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만화인의 축제,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도시 앙굴렘(Angoulême)에서 열리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dessinée d’Angoulême (이하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은 그야말로 전 세계 만화인들이 참여하여 제 9의 예술인 만화를 기리고 즐기는 행사다. 매해 40여 개국의 만화 관계자들, 350여 개의 출판사, 5천여 명의 작가, 20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행사로 페스티벌이 열리는 1월 말에는 프랑스 앙굴렘 전체가 대형 만화 전시장으로 바뀐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만화관계자들에게는 저작권과 관련한 비즈니스 미팅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만화전문 출판사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출판된 만화는 물론 신간을 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유명 만화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리는 것은 물론 마스터클래스와 사인회도 진행된다. 이 밖에 여러 강연 및 전시, 기획전, 콘서트, 라운드테이블은 물론 전 세계 만화인들이 일 년을 기다려 온 다양한 시상식도 열린다.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만화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어린이·청소년·성인할 것 없이 만화를 읽는 독자가 많아졌다. 제9의 예술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만화는 물론 그래픽노블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던 앙굴렘의 시의원 프랑시스 그루가 몇몇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앙굴렘의 한 서점에서 15개의 만화를 전시하고 사인회를 갖는 행사를 마련했다. 이 행사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앙굴렘 시의 문화과를 담당했던 프랑시스 그루는 이탈리아의 ‘루카 만화축제’와 비슷한 행사를 앙굴렘에서 열 것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1974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 1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런 앙굴렘 세계만화축제가 2023년 1월에 50주년을 맞는다. 이번 50회 앙굴렘 세계만화축제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작가 알린 코민스키 크럼브를 기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더티런드리>로 유명한 알린 코민스키 크럼브는 1970년대 이후 왕성한 활동을 하며 <더 뉴요커>, <뉴욕 타임즈>, <아트 포럼> 등에 꾸준히 작품을 소개한 자전적 만화 세계의 상징적인 존재이자 여성주의 작품의 대모이기도 하다.
2023년 1월 말에 열릴 제50회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양한 작품전이 앙굴렘 시 곳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2022년 열린 49회 축제 역시 코비드 사태로 인해 행사 연기는 물론 거리두기 등으로 인한 규모 축소 등의 여러 문제를 겪었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몇 년 동안 일상생활은 물론 만화출판계에도 큰 타격을 준 코비드 사태와 상관없이 역동적인 예년의 만화축제의 분위기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축제에서 눈에 띄는 전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우선 49회 앙굴렘 세계만화축제 ‘그랑프리’를 차지한 줄리 두세의 작품전을 빼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앙굴렘 세계만화축제 그랑프리는 한 작가의 작품 인생 전체를 심사하여 주는 상이다. 49회 그랑프리의 주인공 줄리 두세는 캐나다 작가로서 이미 대학생 때부터 팬진으로 유명해졌으며, 그 이후 언더그라운드 코믹스 세계에서 이름을 알렸던 작가다. 작품집 <더티플롯 Dirty plotte>으로 프로 세계에 데뷔한 이후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지친 일상에 대해 솔직히 풀어내는 작품 세계로 유명하다. 이번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는 줄리 두세의 콜라주, 목판 판각, 세리그래피 등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월드와이드 코믹스 엑스플로전’이라는 주제로 신진작가 10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흥미롭다. 특히 이번 전시에 우리나라 작가 하석민의 작품도 선보일 예정이라 기대가 더 크다. ‘월드와이드 코믹스 엑스플로전’은 미래가 촉망되는 전 세계 작가들을 엄선하여 그들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자리로 만화계의 신세대 작가들이 다양한 노하우와 작품 철학에 대해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내레이션 기법은 물론 그림, 자수, 세리그래피, 디지털 기기 사용 등 여러 포맷을 사용한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눈에 띄는 전시는 35년 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 그랑프리를 차지한 원로 작가 필립 드뤼에의 작품전이다. 축제 첫날인 1월 26일에는 필립 드뤼에의 마스터클래스도 열릴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축제가 진행되는 4일 동안 앙굴렘 시의 전통 깊은 명문고교 ‘게즈 드 발작’의 고풍스러운 건물에 필립 드뤼에의 작품이 투사될 예정이기도 하다. 더불어 2022년 르네 고시니 베스트 시나리오 상을 수상한 작품 <마들렌, 레지스탕스>의 장-다비드 모르방과 도미니크 베르타이,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인 마들렌 리포 세 사람이 함께 할 라운드 테이블 및 만화 작품전도 큰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 池上遼一『全身全霊』展
이번 제50회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 다름 아니라 최근 프랑스를 강타한 일본 망가 열풍이 이번 축제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매해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망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일본 만화가들의 사인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만화전문 출판사의 스탠드는 만화 팬들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안 그래도 일본 만화는 오래 전부터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는 만화에 대한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특정 골수팬 층이 만화를 소비했다면 지난 몇 년 전부터 일본 만화는 프랑스의 남녀노소에게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말이다. 만화 판매량도 해도 몇 배가 올랐는지 모르고 매 주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10위 권 안에는 일본 만화가 두세 권 정도는 꼭 들어가는 정도다. 이렇게 일본 만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이 시점에서 이번 50회 만화축제에는 일본 만화의 거장 세 명이 직접 참여한다.
△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이사야마 하지메
<크라잉 프리맨>으로 유명한 ‘이케가미 료이치’는 일본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다. 이케가미 료이치의 200여 개가 넘는 원판이 이번 축제 때 전시될 예정이다. ‘미즈키 시게루’와 ‘우메주 카즈오’의 대를 잇는 공포만화가로 인정받는 ‘이토 준지’의 작품전도 열릴 예정이다. 이토 준지가 직접 참여하는 마스터클래스도 조직 중이라는 입소문은 있으나 아쉽게도 아직 공식적인 정보는 없다.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물론 축제에 참여하는 전 세계 만화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전시가 또 있다. 바로 <진격의 거인>의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작품전이다. 이번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열릴 예정인 <진격의 거인> 원판 전시는 유럽 최초라고 한다. 1월 28일 11시에는 이사야마 하지메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릴 예정이며 이미 입장권은 매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코트드이부아르 출신 작가인 “마르그리트 아부에”의 작품전을 비롯해 행사가 진행되는 나흘 동안 앙굴렘 도시 곳곳에서 유명 작가들의 작품전이 열릴 예정이다.
앙굴렘 만화축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랑프리 및 경쟁부문 시상식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축제인 만큼 앙굴렘 세계만화축제에서 주어지는 상은 많은 만화관계자들의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 한 작가의 작품 인생 전체를 고려하여 뽑는 그랑프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르네 고시니 상, 그리고 한 해 동안 프랑스어로 출간된 만화 중 가장 작품성 높은 책을 골라내는 황금야수상 등이 유명하다. 그 외 경쟁부문에는 특별상, 만화시리즈상, 새로운발견상, 아동부문상, 청소년부문 만화상, 얼터너티브만화상, SNCF추리야수상 등이 있다.
지난 3년간 앙굴렘 세계만화축제는 코비드 사태로 인해 취소, 연기, 규모 축소 등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번 50회 앙굴렘 세계만화축제가 지난 몇 년간의 고통을 잊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예년의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팬들이 만화에 대한 열정을 함께 나누고 한껏 누리는 것은 물론 만화가, 출판사 담당자, 에이전트 등 만화관련 관계자들 모두에게 알차고 뜻 깊은 행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