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도 역시 예외는 없었다. 검은 헬멧, 검은 티, 선글라스, 검은 오토바이, 깔끔하게 밀어버린 머리, 수염(검은 안경테는 쓰지 않았음)…. 게다가 여름이어서 ‘Justice(정의)’와 칼 문신을 한 오른팔 , ‘Mercy(자비)와 묵주 문신을 한 왼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만화계 관계자들로부터는 ’역시 포스가~‘라는 말을, 문외한으로부터는 ’역시 조직원인가‘라는 말을 끌어내는 만화 <프리스트>의 작가 형민우(37)다. 할리우드 영화 <프리스트> 개봉을 전후해 연예인 못잖은 인터넷 공세를 받으면서 “이제 인터뷰 그만 해야겠다”고 투덜거리는 그를 만나 그 간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했다.
Q. 다른 만화가들의 부러움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A. 영화를 위해 만화 그린 것도 아니고, 월 매출 수백억의 자산가도 아니다. 이런 붐이 지나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 때의 단비일 뿐이다.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전혀 부럽지 않다. 내가 그 입장이 됐지만, 이 영화 끝나면 ‘너희들이 나에 대해 관심 안 가질 줄 안다’라고 말하고 싶다.
Q. <프리스트>의 독특한 그림체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일전에 내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자리한 가우디의 성(聖)가족 성당의 부조에서 <프리스트>의 그림 스타일과 비슷한 요소들을 본 적이 있다. 혹시 참고가 된 부분이 있나.
A. 내 초기작 <열혈유도왕>과 <태왕북벌기>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프리스트>의 시작이라면, 내가 어린 시절 읽은 <마녀의 관>이란 일본어 번역본일 것이다. 그 중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비이>를 각색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마녀의 이야기인데 일러스트가 엄청나게 강렬했다. 캐릭터가 호리호리하면서도 살벌했다. 그 캐릭터는 트렌치 코트에 깃을 세우고 바람 부는 가운데 서 있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잔상들이 남아 있다가 <프리스트>의 그림체가 됐다.
Q. <프리스트>를 시작하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나.
A. 사실 <열혈유도왕>과 <태왕북벌기>는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신인 시절의 치기어린 야망이었다고 할까? 1인 체제로는 제대로 작품 뽑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 하는 것이었다. 자료 없이 할 수 있는 만화. 내 머리가 자료인 만화가 <프리스트>였다. 솔직하게 편리하다.
Q. 이런 식의 만화를 했을 때 단점은 무엇인가.
A. 독자들이 내 기호를 다 알게 된 셈이다. 또 하면 식상해할 듯하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Q. <프리스트>는 16권에서 멈춰있다. 독자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A. 잘 알고 있다. 독자들이 비난하든 말든, 연재는 내 몫이다. 나를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내 작품을 칭찬하면서도 ‘작가, 나쁜 녀석’이라고 욕한다. 사실이니까 할 말은 없다. 내가 건실하게 연재하면, 할 말 없는데 자꾸 늘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15~16권 때 열심히 했는데도 좋은 소리 못 들었다. 이대로 하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연재를 쉬었다. 내 속에 내재한 어두운 정서가 메말라 버린 탓도 있다.
Q. <프리스트> 연재를 재개한다는 말이다. 어떤 식으로 할 건가.
A.기존의 다크 이미지가 아닌, 서사적 느낌으로 갈 것이다. 스케일이 커지면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 재미있게 풀어가야 하는 것이 숙제다. 나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은 아니다. 일단 던지고 즉흥적으로 나가야 한다. 설계도 짜봤자 소용없다. 그 때, 그 때의 느낌으로 승부하겠다.
Q. <프리스트>의 할리우드 영화 탄생 과정을 설명해 달라.
A. 8년 전 도쿄팝에서 제의를 해왔다. 내가 미국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샘 레이미라는 거물이 이 프로젝트에 걸려들어 깜짝 놀랐다. 중간 과정이 복잡했다. 감독, 배우가 바뀌고, 촬영 일정도 미뤄졌다. 사실상 포기하고 있는데 4년 전 모든 게 확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국에서 미팅만 6번 했다. 미팅이란 원작자에 대한 보고의 형태였다. 원작자에게 보고해주는 시스템이 참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Q. 영화 <프리스트>가 만화 원작과 완전히 다른데다, 영화 자체로도 큰 특징이 없다는 점에서 실망을 느낀 독자들도 많은데.
A. 할리우드 쪽에서 ‘각본 도와줄 건가’라는 질문을 해왔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게 대부분이었다. 할리우드 간섭이 어렵고, 언어 장벽도 크다. 영화 하나 바라보고 살 수도 없는 것이고. 복잡적인 이유로 할리우드 작업에서 손을 떼어 버렸다.
그래도 할리우드에선 손익 분기를 넘겼다고 한다. 선방했다는 평가다. 애초부터 초대박은 기대하지 않았던 것 아닌가. 또한 한국에선 개봉 시점에서 강적들과 맞붙었다. 나는 살아남았다는 게 신기하다. 우리나라 시장은 장르물에 대한 존경이 없지 않은가. 지금은 인터넷을 전혀 안 본다. 쿨한 척 하는데 너무 힘들다. 뒤통수가 간질거린다.
Q. <프리스트> 영화화가 금전적으로 충분한 수입이 됐나.
A. 나는 사실 돈을 많이 번 작가가 아니었다. 나를 먹고 살게 해준 건 해외 독자(세계 33개국 100만부)였다.
한국 독자는 내게 돌 던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프리스트> 연재 당시 권당 1만부에 불과했다. 가난 아닌 가난에 시달렸다.
오히려 회의감이 든다. 내가 ‘한국 작가 맞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영화화되고 되고 보니 뭘 해도 단가가 높아졌다. 그것도 사실 해외의 입김이 작용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돈 많이 벌고, 적게 벌고의 개념이 없다. 독자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편이다. 독자 비위 맞춰준다고 그들이 날 좋아하나? 욕먹어도 별 것 없다.
할리우드는 기본이 몇 억 단위다. 계약을 잘 한 것 같다. 한꺼번에 벌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다. 작가의 몸값이 한 단계씩 올라가는 건 부러워할 만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100년 가는 작품을 부러워해야 한다.
Q. 대한민국 만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만화가들 굉장히 힘들다. 따지고 보면 만화가 잘 될 때도 없었다. 몇 명만 잘 됐을 뿐이다. 강풀의 만화가 인기 있어도 한국 만화가 부흥하진 않았다. 만화가들끼리 칭찬하지 말자. 우리는 살벌하게 그려야 한다. 나 같은 건 진작에 방출됐어야 한다. 서로에 대해 날선 비판하자. 그게 살 길이다.
Q. <프리스트>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기자면.
A. <프리스트>도 일본, 미국 만화에 비하면 범작이다.
Q. 오토바이 마니아로 알려져 있는데.
A. 오토바이 탄 지는 6~7년 됐다. 오토바이와 만화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토바이 타고 멀리 가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오토바이는 긴장하고 타야 한다. 그래서 탄 후에는 멍하다. 일 다시 할 수 있는 거리만큼만 탄다. 파주 화실에서 오토바이로 자유로 타면 서울까지 얼마 안 걸린다.”
Q. 그림 그리는 행위를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가.
A.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사색이다. 그림 그리는 건 내게 배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