간이 아니라 높은 점수를 받도록 경쟁심만 유도하는 곳으로 변모한 학교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일수도 있겠다. 그런 이유로 1990년대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학원물에서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서가 있다. 즉, 반항적인 이미지를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되 그들이 휘두르는 주먹에는 대체로 정의감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처럼 1990년대 학원만화가 보여준 정당성에 대한 당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은 이들 작품마다 ‘밀리언셀러’라는 타이틀을 붙게 만드는 것으로 검증할 수 있겠다.
사교육을 통한 선행학습이 보편화되어버린 현실에서 학교의 의미가 과거와 사뭇 달라진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만일 학교가 학업을 위한 공간도, 그렇다고 친구를 사귀거나 인격수양을 위한 도장의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과연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여전히 대학이라는 목표를 쫓아가고 있지만, 과거보다는 많은 이탈자들이 생겨난 듯하다. 가령, 조기유학으로 해외로 나가거나 자퇴 후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진학하기도 한다. 혹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길에 매진하는 사례도 있으니, 가수 혹은 연예인을 지망하는 10대들이 아예 자퇴하고 음악이나 연기활동에 집중하는 예가 그러한 경우가 될 것이다. 또한,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정해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한 청소년들은 졸업 후 대학이 아닌 사회로 진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곧 학력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흐름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만큼 2000년대 이후의 만화, 특히 최근 웹툰에서 등장하는 학교 속에는 더 이상 학업에만 목매는 학생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즉, 과거보다 개성 강한 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그만큼 다채로운 소재를 학원 속에서 그려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기안84의 <패션왕>, 김선우의 <예전고>, 강풀의 <타이밍> 등을 꼽을 수 있다.
△ 좌측부터 기안84의 <패션왕>, 김선우의 <예전고>, 강풀의 <타이밍>
<패션왕>의 이야기는 평범한 주인공이 등장해 자신이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외모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과정에서 우리 시대 고등학생들의 ‘간지’를 보여주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개성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교복도 패션의 주요한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학원은 배움의 장이 아닌 ‘핏’의 경연장으로 변모한다.
이에 반해 <예전고>에서는 전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아이돌이 어느 날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예체능계열 전문고등학교, 즉 ‘예전고’로 전학을 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전학 온 첫날 그녀는 전교생들에게 최고 강한 남자와 사귈 것이라는 얘기를 공표함으로써 학원은 순식간에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무한 격투의 공간으로 바뀐다.
<타이밍>에서도 학원은 평범한 교육적 공간이 아니다.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그곳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영원과 순간이 조우한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학생, 예지몽을 꾸는 교사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여러 초능력자들과 더불어 시간게임을 펼쳐 보임으로써 학교를 스릴러 장르를 위한 최적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학원의 모습이 다양해졌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는 더 있다. <연애혁명>나 <무궁무진>처럼 밀고 당기는 로맨스를 꿈꾸는 곳이기도 하며, 혹은 <소녀더와일즈>나 <오렌지 마말레이드>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액션과 판타지가 뒤섞이는 공간일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성으로 인해 1990년대가 구축했던 장르로서 학원물의 위치가 오히려 희석되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물론 <일진의 크기>나 <외모지상주의> 혹은 <최강전설 강해효>의 경우처럼 학원은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정의감은 희석되고 약육강식의 논리는 더욱 심화된 듯 보인다. 요컨대 작금에 있어 ‘학원물’은 사실 내용이나 의미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소재와 배경으로서 존재하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명랑만화’가 이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된 것처럼 ‘학원물’을 대체할 또 다른 무언가가 등장할 시점의 전조일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