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이중 던전
△ <나 혼자만 레벨업>, 추공&장성락 (출처_디앤씨웹툰)
1980년대 초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대본소에 등장해 시장을 평정한 당시, 수많은 아류작이 쏟아졌다. 저작권 개념조차 없던 시대여서 캐릭터, 그림체, 설정, 제목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모방이 이어졌다. 시장이란, 그러한 것이다. 웹툰 시장으로 넘어왔다고 다를까? 그렇지 않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웹툰 독자들이다. 이들은 아마도 2020년 전후 웹툰기를 다음과 같이 부르는 데 주저 없이 동의하리라. ‘나 혼자만 레벨업의 시대’라는 수식어에.
시장 주도작이자 초인기 IP ‘나 혼자만 레벨’은 웹소설·웹툰 쌍끌이로 여러 가지 영광의 타이틀을 손에 거머쥐었다. 2021년 기준으로 142억 뷰를 기록했으며, 일본 픽코마에서 2019년 올해의 웹툰, 2020년 픽코마 어워드를 수상하는 등 해외 시장에서까지 K-콘텐츠의 위력을 과시했다. 또한 마지막 화 장면을 NFT로 발행, 1분 만에 매출 1억 원을 기록함으로써 ‘어나더 레벨’의 인기를 보여 주었다.
대중이 ‘나 혼자만 레벨업’이라는 IP에 환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미친 분량과 화려한 그림체와 작화, 웹소설의 탄탄한 스토리 등이 어우러진 결과이겠지만, ‘잘 만들었으니까 인기다’라는 식의 도식적 결론으로 얼버무리기 어렵다. 분명, 이 IP만이 가진 오묘한 매력이 은근하면서도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반란군 수장 모피어스가 파란약과 빨간약을 양 손바닥에 올려 놓고 선택을 기다리는 그 장면처럼.
판타지 속으로 떠났는데 다시 현실로?
분명히 길을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테세우스가 갇힌 미궁(迷宮)이 그러했다. 언제 어디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나타나 두개골을 와작 깨물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멘붕’이 불가피해진다.
우리는 현실에서 숱한 난관을 겪는다. 난제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런 우리에게 현실은 때로 미궁처럼 다가든다. 진실이 미궁에 갇히기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reality)’ 자체가 끊임없이 의심받아 왔다.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플라톤부터 “이 세계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장 보드리야르에 이르기까지 리얼리즘에 부정적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의 공세는 거세져만 가고 있다. 그 와중에 “진짜가 뭐지? 진짜를 어떻게 정의 내리지? 촉각, 후각, 미각, 시각, 뭐 그런 걸 말하는 거라면. 진짜라는 건 그저 너의 뇌가 해석하는 전자신호일 뿐”이라는 영화 <매트릭스>의 뜨끔한 일침이 현대인의 가슴 속에서 ‘현실’에 대한 확신을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어려운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현실을 마주하면 골이 아프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참으로 막막하다. 입시의 관문을 거쳐 취업, 결혼, 출산, 주택, 재테크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첩첩산중이다. 한 마디로, 답이 없다. 그리하여 판타지의 세계로 떠나 보는데 그 곳의 주인공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다. 독자는 눈물겹게 ‘존버’ 하면서 폭풍 성장을 일궈 내는 주인공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름의 문제 해결 방법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은 덤이다.
△ <나 혼자만 레벨업>, 추공 (출처_파피루스)
여기가 바로 판타지 ‘나 혼자만 레벨업’에 깃든 함의와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이를 위해 먼저 논의해야 할 대상은 IP의 원전 격인 웹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작가 추공)이다. 주인공 성진우는 돈을 벌기 위해, 정확히는 가족 부양을 위해 헌터들과 팀을 이루어 던전(마물이 득실거리는 소굴) 속 마물을 사냥해야 하는 ‘흙수저’ E급 헌터다. 헌터라는 직업은 목숨을 내 놓고 하는 3D 업종이다.
독자는 판타지 세계로 떠날 작정으로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나서는데,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판타지 속 세상이 우리의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이중 던전으로의 레이드(마물 사냥)를 위해 헌터 협회로 모여든 이들의 대화를 잠시 엿보기로 하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대게 서로를 잘 안다… 먼저 온 헌터들은 협회 직원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이, 김 씨. 여기야, 여기.”
“오, 박 씨가 웬일이야? 이제 헌터 짓은 그만둔다며?”
“그게… 마누라가 덜컥 둘째를 임신해 버려서.”
이 대화가 정녕, 판타지 세상 속의 장면인가? 새벽 4시 찬 공기 속에 구로, 금천의 인력사무소에 일감을 구하기 위해 모인 이들의 대화에 더 가깝지 않은가. ‘헌터’를 ‘인력시장 구직자’로, ‘협회’를 ‘인력시장 사무소’로 바꾼다면 말이다. 이어 인력시장 노동자의 설움이 뒤늦게 도착해 따뜻한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려는 주인공 성진우를 통해 전해진다.
“아, 성진우 헌터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커피가 방금 다 떨어져 버렸는데.”
“….”
진우는 검지로 코끝을 훔쳤다. 하필 자신의 차례에서 동난 커피마저 서러운 날이었다.
이 대목은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의 삶은 일제 강점기나, 21세기나, 판타지 세상 속이나 거의 엇비슷하다. 이것이 불변의 현실이자 진리인데, 이를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던전 출정 직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판타지를 읽다가 급속히 현실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이 불쌍한 일용직 노동자는 하드캐리 후 무사히 일당을 챙겨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독자를 도망치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 이 웹소설이 설정한 ‘이중 던전’은 성진우를 포함한 헌터 일행이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일터이자 공간이다. 대게 던전은 하나의 공간인데, <나 혼자만 레벨업>의 경우 던전 안에 또 다른 던전이 있는 특이한 구조다. 진우 일행은 우연히 마주한 이중 던전 앞에서 주저한다. 이중 던전 안에 어떤 마물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들의 레벨로 상대할 수 없는 마물이 있을 지도. 돈도 좋지만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모두들 머릿속에 ‘산후 조리원에, 큰 애 학원비에, 곧 전세도 올려 줘야 하고…’ 등의 고민을 지고 있는 터라, 이중 던전까지 싹쓸이해서 일당을 더 챙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17명이 투표한다. 8 대 8 동률이고, 캐스팅 보드는 진우에게 넘어간다. “가겠다!”는 진우의 외침은 실은, “돈 벌러 갑시다!”라는 말이다.
판타지 세계 속으로 들어온 독자는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현타’를 경험한다. 우리의 현실이 곧 던전이라는 것을. 내가 사는 공간이 미궁이고 던전이라면, 판타지 세계는 던전 속에서 만난 또 다른 던전, 즉 이중 던전인 셈이다.
△ <나 혼자만 레벨업>, 추공&장성락 (출처_디앤씨웹툰)
이것은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웹툰은 웹소설보다 ‘현실’을 더욱 도드라지게 차용한다. 아예 웹소설에는 없는 요소까지 추가한다. 예를 들어 배경에 ‘대한민국 서울’이라는 지문을 명시하면서 한강 다리와 강남·강북을 한 컷에 잡아넣고, 가방을 메고 도심 빌딩 숲 사이를 걷는 주인공을 클로즈업하는 연출을 구사한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웹툰의 남자주인공 등장신이라 해도 전혀 문제없다.
주인공이 도착한 곳은 ‘서울 내 공사 현장’이다. 웹소설과 달리, 레이드를 위한 게이트가 있는 곳은 헌터 협회 사무실이 아니라 도심 속 공사 현장으로 제시된다. 헌터들의 복장은 판타지 스타일의 기사 전투복이나 특정 유니폼도 아니다. 점퍼, 패딩, 공사 작업복, 심지어 추리닝을 입은 중년 남자들이다. 버스 정류장이나 편의점, 동네 골목에서 흔히 만나는 이들의 복장이다. 다만, 헌터들의 손에 중세풍 무기가 들려 있을 뿐이다. 어색한 조합임에 틀림없다. 웹툰 작가가 현실감을 강화화기 위해 판타지 분위기를 최대한 희석시키려 작정했다고 볼 수밖에. 독자가 판타지를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현실을 느끼게 하려는 제작진의 전략은 의심할 바 없어진다. 이것이 바로 ‘나 혼자만 레벨업’ IP의 진정한 함의이자 정체성이다.
이중 던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마왕
이렇게 되면, 현실은 판타지 속 이중 던전으로 치환된다. 웹툰이 검푸른 톤의 비주얼로 소개하는 이중 던전 속 신전(神殿)의 권좌에는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폴>의 대마왕급 마물이 앉아 있다. 우리는 이 녀석을 ‘마물킹’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대마왕처럼 푸른색 몸을 지닌 마물킹은 헌터들을 바퀴벌레처럼 밟아 죽이고, 눈에서 붉은 광선을 쏘아 몸통을 사정없이 녹여버린다. 헌터들은 속수무책이다.
웹툰의 매력은 마물킹의 위력과 위압감을 웹소설보다 훨씬 위력적이고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좌에 앉은 마물킹이 수직 컷의 상단 오른쪽 구석에 위치하고, 거기서부터 붉은 광선이 수직 컷의 맨 밑바닥까지 일직선으로 내리 꽂힌다. 발사 지점에서 가늘었던 붉은 광선은 스크롤바가 내려오면서 독자의 시선이 가장 가깝게 닿은 지점에서 가장 굵어진다. 신전 밑바닥이 깨어지며 튀어 오르는 돌의 파편과 함께. 원근감을 광선 줄기의 굵기로 조절하는 연출 기법이다.
△ <나 혼자만 레벨업>, 추공&장성락 (출처_디앤씨웹툰)
주인공이 처한 위기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 주는 방법은 더 있다. 거대한 마물킹의 눈으로부터 신전 밑바닥의 헌터들을 내려다보는 시점이다. 헌터들의 리더 송씨의 한 쪽 팔이 붉은 광선에 의해 사라진다. 주인공이 송씨의 한 쪽 팔을 묶어 지혈하는 것을 마물킹이 내려다보는 장면은 독자의 등골을 섬뜩하게 한다.
마물킹 주변의 작은 마물상(像) 하나도 헌터들은 감당할 수 없다. 헌터 일행 중 역대급 최약체로 평가받던 주인공은 그 간의 전투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으면서도 살아남았고, 상황을 파악하는 촉을 길러 왔다. 진우는 ‘신을 경배하라’는 카르테논 신전의 첫 번째 규칙을 알아내고 동료들에게 전파한다. 석상인 줄 알았던 마물킹이 헌터들의 절을 받고 해골 같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은 어느 장면보다 끔찍하다. 독자가 던전 속에 떨어져 직접 마물킹을 만나는 느낌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연출이다. <디아블로>, <던전앤파이터> 등 수많은 던전 게임들이 흉내낼 수 없는 현실감이다.
판타지 속 이중 던전이 현실이라면, 마물킹은 현실 속 독자가 상대하기 버거운 어떤 존재, 혹은 대상이 아닐까. 독자는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의 마물킹을 마주하며 현실 속 ‘넘사벽’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마물킹은 현실적 존재감을 얻게 된다. 마물킹의 부하들 같은 존재도 현실 속에 숱하게 깔려 있다.
중요한 것은 최약체로 불리던 주인공이 특유의 능력으로 동료들을 구해 낸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해낼 수 있다면, 현실의 나도 해내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독자는 판타지 속에서 ‘현타’를 얻고,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자신이 매순간 “파란약”과 “빨간약” 중 택일을 강요받으며 판타지와 현실이라는 이중 던전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럼 어떠하랴. 주인공이든, 현실의 나든, 마물킹이 달려드는 상황 속에서도 잘 생존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으면 그 뿐.
웹툰 업계는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이 K-웹툰 그림체를 확립했고, 원작 소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웹툰 자체의 힘으로 더 떴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여러 장점을 세세하게 늘어 놓을 필요 없이, ‘나 혼자만 레벨업’ IP는 판타지와 현실의 영역, 각각에 서로를 심어 놓은 이중 던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발을 들인 독자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설계됐다. 그 이중 던전은 아주 복잡 미묘한 ‘미궁’이어서 아드리아네의 실이 있거나, 날개 달린 이카루스 같은 존재가 꺼내 주지 않는 한 탈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