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만화’, ‘여름’은 부천국제만화축제(이하 BICOF)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조건반사적으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여름이라면 BICOF가 떠오를 것이다.
BICOF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 여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이 끝난 뒤, 날씨가 선선해진 가을, 지하철 1호선 송내역 인근 복사골문화센터에서 개최되던 만화축제 재방송의 이미지였다. SICAF가 접근성의 장점과 대규모 전시장에서 열리는 것에 비해, 부천의 복사골문화센터는 여러 모로 옹색해 보였다. BICOF는 만화계의 원로부터 신인, 상업과 인디 작가 모두를 아우르며 작가의 네트워크 강화로 내실을 다졌다. 세간에 부천은 ‘부천국제만화가축제’를 개최한다고 불릴 정도로 작가에 대한 대우가 극진했다. 그렇게 BICOF는 자신만의 색으로 축제를 발전시켜 왔다.
2009년 BICOF의 주최가 부천만화정보센터에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하 진흥원)으로 변화하면서 양상은 빠르게 달라졌다. 2009년 진흥원 개원에 맞춰 축제를 개최하고, 2010년 세계만화가대회를 통해 한국만화의 중심이 부천임을 선포했다. 2011년부터 BICOF의 개최일은 8월 15일 광복절 주간으로 정해 국제행사로서 갖춰야할 행사시기의 정례화를 이루었다. BICOF는 2009년 만화진흥원 체제 이후 5년 동안 규모와 내용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 했다. 관람객 수 기준 2010년 7만, 2011년 8만, 2012년 9만, 2013년 11만, 2014년 17만(온라인 5만)여 명으로 한국 만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축제이자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BICOF2014는 매우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었다. 사실 BICOF는 SICAF의 전시나 그런 것들을 참고하는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방축제로의 한계로 여겨졌다. 적어도 지금은 이런 콤플렉스를 모두 극복하고 콘텐츠의 질과 양에서 대도약을 이루었다.
BICOF가 2009년 진흥원에서 처음 개최되었을 때 환경은 정말 열악했다. 황량한 도시외곽에 있는 거라곤 진흥원건물뿐이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앉아있을 곳 모든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관계자들 또한 있을 곳이 없어 만화가 입주실로 모두 들어가 버려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만화가들조차 모두 밖으로 나온 듯하다. 행사장 여기저기 다양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행사장만 놓고 보면 대형 컨벤션 홀보다 내 자리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판을 깐 주인의 자신감도 느껴졌다.
축제 역사상 기념비적 장면과 마주하다, 코스프레의 바다
BICOF2014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은 단연 코스프레다. 코스프레의 바다에 온 듯 했다. BICOF2014 성공의 첫 번째 공로가 있다면, 코스프레를 축제 행사장에 일상화시키는데 성공한 점이다. 과거 BICOF는 코스프레를 오랫동안 축제의 주요 행사로 진행했지만 축제기간 내내 즐길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축제사무국 자체적으로 코스프레 동인과의 네트워크가 부재했기 때문이었는데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신생 코스프레 동인모임 코스앤코믹(Cos&Comic)을 BICOF의 공식 코스프레 후원단체이자 행사의 주인으로 맞아들였다. 코스앤코믹은 경기도권 코스프레 행사의 거점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공식적으로 약 2,000여 명의 코스프레 참여자들이 만화축제에 등장한 것은 국내 만화축제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서 지금껏 어느 만화축제 사무국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실현한 것이다. 이 배경에는 코스어들의 상당수가 중, 고등학생임을 감안하여 국제행사로서 BICOF 참여에 따른 자원활동시간을 배정해준 축제 사무국의 성의가 있었다. 집에서 혼자 쌓아온 개인의 만화에너지를 양지에서 해소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준 것은 평가받아야 할 일이다. 특히 행사장 곳곳에서 일반 관람객들과 친근하게 사진을 찍어주는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코스어들로 인해 행사장 전체가 포토존이자, 만화콘텐츠 자체가 되었다. 축제에서 진정한 만화 세계를 구현해내는 첫 번째 관문이 열린 듯 하다.
올 여름, 우리가 만난 뜨거운 만화의 울림
국내 만화축제행사에 가장 기본이 되는 콘텐츠는 바로 전시이다. 관람객과 관계자들 모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축제의 수준을 읽는 척도이자 행사의 방향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BICOF의 주제전시는 ‘만화, 시대의 울림’이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만화는 어떠한 역할을 했고, 목소리를 내었으며, 정신은 무엇이었는지를 관람객이 알기 쉽게 정리해 보여준 전시였다. 지금 우리는 어떤 울림을 내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노랑, 희망을 노래하다’ 전시로 맥락이 이어졌다. 지난 4월 세월호 희생자를 애도하는 전시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만화가들 자신만의 표현 방식으로 슬픔과 애도를 표현한 작품을 전시로 담아 선보였다. 그리고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돌아온 독고탁’ 전시와 만나게 된다. 70, 80년대 최고의 인기 캐릭터인 독고탁은 이상무 작가 기증자료 특별전으로 원화와 단행본 등 소중한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였다.
특히 만화 속에 등장하는 당시의 생활상과 시대의 가치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시계를 반세기 더 거슬러 오르면 ‘지지 않는 꽃’ 전시와 마주하게 된다. 제41회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전시로 당시 프랑스 현지 및 해외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아 이를 다시 BICOF에서 재조명하는 전시로 마련되었다. 그리고 500년 간의 유구한 과거를 살펴보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전시에 발을 멈춘다. 2013년 부천만화대상 대상 수상작품 특별전 성격으로 총 20권에 달하는 방대한 만화 전체를 해체하여 재조립한 수고스러움이 느껴지는 전시였다. 2014년 여름을 강타하고 있는 이순신 신드롬에 대해 이순신 장군 부분을 하나의 섹션으로 특화시킨 것은 시대의 울림에 조응하는 기획자의 세심함을 보여줬다.
이제 현재를 바라본다. ‘체르노빌의 봄’과 ‘웹툰에서 온 그대’ 전시이다. 30년 전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 아픔을 현재의 시각으로 치유한 ‘체르노빌의 봄’ 전시는 원화에서 뿜어 나오는 생동력을 통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온 체르노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웹툰에서 온 그대’는 현재 한국만화를 대표하는 상품인 웹툰의 인기 캐릭터를 실물로 만나 볼 수 있었다. 특히 웹툰이라는 2차원의 캐릭터를 3차원의 조형 예술로 표현한 점이 신선했고, 만화전시의 영역을 평면 중심에서 입체의 영역까지 확장하는데 기여했다.
전시 성격상 해설형 전시와 감상형 전시를 구분하여 특성에 맞게 구성한 것은 매우 적절했으며, 관람객들에 어떤 메시지를 줄 것인가에 대해 분명했다. 전시디자인 영역에서 테마컬러와 오브제 등의 요소를 통일하고 전시 인포그라픽을 도입하여 예년에 비해 세련미가 돋보였다.
BICOF가 기다려온 감동의 순간, 만화마켓의 성취
BICOF의 가장 큰 취약점이 있었다면 바로 산업적 성취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과거 BPP(Bucheon Promotion Plan)라는 출판만화 중심 견본시는 출판시장의 냉각으로 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한국국제만화마켓(KICOM-Korea International Comic Market)이라는 명칭으로 명실상부한 국내 만화마켓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이는 실적으로 보더라도 최근 3년간 2012년 79억불 2013년 88억불, 2014년 89억불로 국내 만화최대실적이다.
그 열기를 직접 체감하기 위해서는 페어관에 들어서야 한다. 올해 축제의 고무적인 일은 BICOF 최초로 유료부스제도 운영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예년에는 마켓 참여기업유치를 위해 부스를 당연히 무상제공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점을 극복한 것은 BICOF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페어관 안은 부스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만화출판사를 기본으로 웹툰 서비스 플랫폼, 작가 에이전시, 만화창작관련 디지털 기기 제조사,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이는 스타트업까지 만화산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기업들이 참여했다. 각 부스마다 관람객들에게 자사 홍보를 위해 마련한 이벤트들이 성황이고,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덕분에 관람객들은 흡사 크리마스 저녁 번화가에 몰린 사람들처럼 인파에 휩쓸려 유영을 해야만 했다.
마켓관 내부에서 벌어지는 웹툰 보이스 드라마와 같은 행사는 웹툰 콘텐츠의 다양한 변주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펼친 만화 아마추어 동인들의 부스 역시 매우 실험적으로 보였다. 아마추어 동인의 특성이 순수창작 콘텐츠가 적은 것인데 이점을 자체적으로 해소시켜 마켓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 중요한 시사점이다.
관람객을 위한 BICOF, 그린라이트가 켜지다
BICOF2014는 유독 만화가와 팬들이 함께 어울리고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이제 유명 만화가들의 사인회는 특별할 것 없는 연례행사가 되었고, 오히려 언제 사인회를 아름답게 종료시킬 것인가가 축제사무국의 가장 큰 고민이 되었다. EBS 라디오 공개방송, 조선왕조실록 팟캐스트 공개방송의 경우를 보면 미디어가 BICOF를 찾는 흐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축제사무국이 BICOF 콘텐츠를 어떻게든 매체에 태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면, 지금은 미디어가 BICOF안으로 직접 들어와 BICOF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형태가 된 것이다. 이런 미디어 기반의 행사의 경우 만화계 외적 자원의 결합으로 보다 풍성한 행사가 되기 마련이다.
EBS라디오에서 공개 방송으로 진행한 중계한 ‘소설마당 판-라디오 웹툰’에는 프로그램 DJ 이종범 작가를 비롯한 십 여 명의 스타급 웹툰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토크쇼, 공연, 퀴즈대회 등을 관객들과 함께 공개방송 형태로 진행했다. 조선왕조실록 팟캐스트 공개방송 역시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조선사 역사 전문 토크쇼가 축제 현장으로 들어와 관객들과 소통했다. 두 행사 모두 BICOF의 관객을 중심으로 놓고 진행된 행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역시 행사의 종반에는 만화가와 팬이 직접 만나는 과정으로 귀결되고, 이런 달달한 만남에 관객은 BICOF에 대한 그린라이트를 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특급 솔루션, 온라인 BICOF 2.0
BICOF의 현장 분위기를 띄운 것이 코스프레였다면 온라인상의 역할은 대도서관을 통한 인터넷 방송과 소셜미디어서비스의 이용이었다. 대도서관은 아프리카TV 방송 진행자이자 유투브의 메가 채널 운영자이다. 누적 시청자수 약 6천 만 명, 50여 만 명의 애청자를 가진 새로운 1인 미디어와 협업을 한 것이다. 청소년층에 매우 인지도 높은 미디어 주체가 직접 만화가 토크쇼를 진행하고 축제 현장을 생중계하는 활동은 BICOF를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3위까지 올리는 전무후무한 이슈를 만들어냈다.
특히 하일권, 김성모 작가와 함께한 ‘BICOF 온라인 토크쇼’방송은 약 3,000여 명이 동시 시청하여, 축제행사장에서 진행하는 컨퍼런스의 공간과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기존 전시 콘텐츠나 작품을 웹툰 플랫폼 이벤트 페이지에 형식으로 나열하여 노출시켰던 것에서 적극적인 참여형 온라인 행사를 만들어낸 것 자체가 파격적 실험의 성공이었다. 결과적으로 누적 시청자가 약 50,000명에 달하는 성과를 거뒀고 이는 BICOF 공식 관람객 집계에 포함될 만큼 중요한 데이터로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또 대도서관과 코스프레의 수요계층의 공유도가 높아 두 행사가 시너지를 일으켜 청소년층의 축제 관심도 증가가 본격화 되었다. 만화축제의 청소년 참여계층은 만화콘텐츠 헤비유저일 경우가 많은데, 만화외적 관심 영역의 청소년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매체를 통해 만화축제를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새로운 해결책이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눈부신 성취의 이면에는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쾌적한 행사 환경 구축이 시급하다. BICOF는 최근 행사장의 범위가 점점 확대됨에 따라 축제 주요 공간이 점점 벌어져 가고 있다. 행사 규모가 커진 점도 있지만 영상단지 내 산재한 유휴건물을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건물은 전시장으로서 기본기가 부족한 가설 건물이어서 언제까지 사용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전시의 질과 마켓의 성숙도는 나날이 높아지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양질의 컨벤션홀이 없다는 점은 BICOF가 조속히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그리고 국제행사를 지향함에 있어 축제안내 관련 인쇄물, 사인물 등에 영문 표기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행사장 전체의 시각적 요소를 대상으로 한 이미지 통일성과 심미성에 대한 관리 역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국만화박물관 수장고 내 만화사의 빛나는 보물들을 매년 BICOF 특별 콘텐츠로 만나는 것을 기대해본다. 당해 만화자료 기증 작가 특별전의 소극적 활용을 넘어, 수장고의 문화재급 유물과 유산들을 축제기간에 맞추어 새롭게 선보이는 것이 한국만화박물관이 해야 할 임무이자 만화 학예 본연의 기능이라 생각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난쟁이’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는 아이작 뉴턴이 남긴 말로 현대인은 누구나 과거의 거인들의 지식과 경험에 기반하여 그것을 토대로 더 발전한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BICOF2014는 현재성에 두 발을 굳게 딛고선 거인의 어깨 위에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빛나는 만화사의 별들을 조망해본 축제였다. 이제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난쟁이는 올해보다 더 커질 거인의 시선을 과거가 아닌 미래로 돌리는 숙제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