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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운경(1935-2023), 그리고 신문 시사만화 시대에 고하는 작별

<왈순아지매>, <또복이>, <진진돌이> 정운경 화백을 기리며

2023-10-21 박인하

[ 이미지 1, 고 정운경 화백 ]


1. 김성환, 박기정, 이홍우, 그리고 정운경 선생이 타계했다.

2019년 10월 9일 김성환 선생이 타계했다. 1932년 생으로 수(壽)  87세. 2022년 10월 18일 박기정 선생이 타계했다. 1936년 생으로 수(壽) 86세.  2022년 12월 24일 이홍우 선생이 타계했다. 1949년 생으로 수(壽) 73세. 그리고 2023년 10월 12일 정운경 선생이 타계했다. 1935년 생으로 수(壽) 88세. 고바우(김성환 작), 뚱딴지(박기정 작), 나대로(이홍우 작), 왈순 아지매(정운경 작)도 역사의 뒷편으로 흘러갔다. 신문 시사만화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한국만화의 역사는 정확히 시사만화가 시작된 시점에서 출발한다. 1909년 6월 2일 대한협회 주도로 창간된 «대한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이도영의 ‘삽화’가 한국만화의 출발점이다. 캐릭터와 형식이 고정된 이야기 만화도 1924년 10월 13일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노수현의 ‘멍텅구리’ 시리즈다. 시사만화 뿐 아니라 이야기만화도 신문에서 출발했다.  ‘멍텅구리’  시리즈에서 이전에는 밭 전(田)자 형태이던 신문만화의 기본 포맷이 눈 목(目)자로 바뀌었다. 

만화는 매체를 기반으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한국만화의 출발점에서 시사만화와 이야기만화 모두 ‘신문’을 지지대로 한다. 이야기 만화는 네 칸 만화 한 페이지 만화, 연속된 페이지 만화처럼 다양한 형식으로 신문에 연재되었고, 잡지와 단행본으로 매체가 확장해 갔지만, 시사만화는 마치 신문의 일부인 것처럼 굳건하게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신현상학>을 집필하던 철학자 헤겔은 일기장에 “조간 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 기도다.”라고 썼다고 한다. 지금이야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실시간 뉴스가 중계되는 시절이지만 20세기에는 매일 아침 신문을 통해 세상과 마주했다. 많은 권력자들이 신문을 두려워했고,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했다.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 시사만화가 검열로 까맣게 먹칠이 되어 나온 역사를 시작으로 시사만화가들은 권력의 탄압과 싸워야했다. 만화가가 만화 때문에 처벌을 받기도 했다. 김성환은 1958년 «동아일보» 1월 23일자 <고바우 영감>에서 거리를 지나던 거들먹거리는 경무대(대통령 집무공간) 똥 치우던 사람을 그린 만화로 경찰서에 불려갔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강제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운영옥은 «서울신문» 1972년 6월 19일자 <까투리 여사>에서 농림부 권장사업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대사를 넣어 2판에서 다른 만화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6월 19일자로 <까투리 여사> 연재가 중단되고 만다. 무려 5년이 지난 1977년 7월 25일이 되어서야 <까투리 여사>가 다시 신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안의섭은 «한국일보» 1986년 1월 19일자 <두꺼비>에서 레이건 대통령의 건강이 문제가 되던 당시 “대통령각하 오래오래 사십쇼! 하는짓이 마음에 쏙 듭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는 대사를 넣는데, 이 만화로 고문과 가택연금을 당하고 <두꺼비>는 1면 7개월간 연재가 중단된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 뿐 아니라 협박 전화나 편지가 오기도 했고, 유신 정권 때는 신문을 검열하는 기관원이 상주하기도 했으며, 만화가 교체되거나 수정되기도 했다. 

만화가는 권위주의 정부의 매서운 칼날을 피해 매일매일 네 칸 안에 진실을 담으려고 했고, 독자들은 만화가가 담은 풍자의 메시지를 읽어내곤 했다. 신문 시사만화의 절정기는 1970-1980년대였다. 그 시절 독자와 함께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던 만화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네 칸에 진실과 풍자를 날카롭게 벼려 넣은 신문 시사만화의 시대도, 친근하게 부르던 캐릭터들도 모두 오래된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미디어 홍수의 시대 신문의 역할을 축소되었고, 제일 먼저 독자들이 찾아 읽던 시사만화의 자리도 거의 사라졌다. 신문 시사만화의 마지막 주역인 정운경 선생이 세상을 떠나며 신문 시사만화 시대에 고하는 작별을 남길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글은 고 정운경 선생에 대한 추모의 글이며 동시에 신문 시사만화 시대에 고하는 작별의 글이다.  

* 관련 기사: 50년 연재 '왈순아지매' 정운경 화백 별세, 향년 88세.


[ 그림 2, 1958년 여성잡지 월간 «여원» 8월호에 수록된 <왈순 아지매> 1화 ]


2.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 ‘왈순 아지매’

윤영옥의 <한국신문만화사 : 1909-1985>(1) 에 따르면 정운경 선생(본명 鄭光億)은 193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청주대 상대와 서울 동국대 경제과를 수료하고 1950년대 신문과 잡지로 데뷔했다. 1950년대 대중잡지인 «아리랑», «야담» 등에 단편만화를 수록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에 만화방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데뷔한 만화가들은 신문과 잡지에서 활동했다. 정운경도 신문과 잡지에 시사만화, 우스개 만화, 삽화 등을 발표했다. 박석환은 1955년 «서울신문»에 “<콩돌이 팥돌이>를 연재하며 본격적으로 만화가로서의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고 밝혔다(2)

«서울신문»은 1958년 8월부터 신문 증면과 함께 만화가들에게 한달씩 지면을 제공했다. 정운경은 1958년 10월 9일부터 11월 9일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난난이>를 연재했다.  1950년대 신문에 연재한 네 칸 만화는 가족만화의 성격을 지닌 작품들이 많았고, 정운경의 <난난이>도 가족만화였다. 

<난난이>보다 앞서 1958년 여성잡지 월간 «여원» 8월호에 2페이지 만화 <왈순 아지매> 연재를 시작했다. «여원»은 1955년 10월에 창간해 1970년 4월까지 출간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잡지다. <왈순 아지매>는 1964년까지 계속 연재되다 정운경이 «대한일보»로 자리를 옮겨 같은 제목의 네 칸 만화를 연재하며 연재가 종료된다. 

네 칸 만화 <왈순 아지매>는 «대한일보»에서  1964년 9월 21일부터 연재를 시작해 1967년 9월 29일까지 약 3년간 연재를 지속한다.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1967년 10월 2일부터 1975년 1월 1일까지 연재를 하고 다시 «중앙일보»로 옮겨 1975년 1월 6일부터 2002년 12월 24일 은퇴까지 총 횟수 8,829회를 연재한다. ‘왈순 아지매’ 는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 안의섭의 ‘두꺼비’와 함께 한국 신문 시사만화를 대표한 3대 캐릭터로 손꼽힌다. 김성환의 <고바우 영감>은 «조선일보»에 1955년 2월 1일부터, 안의섭은 김경언이 1955년 3월 6일부터 «경향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두꺼비>를 이어받아 7월 1일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3대 캐릭터 중 가장 늦게 정운경의 <왈순 아지매>가 1964년에 합류한다. 한국 시사만화의 원류이기도 한 김용환의 ‘코주부’나 ‘고바우 영감’, ‘두꺼비’ 모두 중년 혹은 노년층 남성이 주인공이었지만, 특이하게 정운경의 ‘왈순 아지매’만 여성 캐릭터였다. 이후 한국 신문 시사만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작품은 «서울신문»에 1977년 7월 25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윤영옥의 <카투리 여사> 정도였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왈순 아지매’가 신문 시사만화 캐릭터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잡지 «여원»에 수록된 가족만화의 캐릭터로 데뷔했다는 점이다. «여원»에 연재된 2페이지 만화 <왈순 아지매>에서 ‘왈순 아지매’는 식모로 등장한다. 한국 전쟁 이후 도시를 중심으로 전후 재건이 시작되고, 1957년부터 미국의 한국 원조가 줄어들며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이동이 가속화되었다. 가정에 입주하여 가사나 육아를 도우는 도우미 역할로 식모가 1950년대 중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1950년대 후반이 되면 일반적인 도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2페이지 만화 <왈순 아지매>는 시대 배경 속에서 탄생했는데, 특이한 것은 캐릭터 설정이다. ‘왈순 아지매’에 대해 이선미(2009)는 “왈순아지매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농사일에 길들여진 건강한 육체 를 지닌 아줌마의 형상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도시 중류층 가정의 부부중심 살림살이를 도맡아 책임지는 가사노동 전담자로서 육체적 노동뿐만 아니라, 시골사람들이 지닌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인정미를 지니고 있어 가족의 정서적 위안자로서의 역할도 하는 전형적인 가족돌봄 노동의 주체로 형상화되어 있다(3).” 라고 평가한다. 당대의 식모 담론이 식모에 의한 범죄 혹은 가족을 위해 상경해 힘겹게 노동하는 식모의 수기 정도의 수준이(4) 었던데 비해 ‘왈순 아지매’는 강한 캐릭터성을 기반으로 과중한 가사 노동에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파격으로 인해 다른 만화와 달리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장기연재되었고, 인기를 바탕으로 1963년에 동명의 영화가 개봉되었으며, 1967년에는 동명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TBC를 통해 방영됐다. 

1950-1960년대 신문시사 만화가와 이야기 만화가가 명확하게 구분되기 이전 정운경은 여성이 주인공인 생활만화 <왈순 아지매>를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생활만화의 계보는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정운경은 자신의 대표작 <왈순 아지매>를 연재하면서도 지방신문을 위해 추가로 작품을 연재하기도 한다. 1964년 5월 20일부터 1971년 5월 31일까지 8년간 «부산일보»에 <국희아씨>를 연재 했고, 1973년 7월 1일부터 1983년 5월 31일자까지 10년간 «대구매일신문»에 <낙동선생>를 연재 했다. 타고난 성실함과 만화에 대한 감각이 없었으면 동시 연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3.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정운경의 어린이 만화

정운경은 1960-1970년대 어린이 만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주로 신문의 어린이 지면에 만화를 연재했는데, 1960년 8월 20일부터 12월 6일까지 «서울신문» 매주 화요일, 토요일 주 2회씩 석간에 <꽃분이>를 연재했고, 1961년 1월 7일부터 3월 14일까지 같은 지면에 두더지를 주인공으로 한 동물만화 <두돌이>를 연재했다. 특이한 것은 <꽃분이>, <두돌이> 모두 문자가 없는 ‘워드리스(Wordless)’ 네 칸 만화였다. 동물 캐릭터를 활용한 동물만화는 1960년 4월 10일부터 «동아일보»의 어린이판 «소년동아»에 <또복이>로 이어졌다. <또복이>가 어린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정운경의 동물만화는 다음 단계로 진화한다. 청소년 잡지 «학원» 1962년 6월호부터 동물만화 <진진돌이>를 6페이지 분량으로 연재한다. 진도에서 서울로 상경한 진돗개 진진돌이와 쥐 찍길이가 지원병 모집 벽보를 보고 군에 들어가면서 진진돌이와 찍길이의 병영생활이 시작된다. 교양잡지에서 6페이지나 되는 많은 분량으로 동물들의 전쟁을 풀어간 <진진돌이>는 크게 히트하여 «학원»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만화로 자리잡는다. 1968년에는 진학사에서 양장본 세 권에 2도 인쇄로 <진진돌이>를 출간한다. 당시 특별한 인기 만화가 아니면 서점용 단행본으로 출판하지 않았으니 <진진돌이>의 인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광고에서는 최초의 동물 장편만화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복이>, <진진돌이>를 비롯해 여러 동물만화를 일간 신문의 어린이 지면이나 어린이 잡지에 연재한다. 1965년 7월 15일자부터 7월 30일자까지 «부산일보» 어린이 지면에 <코봉이>를 연재한다. 1968년 «어깨동무» 6월호부터 한쪽 주먹이 큰 꾀백이 토끼가 주인공인 <주먹장군> 연재한다. 1970년 «어깨동무»  8월호부터 가축군과 맹수준의 전쟁을 그린 동물만화(당시에는 ‘동물 무용 만화’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무용은 무예와 용맹을 뜻하는 ‘武勇’이다) <방울범>을 연재했다. 장르적으로 <진진돌이> 후속편 성격이어서 많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3년 «소년중앙» 1월호부터 <도톨이행진곡>을 연재했다.  1977년 6월호-9월호 «학생중앙»에 <또복이>를 연재했다.  

정운경은 이처럼 1964년부터 신문사에 입사해 네 칸 만화 <왈순 아지매>를 연재하면서 어린이 신문과 잡지에 어린이 만화를 꾸준히 발표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억척스러운 식모 아주머니 캐릭터였던 ‘왈순 아지매’를 신문 시사만화에 맞게 주부 캐릭터로 바꾸기는 했어도 꾸준히 캐릭터를 이어갔던 것처럼, <또복이>, <진진돌이> 등은 새롭게 매체를 바꿔 재연재를 했다. <또복이>는 1960년 «소년동아», 1977년 «학생중앙»을 거쳐 1981년 1월부터 «중앙일보» 매주 목요일에 발행되는 컬러 어린이 페이지 ‘어린이차지’에 연재되었다. <진진돌이>는 1962년 «학원»에 연재되었고, 1968년 연재 종료 후 1984년 «소년중앙» 3월호부터 다시 연재한다. 이로 인해 세대를 이어가며 정운경의 만화는 여러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정운경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를 아끼고 꾸준히 관리했다. 캐릭터를 둘러싼 그의 애정과 노력은 만화계에 중요한 판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1969년 1월 22일 정운경은 <왈순마>라는 라면을 출시한 롯데공업을 상대로 ‘왈순마 상표 사용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다. 2월 4일 서울민사지법 16부는 롯데공업의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다. 1975년 12월 17일에는 ‘또복이’라는 빵을 만들어 판매한 삼립식품에게도 승소판결을 받았다.


4. 종언과 작별 

나는 정운경 선생이 «중앙일보»를 떠나는 2002년 12월 24일자 «중앙일보»에 「내가 본 ‘왈순아지매’」(5) 라는 글을 기고했다. “鄭화백은 동물만화의 동심과 함께 진한 성적 상상력을 담은 성인만화 분야에서도 개척자로 평가된다. 주간중앙·주간경향 등 주간지에 연재된 ‘가불도사’는 박수동의 ‘고인돌’,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와 함께 70-80년대를 풍미한 캐릭터 중심의 성인만화로 꼽힌다. 그래서 ‘왈순 아지매’의 퇴장은 단순히 한 만화 캐릭터가 사라진다는 이상의 큰 아쉬움을 남긴다(6).” 라고 송별문을 썼다. 

정운경은 은퇴 이후에도 블로그(http:// blog.naver.com/tjburger/ ) ‘왈순 아지매’를 개설해 꾸준히 시사만화를 게시했다. 2018년 5월 23일까지 꾸준히 시사만화를 업데이트했지만, 건강 악화로 그 이후로 업데이트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2013년 1월부터 2018년 5월까지 한달에 20회 넘게 작품을 업데이트했지만 2023년 10월 20일 현재 방문 총계는 37,900회 정도에 그쳤다. 시사만화가 14,000여 편을 올렸으니 산술적으로 편당 27회 정도만 조회된 것이다.  

시사만화의 시대는 정운경 선생의 은퇴를 기점으로 서서히 독자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정운경 선생의 타계로 우리는 작별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왈순 아지매’, ’진진돌이’, ‘또복이’, ‘방울범’, ‘가불도사’를 기억한다. 1979년 신원문화사에서 출간한 단행본 <가불도사> 첫머리에 실린 소설가 이정항의 글을 인용하면서 작별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한다. 

“윗트와 파라독스, 픽 하고 웃음을 쏘아던지게 만드는 유머 제작자 정운경.” 


(1) 윤영옥(1986) 한국신문만화사 : 1909-1985, 열화당, p.150.

(2) 박석환(2013.8.2) 한국만화정전 : 왈순아지매, 정운경, 네이버,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6880&cid=59065&categoryId=59073 

(3) 이선미. (2009). 1950년대 젠더 인식의 보수화 과정과 ‘왈순아지매’ —『여원』 만화의 여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성문학연구, 21(21), 161-201.

(4) 김원. (2004). 근대화 시기 주변부 여성노동에 대한 담론 -'식모'(食母). 아시아여성연구, 43(1), 181-236. 

(5) 박인하(2002.12.24) 내가 본 ‘왈순아지매’,  «중앙일보», 종합19면,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4400769#home 

(6)  이 글에서 ‘왈순 아지매’가 1955년도에 데뷔했다고 적었는데, 당시 «여원»을 확인하지 못하고 다른 기사 검색에 의지한 오류다. <동물전쟁>의 작가를 ‘차형’으로 썼는데, <동물전쟁>의 작가는 ‘최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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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만화평론가, 서울웹툰아카데미(SWA) 이사장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
前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前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정책그룹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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