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정 : 복숭아 캔, 장미, Forever
2022년 10월 18일 만화가 박기정의 갑작스러운 타계는 만화계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졌다. 만화가 1세대가 저물어 간다는.
유족들마저 “돌아가신다는 예감이 전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급한 별세였다. 만화계 어른, 정신적 지주의 상실. 우리 만화의 뿌리 같은 존재들을 이제는 만화책 혹은 유품으로만 접해야 한다는 사실이 은연 중 슬픔으로 다가온다.
박기정은 단순히 ‘만화가 1세대’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만화, 특히 극화가 걸출한 작품들을 배출하고 웹툰 시대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도 박기정의 그림자는 구석구석 드리워 있다. 1960년대~70년대에 걸쳐 <가고파>, <은하수>, <들장미>, <흰구름 검은구름>, <도전자>, <폭탄아> 등 수많은 명작을 쏟아낸 박기정은 극화의 최고봉으로서 시사만화의 ‘고바우’ 김성환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그가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만화는 ‘재미’와 ‘울림’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만화적 재미를 추구한 작품들은 많았지만, 그의 만화처럼 강력하고 오랜 감동을 주는 만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도전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놈의 직업이 아닌 최소한 판·검사는 되어 있을 텐데…. 그건 선생님 책, 임, 이, 십, 니, 닷!!!”라는 가수 최백호의 고백(2016년 한국만화박물관 기획전시 ‘박기정의 도전’에서)이 그 증거다.
작품 속에 어떤 ‘칩’이 숨겨져 있기에 박기정의 만화는 이런 특별한 울림을 만들어 낸 것일까. 이 글에서는 박기정의 아내 정기창 여사(81)와의 인터뷰(2022년 12월 3일)를 통해 그 단서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복숭아 캔’, ‘장미’, ‘Forever'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따라가며 만화가 및 인간 박기정의 이면을 발견하고자 한다.
복숭아 캔의 인연
‘박기정 만화’하면 선 굵고 강하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 <도전자>, 박기정 (출처_부천만화정보센터)
훈이 불같이 거리를 질주하는 <도전자> 혹은 깔고 앉은 상대에게 당수를 내려치는 <레슬러> 표지가 아니더라도, 박기정의 모든 것에는 흐릿한 색채가 없다. <도전자>의 일본인 어머니가 훈을 두고 “근본은 누구보다도 착하지. 대신 적에겐 날카로워! 용수철처럼”이라고 한 설명이나, <폭탄아>의 긴다 소령이 탄아를 두고 “탄이는 송곳 같은 외골수!”라고 한 표현은 한결같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남자 주인공이든, 여자 주인공이든, 그들이 삶에서 추구하는 뜨거운 진실 그리고 열정이다. 오동추, 배뵤 같은 희극적 조연은 주인공의 개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집약하는 한 단어는 박기정의 평생 신념이었던 ‘백절불굴(百折不屈)’이다.
이 표현만큼이나 그에게 잘 어울리는 수식어는 없었다. 1960년대 말 신촌의 합동출판사가 독점 체제를 구축하고 힘없는 만화가들의 생계를 옥죄었을 때도, 한국아동만화가협회 초대 회장이던 박기정은 만화가들을 구제하기 위해 합동출판사에 정면으로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일보의 만화 출판을 이끌어 내며 합동의 독점체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에게 대쪽 같은 외피가 전부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외피의 안쪽에 숨겨진 것은 의외로, 무척 말랑말랑한 핑크빛 심장이었다. 이 심장에서 태어난 박기정의 캐릭터들은 만화 칸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창조자와 같은 피, 기질을 가진 독립체로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1965년 봄 서울 회기동으로 돌아가 보자. 박기정의 아내 정기창 여사는 당시 경희대 영문과 졸업반이었다. 여학생이 취업하기 무척 어려운 시절, 정 여사의 머릿속에는 오직 취직 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 영문과 박기반 교수가 그에게 고향을 물었다. 그는 무심코 “평택”이라고 답했다. 박 교수는 번역 일을 도와 달라며 자택으로 불렀다. 정 여사는 박 교수에게 취업 자리를 부탁할 심산으로 응했다. 3월 27일 박 교수의 자택에서 갔을 때, 거실에서 “곤색 점퍼 차림에 키가 별로 크지 않은 듯한” 젊은이를 만났다. 박 교수가 이 젊은이를 “동생”이라고 소개했지만, 정 여사는 아무 관심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취업’이란 단어로 꽉 차 있었다. 이 젊은이가 바로 박기정이었다. 박 교수는 두 사람을 앉혀 놓고 당시로서는 귀한 복숭아 캔을 따서 복숭아를 대접했다. 박기정은 그 날 큰형의 제자가 사는 남대문까지 데려다 주었는데, 정 여사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박 교수가 자신의 제자를 친동생에게 결혼상대로 소개시켜 준 것이다.
취업 자리를 구하지 못한 정 여사의 다음 행선지는 고향 평택. 당시의 평택은 아주 질퍽거리는 땅이어서 1년 내내 장화를 신지 않으면 다닐 수 없는 오지였다. 정 여사의 집은 평택 읍에서도 한참 걸어 들어가는 시골구석이었다. 전화도 없는 시절인데, 어느 날 느닷없이 박기반 교수 내외가 들이닥쳤다. ‘이 시골구석까지 스승 내외가 왜 찾아왔을까?’라는 생각에 궁금증이 커졌다. 박 교수가 동생과의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정 여사는 깜짝 놀라 난색을 표했다. 집안 사정상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진흙으로 범벅이 된 스승 내외의 신발을 샘물로 깨끗하게 닦아 놓았다.
정 여사의 형부가 박기정의 동네 탁구 친구여서 중간에서 다리를 놓으려 노력했다. 정 여사는 다음 달 서울로 올라가 명동에서 박기정을 만났다. 그 남자는 “몸만 오라”라고 말했다. 형부가 또 두 사람 사이를 오갔고, 6월 25일 약혼식을 했다. 그 후부터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됐다. 박기정은 “재건 데이트(당시에는 사회 전반전으로 ‘재건’이라는 구호가 유행했다)를 하자”고 하며 알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차도 타지 말고, 걷기만 하자”며.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정 여사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였다. 인내심이 있고, 알뜰한 성품인가를 알아보는. 박기정이 평택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의 데이트 장소는 갯벌이었다. 그 날 샘물에 박기정의 신발을 정성껏 씻어 준 정 여사는 “(남편이) 고마웠던가 보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결혼식은 10월 2일에 올렸다.
결혼해 보니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박기정은 결혼식 날짜보다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을 더 기념했다. 매년 3월 27일은 의례적으로 그들을 부부로 인연 맺어 준 복숭아 캔과 맥주를 먹는 날이 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어김없이 지켰기에, 자녀들이 3월 27일만 “복숭아 캔 안 먹냐”고 먼저 물을 정도였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 박기정의 제자 이우정은 “사모님이 ‘교수님께 취직을 부탁하러 갔는데 여기에(박기정에게) 취직시켜 주었어’라고 농담한 걸 기억한다”며 웃었다.
장미 만발한 회기동 신혼집
정 여사가 결혼과 함께 회기동 신혼집에 가서 알게 된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방 2개짜리 후생주택에 들어섰을 때, 마당 담벼락 가득하게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꽤나 아름다운, 나름의 “장미원”이었다. 박기정은 장미에 푹 빠진 남자였다.
그 집에서 함께 기거했고, 훗날 만화 <여탐정 장미>를 그린 이우정은 “박 선생이 사람을 시켜 길이 10m, 폭 3~4m의 담벼락에 여러 가지 색의 장미를 심어 놓았다. 그 곳에 백색, 흑색 장미를 비롯해 장미 애호가였던 나폴레옹의 아내 이름을 딴 ‘조세핀 브루스’라는 장미가 있었던 것도 기억난다. 박 선생은 나를 데리고 장미 뜰을 걸으며 ‘이게 뭔지 알아?’라면서 흐뭇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정 여사는 남편이 이 집을 자가로 마련해 놓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결혼 전 박기정이 “몸만 오라”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박기정이 만화가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당시는 만화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주 좋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서도 만화는 불량 매체로 자주 공격당했다. 정 여사는 박기정의 “신문사에 다닌다”는 말만 듣고 결혼했던 터였다. 박기정으로선 결혼 전에 굳이 만화가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박기정은 만화의 부정적 인식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아내에게는 “모르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담벼락 화단은 장미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지만, 마당 한 구석에 빈 깡통과 자장면 그릇이 잔뜩 쌓여 있었다. 박기정이 이우정, 김마정 등의 제자들과 먹고 놀며 남긴 잔해였다. 정 여사는 곧 ‘만화가 아내’라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정 여사에게도 제작 중이던 만화를 틈틈이 읽어 볼 기회가 생겼다. 그는 “<은하수> 원고를 보았지만 만화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혼 기간에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고, 그 후로 아이들 기르는 데 바빴다”고 설명했다.
정 여사는 박기정 화실의 분위기에 잘 적응해 나갔다. 박기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를 아내와도 함께 하려고 했다. 바둑은 정 여사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 여사는 야구 캐치볼은 곧잘 했다. 경복고 시절 야구 선수까지 했던 박기정은 화실 제자들과 캐치볼하는 것이 낙이었다. 정 여사도 남편과 캐치볼을 하면서 놀았다. 탁구, 볼링도 함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화 스토리도 써 보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곧 아기가 생겼으므로.
남편과 살면서 깜짝 놀랄 일이 많았다. 박기정은 이틀 밤을 새서 원고 작업을 하고도 신문사에 나갔고,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담배도 많이 피웠다. 반면 “술국을 끓여 달라”는 말은 안 했다. 박기정은 타고 나기를 강골이었다. 잇몸이 좀 좋지 않았고, 젊은 시절 역기를 들다 비끗했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고질병이 된 허리가 그의 약점이었을 뿐.
장미는 부부의 사랑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박기정은 아내가 멀리 갔다 올 때면 “웰컴, 와이프!” 하면서 장미 꽃다발을 안겼다. 어떤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꽃을 사러 나가는 남편이었다.
반지에 새긴 문구 ‘Forever’
남편 별세 후에도 정 여사가 소중히 손가락에 끼고 있는 물건이 있다. 남편과 함께 우연한 계기로 맞춘 커플 금반지다. 부부가 휴대폰 가게에 갔을 때다. 박기정은 휴대폰 가게 직원이 끼고 있는 반지를 유심히 보다가 아내에게 “우리도 할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 반지 디자인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 마침 휴대폰 가게 옆집이 금은방이었다.
박기정은 직원의 동의를 얻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후 금은방에 똑같은 모양으로 제작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커플 반지의 안쪽에 작은 글씨로 ‘Forever’라고 새겨 넣었다. 부부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문구였다. 박기정의 아내 사랑은 요즘 젊은이들이 보아도 로맨틱하지 않은가?
박기정은 결혼기념일 챙기는 것도 잊은 적이 없었다. 정 여사는 “남편이 좀 성격이 날카로운 면이 있었지만 나중에 다 포용했다. 그러면 도리어 내가 잘못한 면이 드러났다.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남편이 직접 종이에 쓴 사랑의 문구들을 보여 주었다. 그 중 한 가지만 소개하면 이러하다. 하트 안에 쓴 문구다.
축 생신! 남은 여생 오순도순 행복으로 채워 봅니다. 그대의 서방님이.
결국 로맨티스트의 면모를 물려받은 것은 그의 캐릭터들이다. 2016년 박기정이 탄아와 하나꼬의 목숨을 건 로맨스를 추가한 <폭탄아>의 끝 장면을 상기해 보자. 기자 역에서 혼자 떠나려는 탄아를 하나꼬가 붙잡으며 외친다.
“오빠는 사랑이 뭔지 알아?”
플랫폼에서 열차 탄 탄아를 향해 뛰어가며 “오빠 죽어도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라고 외치는 하나꼬. 탄아는 그 허리를 감아올리고, 바람결에 날려 플랫폼에 떨어진 하나꼬의 털모자가 클로즈업된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그 털모자가 한 송이 붉은 장미로 바뀌어도 무방하지 않을까라고. 박기정이 <폭탄아>의 마지막 컷을 다시 그린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까. 그것은 그가 아내에게, 그의 분신들에게, 더 나아가 세상에 던지는 영원한 사랑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