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허영만-창작의 비밀>(2015.4.29.∼7.19.)의 전시에 대한 보고서이다. 전시 기획의 과정과 제작과정, 전시 진행과 홍보전략 등에 관한 내용이 될 테다. 무엇보다 만화라는 콘텐츠로 기획된 대형전시라는 점에서 <허영만-창작의 비밀>(이하 허영만전시) 전시는 기존의 블록버스터 전시와는 구별된다. 이 글은 전시를 기획한 입장에서 쓴 보고서이다.
글의 순서는 만화라는 매체에 대한 기획자의 생각, 그리고 그 중 허영만 만화의 특징이나 전시로서 가질 수 있는 장/단점을 짚는다. 또 파인아트 분야에서 활동한 필자의 생각에서 전시, 특히 국내 블록버스터 전시의 특징을 살피고 이를 어떻게 이번 전시에 녹여내려 했는지 기술하려고 한다.
전시
전시란 ex와 exhibit이란 어원대로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것을 굳이 드러내고자 하는 이유는 개인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 안에서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로 공간이 설정되고, 창작과 소비가 설정되며, 저자와 독자가 설정된다. 18세기 이전까지 뮤지엄은 ‘수집품’을 의미했고 18세기 이후부터 이 수집품을 보관·전시하는 ‘건물’을 뜻하였으며, 1845년 영국의 뮤지엄법(Museum Act of 1845)이 공포된 이후로 근대적 의미의 뮤지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전시라고 말할 때는 19세기 중반 이후를 말하는 것이다. 그 첫번째는 1851년 런던세계박람회이다. 오늘날 블록버스터 전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첫 참가를 한다. 당시 한국관에서 전시된 것들은 갓, 모시, 돗자리, 가마 등이었다
국내 첫 블록버스터의 효시는 아마 1907년 경성박람회일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우리나라 침략을 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마련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한일합병 이후 5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한일합병 5주년 기념 공진회가 대표적이다. 위에서 열거한 것들은 박람회, 즉 PR과 홍보를 위한 산업과 기계를 중심으로 한 종합 전시라고 한다면 최초의 화이트큐브 전시, 즉 미술관 전시는 1922년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 즉 선전(鮮展)이다. 이는 알다시피 3·1 운동 이후 펼쳐진 문화통치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사업이었다. 세월을 훌쩍 넘어 블록버스터 전시의 효시는 2004년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이다. 샤갈전은 국내 블록버스터 전시의 첫 성공사례로서 이후 국내 블록버스트 전시가 많아진 계기가 된 전시다. 필자는 2000미디어시티서울, 2004살아있는 톨스토이를 만난다, 2006르네마그리트, 2006미디어시티서울, 2008부산비엔날레 등 굵직한 전시를 기획했고 참여했다. 그러면서 국내의 상업적인 전시와 공공적인 성격의 전시를 현장에서 겪어왔다. 하지만 앞서 기술한 것처럼 이는 순전히 화이트큐브에 국한된 것이며 콘텐츠 역시 순수예술에 한정된 것이었다.
이번 허영만전시를 기획하기 전에 유사한 전시기획은 <전남대 5·18기념관전>(2005)이나 <전국광15주기전>(2006), <노무현3주기전>(2012)이 그나마 가깝다. 이들 전시는 우선 콘텐츠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큐레이터, 학예연구의 기본이랄 수 있는 콘텐츠 연구는 사실 기획자 혼자서 할 일은 아니다. 방대한 콘텐츠 연구는 시간과 노동, 자본이 투여되어야 할 일이다. 이것은 공공기관에서 할 일이다. 아카이브 큐레이터란 개념은 최근의 이런 전시 행태에서 탄생된 새로운 개념이다. 미술관과 도서관, 자료실의 합성어인 라키비움도 도서관이나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낸 용어다. 허영만전시는 어쩌면 이런 기본적인 콘텐츠 연구를 통해 이를 단기간에 대중들에게 어필해야 하고 또한 허영만 만화의 콘텐츠에 대한 깊이까지도 놓쳐선 안되는 어려운 전시다.
필자가 허영만 만화를 처음 접한 게 아마 1979년인가 80년도쯤으로 기억한다. <태양을 향해 달려라>라는 초등학교 야구만화다. 이후 누구나 그렇듯 80년대는 이현세 만화 속에서 살았고 틈틈이 박봉성과 고행석, 허영만을 접했다.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학습만화의 붐은 필자에겐 해당사항이 아니다. 그러니 허영만 만화에 대하 콘텐츠 연구는 어쩌면 백지에서 시작한 셈이다. 전시 9개월 전에 이번 전시를 총괄한 한원석이 내게 찾아왔다. 허영만전시를 예술의 전당에서 하기로 했으니 참여해 달란 얘기였다. 망설였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만화는 내 전공도 아니고 사실 난 허영만 만화를 몰랐다. 하지만 모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도 있었다. 5·18기념관 때도 그랬고 노무현3주기전 때도 그랬다. 5·18을 직접 겪지 않았던 내게 그 사건은 언젠가 스스로 만나야 할 것이었다. 노무현대통령은 정치인이라기보다 한 인간으로 호기심이 갔었다. 허영만 전시와 만화도 그랬다. 그는 수많은 만화를 그렸고 또 현재까지 활동하는 만화가다. 하지만 난 그의 만화를 몰랐다. 작품을 접한 것도 적지만 그의 만화의 진면목을 사실 몰랐다. 그렇지만 오히려 몰랐다는 점에서 호기심은 더 생겼다. 그리고 이는 분명 콘텐츠 연구를 기반으로 해야 할 전시였다. 그 전에 톨스토이, 5·18기념관, 전국광 15주기전, 노무현전이 모두 이런 콘텐츠 기반 전시였으니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전시는 무척 힘들었다.
만화 전시
2014년 9월에 허영만 선생님을 처음 뵙고 화실을 방문했을 때 제일 우선적으로 한 일은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자료들을 살펴보고 자료의 양을 가늠한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의 전시는 필자가 합류하기 이전에 이미 확정이 된 상태였고 전시 일정도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다.
허영만전시는 한원석이라는 건축을 전공한 동생을 통해 참여하게 된다. 필자와 호형호제하는 한원석은 허영만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필자가 참여하기 1년 전부터 이미 전시를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진행 중인 전시 기획사와 어긋나면서 필자에게 제안이 들어왔고 필자는 위에 언급한대로 전시에 참여한다. 허영만 화실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예술의 전당에 전시를 하기 위한 기존의 기획서를 공부했다. 그러니까 이미 기초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 중이었던 셈이다. 기획서에 “미국엔 팀버튼, 일본엔 지브리, 한국엔 허영만”이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적혀 있었다. 어느 정도의 전시 콘텐츠와 제작 일정, 홍보 콘셉트가 들어간 기획서를 보고 허영만의 화실을 방문한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획서가 실행이 되기 위한 자료조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필자는 만화 전공자도 아니고 만화가 화실이라는 곳은 처음 가 본 셈이니 굉장히 늦게 기획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1차 자문회의가 있었던 12월 말까지 3개월 동안 전시 기획서를 완성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틈틈이 허영만만화를 읽어나갔다. <들개이빨>, <아스팔트사나이>, <벽> 등 시리즈물은 읽는 것 만 며칠이 걸렸다. 작품만 읽어야 할 순 없었으니. 이 과정에서 허영만의 자료를 모두 스캔하고, 연도별로 자료를 체크하고, 전시할 자료를 구분하고, 자료별 전시공간을 구획하고, 전시 연출의 방법을 기획한다.
알다시피 종이만화는 가난한 매체다. 가난하다는 건 종이만화가 생산되는 방식, 가령 한 작가가 오롯이 플롯을 완성하고 한컷 한컷 그려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70∼80년대 천대받던 매체였고 만화방이라는 허름한 공간에서 공유한 기억들의 매체라는 점에서 만화는 가난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비단 이게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허영만은 성공한 허영만이지만 그가 ‘어린 애들 코 묻은 돈으로 밥 벌어 먹는 사람’이라는 사회의 시선을 참아내 온 내면의 슬픈 모습을 우린 알지 못한다. 20대 대학생이었던 친구들과 비교당하면서 허름한 화실에서 가망 없는 만화 컷 속에 자신의 청춘을 의탁한 외로운 허영만을 우린 알지 못한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들은 기획을 하면서 안 것들이다.
허영만전시
우선 모든 전시, 특히 단기간에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급 전시에서 전시타이틀이나 부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팀버튼, 지브리는 이 과정에서 사라진다. 전시는 허영만이라는 국내 콘텐츠로 기획된 첫 전시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허영만을 만화가라기보다 크리에이터로 자리매김한다.
서울미술관의 <팀 버튼>, 한가람디자인미술관의 <스튜디오지브리 원화> 등은 모두 해외 콘텐츠를 사들여 온 전시들이다. ‘블록버스터’ 전시의 첫 성공사례로 꼽히는 2004년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 이후 쏟아진 수많은 전시들은 해외미술관이나 소장자들에게 고가의 작품 대여료를 지불하고 들여온 콘텐츠들이었다. 수억의 보험료와 전시 보상비(compensation fee)를 지불하고 대중들에게 타자적으로 각인된 내용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 국내 블록버스터 전시의 한계였다. 허영만 전시는 이러한 한계를 깨고 순수미술 위주의 화이트큐브에서 대중적인 콘텐츠를 초대하는 첫 전시이다.
만화라는 장르를 전시라는 형식으로(그 전에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처럼 대형으로 기획된 전시는 없다는 점에서) 보여주는 것이자 국내 콘텐츠의 첫 블록버스터 전시라는 점에서 실험적인 전시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다음은 콘텐츠 구성. 허영만 1층 화실은 허영만의 작업실 내에 있는 쪽지, 그림, 사진, 각종 전시물들이 있고 지하 화실에는 만화를 그리기 위한 사진들을 주제별로 모아 둔 아이디어 스크랩북, 식객을 위한 자료들로 꽉 차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 중 허영만의 만화일기, 그림일기, 취재노트만을 따로 스캔받고 정리했다. 4,000여 컷이 넘게 나왔고 그것들을 다시 추리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허영만의 작품들 중 어떤 작품들을 보여줄지도 고민이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전시는 밖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적인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허영만 작품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허영만의 속셈, 즉 생각이나 작품의 창작과정이나 동기, 주위 만화가와 선후배 인터뷰가 빠질 수 없었다. 박문윤, 서승택, 성완경, 이희재, 박인하, 백정숙, 윤태호, 김용회 등을 만나고 영화감독들은 추후 영상제작팀에서 만났다. 대중들의 앙케트 조사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토대로 차근 대충의 전시 윤곽이 드러났다.
전시는 이강토라는 인물이 일제 강점기에 대항하는 허영만의 첫 히트작 <각시탈>을 시작으로 시청률 43라는 깨질 수 없는 기록을 가진 애니메이션의 원작 <날아라 슈퍼보드>, 국내 프로야구의 한 풍경이지만 만화적 재미로 가득 찬 <제7구단>과 허영만표 야구만화들, 90년대 청춘의 팬덤이자 대중문화의 폭발을 보여준 <비트>, 천 만 관객을 모은 영화 <타짜>, 4년 간의 구상과 2년 여의 취재로 만든 요리만화 <식객>, 80년대 후반 대학생들의 필독 도서 <오!한강> 등 허영만의 대표작품을 선보이기로 한다. <비트>와 <타짜>는 2차 콘텐츠라 할 수 있는 영화 콘티와 시나리오, 소품들, 영화감독의 아이디어 영상을 상연한다. 이러한 허영만의 히트작 외에 그의 필력이 돋보이는 원화를 세밀하게 볼 수 있는 대형원화 10여 점과 원화들, 캐릭터를 입체화한 피규어, 허영만이 만들어내는 캐릭터, 연출, 스토리 이야기, 팝아티스트 이동기의 오마주와 제자 윤태호의 문하생 시절 컷들, 날마다 소소한 일상을 적은 만화일기와 일상의 사진들을 보여준다. 이때까지 <각시탈>원화는 등장하지 않았고 그때만 해도 전시의 메인은 허영만 대표작품들과 원화들이었다.
창작의 비밀
2014년 12월 28일에 있었던 전시 자문 회의 이후 필자는 그리 깊게 기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일정은 전시 콘텐츠연구보다는 전시홍보와 연출 방안이 논의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이 기획과 연계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1차 자문회의 결과 나온 ‘이 전시의 필요성이나 당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해 나가야 했다. 허영만만화를 재현하거나 반복하는 전시를 피해야했는데 자칫 그렇게 흐를 수 있었다. 앙케트 조사를 했다.
국내 전시는 20, 30대 여성 관객이 많았다. 하지만 허영만만화의 독자는 주로 남성층이다. 또한 세대별로 허영만만화를 기억하는 게 달랐다. 젊은 층은 <날아라! 슈퍼보드>, <식객>, <꼴>, <사랑해> 등으로 기억하지만 30대 후반, 40대와 50대 허영만만화를 기억하는 독자들은 <각시탈>, <무당거미> 등으로 기억한다. 또 <각시탈>, <비트>, <미스터고> 등의 영화는 알지만 허영만만화가 원작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이 실제 앙케트를 통해 조사된 내용들이었다. 다시 전시기획이 수정되어야 했다. 이게 2015년 1, 2월이다. 전시 2개월을 앞두고 전시기획이 전면 수정에 들어가야 한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허영만화실 지하에서 1974년 <각시탈>원화를 발견한다. 기존 기획에서 허영만원화들이 중심이었다면 <각시탈> 원화가 이를 대체하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전시 제목은 미정이었다.
대중들은 이렇듯 허영만만화에 대해 다채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하나로 끄집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개별작품은 작품대로 보여주되 각 작품을 창작하게 된 배경이나 만화사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위에 열거한 윤태호, 이동기, 피겨나 그림일기 등을 부록처럼 엮어내기로 한다. 또한 기억의 단순 재생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허영만에 집중하여 그가 15만 장이 넘는 원화와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의 창작의 과정이나 숨은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전시의 초점을 맞춘다.
전시는 ‘창작의 비밀’로 결정된다. 포스터는 광고기획을 하는 분이 제작한 것으로 다채로운 캐릭터와 좀 더 지금 이 시기의 허영만과 허영만만화라는 느낌으로 복고적이지 않게 만들었다. 아래는 전시기획서의 내용이자 ‘창작의 비밀’로 전시주제를 잡게 된 텍스트다.
전시의 메인포스터. 여러 색채의 변화로 광고물과 매체에 활용되었다.

허영만만화를 보여주는 방식을 인간 허영만, 즉 만화의 창작 동기나 허영만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기획은 바뀐다.
다시 문화는 기억을 통해 만들어지며 확대되며 재생산된다. 기억 자체는 저항성이나 힘이 없다. 하지만 기억이 확대되거나 재생될 때 견고한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예술에서 모더니즘의 본질적 형식으로 기억이 소환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기억산업으로서 전시도 마찬가지다. 전시는 이데올로기요, 재현의 정치다. 허영만이라는 작가와 작품을 복제하는 전시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전시는 회상이거나 복고풍이 될 것이다. 허영만에 대한 기억은 물신화되고 스펙타클화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을 불러내는 방식은 확실히 산업적 가치는 있어 보인다. 많은 기억산업의 전시들이 이런 방식을 택한다. 전시는 안전하고 관객은 회상에 젖고 드디어 감상에 빠진다. 새로움은 없다.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새로운 것은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기억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전시는 바로 이 지점, 발견의 지점에 있다. 전시에서 관객이 무엇을 발견하게 할 것인가. 전시는 새로운 세대와 교감하고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보여주는 방식을 택하고자 했다. 전자를 온통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전시는 후자에 집중하려고 했다. 서정의 엘레지보다 신난 랩의 형식을 택했다. 전시 형식과 콘텐츠 구성에서 젊어지려 했다. 작품의 시대순 배열보다 창작의 비밀의 열쇠를 관객에게 건네주고자 했다. 그것은 아마 만화가 허영만보다 인간 허영만에 가까운 접근이어야 했다. 허영만은 지난 40년 동안(데뷔 전 문하생 생활까지 합치면 50년이 다 되어간다.) 15만 장이 넘는 원화와 5000여 장의 드로잉과 취재수첩, 만화일기를 만들어내고 있고, 현재에도 매일 그 수를 늘려가고 있으니 아직 끝이 없다. 이러한 허영만의 생산력은 가히 ‘경이롭다’. 문화예술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명멸하지만 40년 넘게 한 장르에서 언제나 최고의 자리를 지켜 낸 창작자는 전 세계에도 없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대부분 그 형식을 고수하거나 반복 재생산하면서 중진이나 거장이란 이름에 안주하기 마련인 까닭이다. 하지만 허영만은 그렇지 않다. 그는 아직도 매일 그림을 그리며 제자와 후배들과 어깨를 견주면서 뛰고 있다. 그의 제자 윤태호는 허영만의 이런 창작의 자세를 ‘작가’라는 말로 요약한다. 진정한 만화가로 인정하는 거다. 오랜 세월 다작과 수작을 만들어 낸 허영만 창작의 비밀은 무엇일까?
큐레이터
흔히 큐레이터를 전시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맞지만 어느 정도는 틀리다. ‘큐레이터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의 답은 아주 간단하다. ‘큐레이팅(curating, curation, to curate)하는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어원인 라틴어 ‘curare’는 ‘돌보다, care’란 뜻이다. 즉 수도원에서 마음을 치료하거나 영적 치료사를 의미한다. 한때 신전이었고 전리품의 보관소였고 개인 소장품관이었던 곳을 돌보는 사람인 셈이다. 18세기 대중들에게 개방되면서 교육이나 전시연출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큐레이터는 단순히 전시의 기획과 연출뿐만 아니라 자료 수집, 작품의 보존과 관리, 교육, 연구 등의 일을 한다. 하지만 1960∼70년대는 전문적인 미술관 큐레이터라는 개념에서 미술관에 대항하는 지식인으로 변화한다. 이들은 전시 제작자 exhibition-maker로서 새로운 전시 형식을 만들어냈고 오늘날 현대미술의 형식들을 이끌기도 했다. 하랄트 제만, 퐁튀스 홀텐, 카스퍼 쾨니히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예술적 생산물(예술작품)의 시공간적 맥락을 전시의 맥락과 동일하게 여기면서 작품과 전시 매체가 전시 안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당연 전시가 중요하게 환기된다. 작품은 전시 장소와 시간에 기능적으로 작동하고 때로는 제한을 받으면서 생산된다. 누구누구에 의해 기획된이란 ‘curated by’라는 개념 속에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일부로 대중화된 개념이지만 이런 스타급 큐레이터의 탄생에서 시작된 말이다. 따라서 요즘 큐레이터는 역할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케어기버(caregiver), 협력자, 문화매개자, 조력자, 교섭자, 문화선동가, 중개자(middleman) 등으로 말이다.
허영만만화에 대비한다면 허영만전시의 큐레이터는 어느 정도에 머물까? 작가의 작품에 조언하거나(조력자, 협력자) 미술관이나 미술시장, 콜렉터나 관객에게 작가나 작품을 소개하고 추천하는(교섭자, 중개자) 사람은 아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는 철저하게 문화매개자의 역할이었다. 일직선상에 허영만만화가 한 끝에 있고 다른 한 끝에 관객이 있다. 즉 허영만만화가 있고, 그의 창작동기가 있고, 이미 출판되고 알려진 콘텐츠가 있으며 이제 막 알려진 숨겨진 <각시탈>이 있다. 이러한 콘텐츠들을 관객에게 알리고 매개하는 역할이 큐레이터의 역할이었다. 작품이 전시장에서 완성된다든지 관객의 참여를 통해 완성된다는 현대미술적 개념은 철저하게 버려야 했다. 결국 기존 생산된 콘텐츠를 ‘어떻게 보여 줄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연출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전시연출을 위한 공간구성 최종안. 올 초에 발견된 <각시탈> 원화가 전시 메인을 구성하게 되었다.
전시연출
조닝(zoning)을 통한 공간구성이 완성되면 공간별 세부연출방안이 나와야 한다. 전시장을 100을 봤을 때 콘텐츠별 퍼센트를 구획하는 게 조닝이라면 그것을 콘텐츠별로 구성하는게 공간구성이다. 공간구성을 토대로 연출을 하게 되는데 각 공간별 연출에서 가장 신경 쓴 건 창작의 비밀에 맞는 연출방식이었다. 허영만의 창작의 비밀이 연출별로 스며 있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허영만의 육성을 텍스트화하는 것이었다. 각 공간구성별 전시연출을 설명한다.
①원고탑과 연보존
처음 원고탑은 15만 장이 넘는 허영만의 원화를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상되었다. 압도감과 스케일로 관객이 몰입하는 연출이었다. 위아래 공간이 나뉘어 관객이 걸어 다니면서 2층 공간을 펼쳐보는 만화경 풍경도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모두 예산과 인력 문제로 잠자게 된다.
아이디어 차원에서 머문 원고탑 참고 이미지들

원고탑은 허영만의 지문으로 바닥에 펼치는 작품으로 제작되었고 연보존은 만화방을 재현하되 전시 초입이라 동선이 오래 머무르지 않게 펼쳐 보여주었다. 70년대 만화 화형식이나 80년대 프로야구 개막, 90년대 질투나 서태지와 아이들 등의 영상은 전시 개막 이후 추가한 콘텐츠들이다.
② 피규어
만화가 2차원의 밋밋한 평면이라 이를 좀더 재미나게 보여주는 방식은 기획 초기 단계부터 있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피규어 전문 작가에게 제작을 의뢰했더니 훌쩍 몇 천만 원이 넘어갔고 대형 조각은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중국에서 대형조각을, 박기봉 조각가가 피규어를 제작하게 된다.
피규어는 대표적 캐릭터 4개를 박기봉 조각가가 제작했다. 각시탈, 무당거미의 이강토, 식객의 성찬이 그리고 제7구단의 고릴라.

대형 조각은 전시장에 2개가 설치되었다. <날아라! 슈퍼보드>의 사오정과 <제7구단>의 고릴라이다. 이 둘은 모두 중국업체에서 제작하여 들여온다.
③ 대형원화
대형원화 역시 피규어와 같은 연출 동기에서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만화라는 종이 위 그림을 좀 더 스펙터클화할 수 있을까. 처음엔 그림을 정하고 허영만 선생님이 직접 그리는 걸로 기획했다. 캔버스 천 위에 직접 그리는 시연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허영만 선생님의 일정 때문에 원화를 캔버스 천 위에 출력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최초의 출력물은 <담배 한 개비>라는 작품이었는데 기획 초기 이 작품을 기획실에 걸어두니 꽤 근사했다. 대형원화존은 관객들에게 꽤 인기 있는 공간이었다. 추후 어떤 이가 기획하더라도 ‘원화를 직접 그려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한다.

④ 창작의 비밀-캐릭터, 연출, 스토리전시의 메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연극이나 영화의 3대 요소처럼 허영만만화를 공부하고 제작 동기나 창작 배경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선생님의 개별 작품들을 같이 녹여내면서 허영만 선생님의 육성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성했다. 육성의 경우 허영만 선생님에게 24작품의 목록을 드린 후 선생님께서 그것에 대한 창작 동기를 직접 써주시고 그것을 다시 필자가 수정하여 선생님께 허락을 받는 식으로 만들었다. 가령 <비트>와 <오!한강>의 경우가 이렇다.
무협지 스토리를 전문으로 쓰던 박하 씨랑 호흡을 맞춘 하드보일드 액션만화입니다. 박하 씨의 드라이한 스토리에 맞추기 위해 그림도 대폭 바꾸고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패션잡지를 놓고 스케치를 많이 했던 만화입니다. 화실을 꾸려가노라면 문하생의 실력이 셀 때가 있고 약할 때가 있습니다. <비트>를 연재할 당시에는 스토리와 만화가 꼭 끼어 맞는 최강의 팀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빅 히트했고 영화화되어 정우성, 고소영, 이병헌 3스타를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태국에서도 출간되었습니다. 태국에서의 출판은 발행부수가 워낙 적어서 원고료 대신 금 열쇠 하나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화 월간지 《만화 광장》에 월 40페이지씩 연재한 대형 기획만화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잦은 대학생들의 반정부 데모를 줄이겠다고 제안해왔던 반공 만화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데올로기는 섣불리 다루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속으로 이 기회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이어서 “나를 믿고 연재가 끝날 때까지 간섭하지 말라. 다 읽고 난 뒤에 ‘아, 이데올로기란 이런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도록 그리겠다.” 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 조건은 수락되었고 연재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작품 의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의 데모는 줄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학가에서 <오! 한강>은 필독서였고 심지어 제가 운동권 출신일 거라는 추측까지 돌아다녔습니다. 중앙정보부를 업고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어용 만화가라는 얘기는 듣지 않았고 제 만화의 질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제 만화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러한 텍스트는 이번 전시에서 굉장히 훌륭한 역할을 했다. 만화라는 대중적인 매체를 다룬 전시지만 진중하고 알찬 전시로 만든 연출이었다는 평이다. 또한 허영만선생님의 스토리노트 원본과 복사본을 가깝게 볼 수 있게 연출한 것 역시 훌륭한 평을 받았다.
⑤ 윤태호와 이동기
윤태호는 허영만 화실의 대표적인 문하생이었다. 물론 윤태호 이외의 문하생도 여럿 있고 현재 활동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윤태호만을 다뤘다. 이는 윤태호라는 작가의 네임 밸류에 기댄 측면이 많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동기는 국내 미술계에서 유명한 팝아티스트로 허영만만화를 그린 미공개작품이 있다는 것을 자문위원의 한 사람인 G갤러리 대표가 알려왔다. 이러한 공간은 전시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⑥ 더 깊숙한 이야기
아직도 수서 화실에 새벽 5시에 출근하고 신문을 읽고 오전 내내 작업에 몰두하는 허영만의 일상은 하나의 리츄얼, 즉 의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4시에 일어나 오전 내내 작업을 하고 오후에 운동을 하는 패턴이나 밝은 빛을 싫어해서 밤에만 홀로 작업을 하는 글렌 굴드의 리추얼이 그렇듯 창작자들의 일상은 관객에게 흥미롭다. 이런 전시 공간은 대부분 전시 콘텐츠에서 빠지지 않는다.
⑦ 각시탈과 원화
기획 초기 단계에서는 허영만의 15만장 원화를 메인으로 두고 공간을 구성했다. 그의 원화를 찬찬히 볼 수 있는 공간을 구성했다가 2015년 1월 말경 수서화실 지하에서 허영만선생님도 있는줄 몰랐던 1974년판 <각시탈>원화를 발견했다. 당연히 이 원화존이 전시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시공간연출도 제법 잘 나왔다.
⑧ 나가는 공간과 참여프로그램
기획 초기에 스캔했던 자료들 4천 여 컷을 추린 후 그것을 소도록으로 만들고 마지막 존에 만화와 관련된 컷들만 구성했다. 이 공간 역시 관객이 흥미를 보인 공간이었다. 와콤 체험이나 무스토이 체험, 허영만선생님 강연 등은 일반 전시에서 흔히 기획할 수 있는 수준의 프로그램들이라 깊게 언급하지 않는다.
만화전시의 한계와 가능성
흔히 전시장에서 전시작품은 1:1로 관객과 만난다. 그것이 모더니즘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현대미술의 경향에서 작품은 여럿 혹은 입체적으로 관객과 만난다. 허영만만화라는 콘텐츠는 전자와 후자를 모두 아우른다. 이 전시는 어쩌면 책 전시와 가깝다. <톨스토이>전과 유사하다. 연보, 친필 원서, 책의 원화와 사진, 그리고 제작된 동영상, 집필실, 동료나 후대의 평가 정도가 톨스토이의 메인이었다. 허영만전시도 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시평가의 기준은 여럿이다.
전시의 미학적 수준, 즉 예술적 수준에서 평가는 높았다. 그것은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그렇고 만화가나 평론가를 통해서도 여럿 목격했다. 흔히 대형전시가 놓치기 쉬운 예술성을 놓치지 않았다고 자평한다.전시의 대중적 수준, 대중의 참여도나 집중도 역시 나쁘지 않았다. 전시를 보고 나온 일반인들을 상대로 평한 결과 모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만화전시라는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우선 허영만만화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 만화는 웹툰과 동영상물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흥미롭지 않았다. 국내 만화사나 박물관에서 다룰 만한 일을 했다고 자부하지만 전시 흥행면에서 이번 전시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메르스라는 악재가 겹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만화라는 장르가 갖는 한계는 명확해 보인다. 결국 책이라는 콘텐츠를 전시라는 공간 속에 펼쳤을 때 이미 알려진 콘텐츠의 한계를 어떻게 깨부수는가 하는 내부적인 문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이후 문화사업, 특히 전시사업의 어려운 환경이라는 외부적 문제가 있다. 국내 대형전시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한계는 시장성, 즉 수지타산성에 맞춰져 콘텐츠가 수입되고 만들어진 데 있다.
앞으로 있을 웹툰 전시나 다른 여타 만화가의 전시를 위한 하나의 선례로서 허영만전시는 의미가 있었다. 좋았든 나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