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초 『오마이뉴스』에서 불거진 <한국만화 어떻게 무너졌는가>라는 기사가 다소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사실 인터넷 『시민의 신문』에 실린 <스크린쿼터, 만화 전철 밟지 마라: 잘 나가던 한국 만화, 어떻게 일본에 먹혔나>라는 기사도 비슷한 논조를 담고 있었는데, 이 기사들이 이야기하는 바는 한국만화는 일본만화 개방 때문에 무너졌고 영화계는 이를 타산지석 삼아 스크린쿼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쪽 이야기들이 전제로 하고 있는 한국만화 패망론이 일부 영역의 침체를 전체 한국만화로 확대하고 있다는 분석적 반론이 이어졌다. 한국만화는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며 계속 역동적으로 발전해왔고, 심지어 전체 시장 규모 면에서는 침체하지도 않았다는 팩트가 필자를 포함한 여러 논객들의 주요 논거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다른 각도의 재반론이 제기되었다: 만화하면 가장 중심적으로 떠오르기 마련인 잡지와 코믹스 판형 중심의 주류 장르 만화가 실제로 극심한 불황인 것은 사실인데, 다른 영역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묻어버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영역에서 힘쓰는 사람들을 폄하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는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현재 피부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비록 다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더욱 큰 범주의 한국만화를 지칭하는 말일지라도) “그 사람들이 가라앉는 배를 탔을 뿐, 다른 배들은 멀쩡해!”라는 말은 도움이 안 될 뿐더러, 심지어 놀리는 말로 들릴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영역 자체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해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주장하는 그 다양성의 커다할고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인 영역을 통째로 버리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같이 앉아서 그래 우린 망한 것 맞아 이구동성으로 울고 있어봐야 도움이 될 리가 없으니, 정석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바로, 지금 잡지와 코믹스 판형을 중심으로 하는 장르만화라는 영역은 어떤 상황에 있으며, 어떤 향후 행보가 필요한가라는 발상 말이다. 그럼 천천히 들어가보자.
한국만화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한국만화 패망론의 근간을 이루는 침체 영역은 무엇일까. 우선 패망론적 시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 한때는 잘나갔다’는 인식과,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빠른 속도로 몰락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나아가 종사자들이 그 영역이 바로 전체영역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 아니 전체영역 그 자체라는 대표성을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실증적이든 음모론적이든 그 전환 과정에 어떤 극적인 계기마저 대입시킬 수 있다면 특히 안성맞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현재 이에 해당되는 영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대본소 전용 판형 만화, 속칭 ‘일일만화’다. 60년대부터 주욱 만화의 대표적인 유통경로 및 장르로 대표성을 획득했으며, 80년대까지 절정을 구가했던 분야가, 특히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한 양적 쇠락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만화 단행본이라는 보다 두껍고 밀도 있는 판형으로 일부 전환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지만, 철도역 앞 만화가게에서 각각은 얇지만 권수로는 수십권에 이르는 무협/조폭만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밤새 읽는 풍경은 분명히 드물어 졌다. 실제로 아직 현업에 있는 작가 프로덕션은 이미 2003년에 20개에 불과했고, 최근에는 더욱 감소했다. 하지만 이들 영역의 쇠퇴의 시작은 한국만화가 잡지연재-코믹스 판형 단행본 소매의 연계 시스템이 정착되어 단행본 누계 판매량 백만부 짜리를 배출하는 등의 호황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 결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비록 90년대의 이런 주류 장르 변화의 흐름에 둔감 내지 무심했던 이들에게는 이때 이미 “한국만화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겠지만, 여하튼 한국만화의 가장 활발한 주류를 다른 한국만화의 흐름이 교체한 형식이기에 전체적 위기의식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90년대에 기틀을 잡은 잡지-코믹스 단행본 시스템의 경우는 그러나 좀 더 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 출신만 놓고 보자면 이 방식은 대본소 시스템을 주류에서 밀어낸 것은 물론, 단행본을 위한 팜플렛이 아닌 잡지 자체로서 소비를 하게 만들었던 기존 80년대까지의 한국의 만화잡지 시스템과 그 작가들마저도 처절하게 밀어내며 주류의 위치를 거머쥔 시스템이었다. 당시의 주류 시스템과 작가들이 철저하게 퇴출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성격의 장르들이기는 하지만 여하튼 잡지가 팔리고 단행본으로 시장이 호황이라고 하니 한국만화 패망론으로 번지지 않았다. 나아가 이러한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내용 면에 있어서도 이미 일본 주류 장르만화들이 다져 놓은 장르 규칙들을 수용하기에 적합했고, 일본 만화 자체의 수입과 함께 더욱 호황을 구가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정설이 되어있다시피 그 성장은 상당부분 한국만화로서의 내실보다는 대여점 유통에 편승한 무리한 경쟁적인 단행본 라인 확장에 의한 거품 성장이었는데, 결국 일본만화 비중의 과다함, 마케팅 능력 상실, 잡지 부문의 경쟁력 상실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며 2000년대에는 완연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문제는 이 시스템의 호황이 한국만화 전체 영역에 대한 대표성을 부여해주고 있었으며, “불과 얼마 전”의 빛나는 시절과 침체 발생 이후의 시장현실 사이의 인지적 괴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비록 아무리 실체는 비정상적인 거품호황이었다고 할지라도, 시리즈 백만부 돌파의 환상에서 3000부 초판 소화도 간당 간당한 현실을 비교하고도 암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혹은 잡지 발행부수 30만부 돌파 소식에서, 네 자리 수 초반 대를 벗어나기 힘든 현실로 전환하는 것에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만화 잡지가 안 팔린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만화 잡지를 아예 읽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만화잡지가 동시대 또래 문화의 구심력이자 만화독서의 핵심축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인터넷 동호회들에서 독자들이 잡지 연재 단위로 서로 감상을 교환하지 않고 단행본 출간 단위로 감상을 나누고 있는 현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세기의 전환기에 코믹스 판형 단행본의 종수 거품의 막판에 잡지창간과 수입 단행본라인으로 뛰어들었다가 이내 철수한 여러 출판사들의 사례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최근 수년간 대형 출판사들의 연이은 만화 사업 축소 소식까지 더해진 것이 이 분야의 분명한 현재 스코어다.
잡지-코믹스 단행본 시스템에서 나올 수 있는 방식의 장르적 완성도를 위해서는, 잡지로 읽히고 단행본으로 또 읽히는 방식이 필요하다. 누구나 잡지로만 읽고 잊어버리는 방식도 곤란하고, 연재는 관심 없으면서 단행본만 사보는 방식도 곤란하다. 그리고 그 읽히는 방식이란, 상업적인 성과로 곧바로 치환되어주어야만 한다. 아무리 팬클럽이 수 십개라고 해도, 단행본 판매량이 적고 잡지 판매도 적으며 관련 상품을 통한 라이센스 수입도 없다면 이 시스템에 의거한 작품들은 존속될 수 없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시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패망론에서 이야기하는 ‘망했다’는 말은 만화시장, 만화산업이 죽었다는 것이며, 이는 만화는 문화니 예술이라니 하는 말과 전혀 상관없다. 물론 상업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만화가 나오면 참 훌륭한 일이지만, 잡지-코믹스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상업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냉정한 사업적 평가가 필요하다는 일들이란 무엇인가. 몇가지 작은 사례들을 제시해보자,
1) 독자를 냉정하게 재평가하기: 시장적 사고의 첫째는, 바로 타겟층에 대한 평가다. 장르 만화의 경우, 바로 독자들의 범주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는 말이다. 만화 독자라고 자처하는 층이 얼마나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며, 각 층이 얼만큼 그리고 어떤 방향의 시장성이 있는지 평가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00년대식 ‘모에 성향’ 매니아 독자들과, 하루를 스포츠 신문 개그만화로 시작하는 독자들을 같은 부류로 놓고 시장전략을 짤 수는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열혈강호>가 여전히 호조를 이루고 있는 이유는 모에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아니라, 단행본이 기존의 무협지 성향 독자들까지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한국의 하드코어 모에 집단은 아무리 온라인 상에서 목소리가 크다 한 들 규모도 돈도 영향력도 없다. 일본의 경우는 모에 성향 오타쿠들이 다른 곳에는 돈을 쓰지 않고 집중적으로 작품 및 관련 상품에 대해서 시장을 형성해주기 때문에 그런 장르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일본에서 유행하는 장르라고 해서, 또는 모에 애호가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또는 작가가 모에 성향이라고 해서 한국의 소년만화 잡지에서 매니악한 하렘물을 연재한들 대단한 시장 호응을 이끌기는 힘들다. 게다가 관련 굿즈 시장도 없으면서.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장르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현재는 한국에서 분명히 어떤 이유에서든 돈을 써줄만한 독자층이 없는 장르라면, 수익을 올리지 못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다.
2) 작품의 전개 방식 재평가하기: 시장적 사고의 두 번째는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내용적인 측면 자체다. 장르만화라는 것은 결국 독자의 독서 패턴에 부합해야만 ‘소비’될 수 있다. 쌓아놓고 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빠르고 설렁설렁한 전개가 필요하고, 꼼꼼히 보는 독자들이 대상이라면 세밀하고 느린 전개가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히트 연재만화의 이상향인 “연재 자체를 중독적으로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적당한 긴장과 무한 연장되는 흥미 공식이 필요하다. 한국 독자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빠른 진도를 선호하는 입장이 많은 편이지만, 세부 독자층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또한 단행본 판매로 승부를 보려고 할 경우, 단행본의 소모가 아닌 소장을 주요 컨셉으로 하고 싶다면 작품 연재 전체의 분량 또한 일정 권 수 이하가 되도록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대로 재미있게 읽고 적당히 치워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무한히 늘리되, 발간 주기는 좀 더 빠르게 해주는 식의 조율이 필요하다. 즉 콘텐츠가 독자의 향유 패턴에 맞춰줘야 시장으로서 성공한다는 것이다.
3) 매체 영향력을 최대화하기: 시장적 사고는, 합법적 테두리의 수단 방법을 총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주축으로 삼고 있는 그 종목에서 성공하기 위한 것이어야 사업으로서 성립된다. 속칭 ‘원소스 멀티유즈(OSMU)’ 라고 불리우는 매체 다각화 사업도 마찬가지다(사실 만화계 바깥에서는 거의 쓰지도 않는 말이지만). 만화 자체로는 돈이 안된다고 속단하고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기에 골몰하는 것에 그친다면 곤란하다. 실제로 <궁>의 경우 드라마 방영후 다섯 배로 만화 단행본 판매량이 뛰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OSMU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단지 저작권 장사를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종목인 만화 자체가 융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첫째, 어떤 특정 매체가 작품 자체의 대중적 인지도에 있어서 일종의 확성기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그것은 애니메이션이고, 미국은 헐리웃 영화이며, 한국의 경우 TV드라마가 가장 강력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그런데 그 드라마가 만화를 보고 싶어지도록 속칭 ‘뽐뿌질’을 하는가에 대한 평가 역시 중요하다. <아스팔트 사나이> 드라마를 본 후 허영만의 원작만화를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궁>이나 <풀하우스>는 원작에 대한 확실한 수요를 일으켰다. 그것은 순정이라는 장르나, 드라마의 ‘만화적’인 연출이나, 같은 이야기의 결론을 먼저 알고 싶어서 따위의 소소한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재미의 핵심요소와 만화에서 느껴지는 요소가 일치하며, 그러면서도 내용 전개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다모>
의 섬세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인간관계와 대형 서사적 화려함을 겸비한 (한마디로, ‘김혜린적인’) 드라마에 반한 팬들이, 방학기의 굵직한 남성적 스토리에 동시에 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는 반드시 만화원작을 충실하게 그대로 이식해야 하는가하면 그건 물론 아니다. 핵심은 단지 드라마의 원작이라고 홍보하는 것 이상으로, 드라마의 재미와 원작 만화의 재미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가 확실하게 어필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 만화를 반드시 사봐야 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말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시장적 사고’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이것은 만화사랑이니 한국만화에 대한 의무감이니 하는 지사적 열망과는 전혀 별개 차원의 것들이다. 만화로 확실하게 돈 좀 벌겠다는 장사치의 마인드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장르만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추구할 방향이다. 작가도 작품도 이런 고려 속에서 발탁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실 이런 고민의 출발점은 코믹스-단행본 방식의 시스템 자체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그런 시스템이기에 만들어질 수 있는 특정한 장르 성향이 계속 나와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만약 전혀 다른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르 성향이 더욱 높은 품질로 만들어진다는 보장이 있다면, 고작 십 수년 밖에 안 되었고 또한 처음부터 적용에 무리가 많았던 시스템을 굳이 고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차근차근 한걸음씩 다시 나아가며 이쪽 시스템의 근본을 다시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철저한 시장적 접근이며, 마케팅 사고의 구축이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어차피 이미 어렵고 힘든 판이 아니었던가.
2006년 3월 vol. 37호_01
글 김낙호(만화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