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즐거움을 파는 기념품 가게
굿즈의 본질은 쾌락
집안 정리를 하다 어느 서랍을 무심코 열어보니 마패가 하나 나온다. 탐관오리를 향해 “내 오라를 받으라”며 꾸짖는 암행어사가 품속에서 위풍당당하게 꺼내드는 그 마패 맞다.
그간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도 못하고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건만 다시 보니 마패를 처음 손에 쥐었던 그때가 엊그제처럼 금방 떠오른다. 국민학생 시절 수학여행 갔던 한국민속촌의 풍경, 누구의 기념품이 더 근사한지 친구들과 조잘거리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마패에 말 다섯 마리와 함께 6학년이던 그 시절의 내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기념품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물체다. 어딘가 구경 갔을 때 그곳의 광경, 경험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다. 진귀하거나 특별하지 않아도 좋다. 낯선 곳에서 ‘득템’한 무엇이든 기념품이 된다. 이런 감정은 그저 나만 느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김명철 심리학 박사는 주간지 시사인에 기고한 ‘여행지의 추억을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란 제목의 글(제446호)에서 “쇼핑은 여행의 기억을 보관하는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여행 중 구매하는 물건은 단순한 상품의 의미가 아니라 여행할 때의 감정과 기억이 찰싹 달라붙은 기념품으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란다.
그는 “여행지의 쇼핑은 여러 이유로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활동이다. 특히 기억을 촉진하는 기능과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능 등은 제품의 실용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행자들은 어떤 물건이 각 여행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고유한 물건인지에 더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찾아내서, 두고두고 여행을 추억하고 싶을 때 꺼내 보라”고 권한다.
그렇다. 기념품은 실용의 가치보다 기억을 떠올려 기분을 좋게 만드는 쾌락의 가치가 훨씬 큰 상품이다. 굿즈도 마찬가지다. 굿즈의 본질적 기능은 바로 즐거움이다.
굿즈를 얘기하기에 앞서 하나만 짚자. 굿즈(goods)는 일본식 영어 표현(재플리시, Japanese + English)이라고 한다. 보통 경제 분야에서 상품을 뜻하는 건데 일본에서 팬덤을 겨냥한 상품으로 통용된 말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영어권에서는 머천다이즈(merchandise)라 말하고 MD로 줄여 쓴다. 국립국어원은 굿즈를 팬상품으로 순화해 쓰라는데 뭔가 맛이 잘 살지 않는 느낌이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MD, 팬상품 대신 입에 착 붙는 굿즈라고 칭하겠다.
굿즈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성민 방송통신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가 브런치에 올린 ‘콘텐츠 IP 굿즈: 광고모델, 기념품, 혹은 판촉물’이란 제목의 글(2016년)을 보자.
이 교수는 IP 인지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굿즈의 용도를 기념품, 광고모델, 판촉물로 나눠 설명한다. 일단 IP 인기가 꽤 높으면 굿즈는 기념품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경험을 추억하기 위한 수단이다. 사람들은 직접 만질 수 있는 물건으로 중요한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고 기념한다. 이는 흘러가버리는 경험을 포착해 보관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맞닿아 있다. 이 교수는 “사람은 추억을 소비하고, 추억을 남기기 위해 굿즈를 산다”고 했다.
광고 모델로 쓰이는 굿즈는 식음료, 의류, 생활용품 등 라이선싱 상품이다. IP 인지도를 상품 판매에 활용하는 형태다. 또 IP 인지도를 높이려는 판촉물로 쓰기도 한다. 간단한 이벤트에 참여하면 경품으로 주거나 무상으로 나눠주는 상품이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굿즈하면 특별한 상품, 즉 기념품으로서의 굿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언제 어디서나 편의점에서 사 먹는 캐릭터 음료, 길에서 나눠주는 캐릭터 부채를 굿즈라 생각하진 않는다. 스타벅스에서 스탬프를 꽉꽉 채워야 받을 수 있는 그것, 팝업스토어에 일찍 줄을 서야 손에 넣을 수 있는 특별한 그것을 우리는 굿즈라 여긴다.
굿즈는 욕망을 분출하고 위안을 얻는 대상
굿즈의 전성시대를 활짝 열어젖힌 주인공은 재미와 즐거운 소비를 좇는 MZ세대다. 그들이 굿즈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무형의 콘텐츠나 대상을 직접 만질 수 있는 유형의 무엇으로 갖고 싶어 한다. 이에 공급자는 한정 기간, 한정 수량으로 애 타게 만들고 ‘이때 못 사면 기회는 없다’는 조바심은 소비자를 지배한다. 조바심이 커질수록 소유욕도 비례해 나타나는 현상이 오픈런이다.
MZ세대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개성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가치를 지향하는 소비를 즐긴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지만 자신의 만족을 위해, 그리고 관심을 받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리고 SNS로 자신과 소유물을 보여주면서 과감한 구매력을 ‘인증’하기도 한다. 남보다 특별하게 보이고자 하는 심리가 한정판 굿즈를 열심히 사들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소유욕과 과시욕이 맞닿은 지점에 굿즈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김용섭 트렌드 분석가가 제일기획 매거진에 쓴 '열쇠 없는 시대, 키링을 탐하는 이유'란 글(2023년 10월)에서 “욕망의 측면으로 보면 굿즈 소비는 합리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일리가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패션 브랜드의 옷을 사는 것보다 훨씬 적은 돈으로 굿즈를 사서 자신이 그 브랜드를 소유한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명품 브랜드 키링의 경우 예전부터 해당 브랜드를 값싸게 소유하는 방법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하지만 최근엔 패션 명품 브랜드 키링을 너머 다양한 분야로 키링의 인기가 확산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유명 아이돌 그룹, 심지어 스타벅스나 던킨도너츠 같은 F&B 브랜드가 만든 키링 등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다양한 키링을 소비한다”고 봤다.
굿즈는 이처럼 욕망을 채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서적 위안을 얻는 수단이기도 하다.
MZ세대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과 가심비(비용 대비 만족스러움의 정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굿즈를 찾는다. 취업이 어렵고, 월급이 적어 펑펑 쓸 수 있는 돈도 적은 현실에서 큰돈 들이지 않고 ‘지름’과 ‘탕진’의 심리적 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65만 원 쥐꼬리 월급 받는 중국 청년들…장난감 사는 씁쓸한 이유'란 제목의 머니투데이 기사(2024년 10월 28일)는 경기 불황에 굿즈를 찾는 젊은이들의 소비심리가 어떤지 대변한다.
기사는 “광범위한 침체를 겪고 있는 중국 내수소비 시장에서 이례적으로 급성장한 캐릭터 완구기업 팝마트의 실적을 두고 중국 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개혁개방 이래 상대적으로 가장 가난한 세대라는 중국 청년들이 감정적 해방구를 찾고 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면서 사회문제화 할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전한다.
내용을 추리면 이렇다. 역대 가장 큰 양극화에 노출됐고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데다 가처분 소득도 낮은 청년들이 장난감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비싸고 쓸모없는’ 팝마트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항저우 중국전자상거래연구센터 모 다이칭 수석분석가는 “중국 청년층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높은 압박 속에 살고 있다”며 “높은 감정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만큼 블라인드 박스나 기발한 액세서리 등을 통해 위안을 받거나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중국소비자협회도 5월에 낸 연례 소비자권리 보고서에서 "비용 효율성 추구 외에도 감정적 해방이 젊은 세대 소비자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팬덤이 작동하는 한 굿즈·팝업스토어는 불멸
이유가 어떻든 굿즈는 현재 잘 나가고 있다. 반짝 하고 사라지는 화제성과 한정성이란 성질을 공유한 팝업스토어와 만나 ‘완벽한 케미’를 뽐내며 급성장했고, 이제는 신규 고객을 끌어들이고 팬덤을 키우는 마케팅 도구로 확실히 자리 잡은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웹툰 분야도 예외일 수 없다. 작품의 감동을 간직하게 해주는 웹툰 굿즈는 그림과 스토리가 어우러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면서 팬심을 녹이고 있다.
전자책 서비스 기업 리디가 스타트업 전문 매체 플래텀에 기고한 '굿즈로 웹툰 덕후의 마음을 뒤흔드는 법'이란 글(2023년 3월)에 따르면 웹툰 굿즈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먼저 웹툰의 작화를 활용한 아크릴 무드등, 포토 카드, 키링, 폰 케이스 같은 이미지형 굿즈다. 가장 많이 만나볼 수 있는 품목 군이기도 하다. 이들 굿즈는 독자가 웹툰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인이자 웹툰이 가진 필살기인 작화를 가장 효과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여줘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스토리형 굿즈는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극중 인물이 소지한 사원증, 시계처럼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품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에 웹툰 캐릭터 소재의 이모티콘, 모바일 기기 배경화면으로 활용하는 무빙 포스터, 월별 달력 등의 디지털형 굿즈도 있다.
리디는 “잘 기획한 웹툰 굿즈는 단순한 상품이나 판촉물이 아닌, 작품과 팬을 잇는 매개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며 “웹툰 굿즈는 작품의 일부이자 작품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했다.
갈수록 다채로워지는 굿즈 만큼 웹툰 IP를 활용한 팝업스토어의 규모와 인기도 날로 커지고 있다.
2018년 10월 서울시 서대문구 현대백화점 신촌점 유플렉스에서 열린 유미의 세포들 팝업스토어를 시작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부터 본격화한 웹툰 팝업스토어는 이제 쇼핑몰과 백화점이 내세우는 주요 이벤트가 됐다. 젊은 층의 집객 효과가 높고 수수료 수입도 쏠쏠해 웹툰 팝업스토어를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네이버웹툰이 지난해 9월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서 연 툰 페스티벌 팝업스토어에는 2주간 6만 명이 다녀가 이곳에서 열린 팝업스토어 중 방문객 수 1위를 기록했다. 올 2월 타임스퀘어에서 연 '가비지타임' 팝업스토어는 이곳에서 열린 역대 팝업스토어 가운데 최고 매출액을 찍었다.
네이버웹툰에 따르면 지난해 스타필드 코엑스몰(6월 29일∼7월 12일) , 더현대 서울(9월 5∼17일),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11월 10∼23일)에서 열린 세 차례의 팝업스토어의 누적 방문객은 17만여 명을 기록했고 약 60만 개 이상의 상품이 팔렸으며 개인 최대 결제 금액은 116만 원에 달해 웹툰의 강력한 팬덤을 입증했다.
웹툰 팝업스토어는 해외로도 뻗어가고 있다. 그저 웹툰을 보는 것을 넘어 굿즈를 소유해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는 문화가 해외 팬덤을 파고들고 있다.
지난 1월 태국 방콕 MBK센터에서 열린 '아임 더 모스트 뷰티풀 카운트' 팝업스토어는 태국어로 라인웹툰을 서비스 중인 네이버웹툰이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처음 오픈한 팝업스토어였다. 약 2주간 열린 이 행사장에는 총 1만여 명이 찾았고, 특히 두 차례 열린 작가 사인회에는 2,000명이 몰려 뜨거운 인기를 과시했다.
웹툰 굿즈와 팝업스토어의 흥행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이는 독자들이 웹툰을 얼마나 많이 보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의 조사 지표를 보면 마냥 희망적으로만 볼 순 없을 것 같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내놓은 2024 만화산업 백서에 따르면 올해 웹툰을 유료 결제한 독자를 대상으로 월평균 지출액을 묻는 질문에 ‘1,000원∼3,000원 미만’이라고 답한 사람이 23.0%로 가장 많았고 ‘5,000원∼1만 원 미만’이 22.8%로 뒤를 이었다. 지난해에는 ‘5,000원∼1만 원 미만’이 25.3%로 1위, ‘1만∼3만 원 미만’이 19.8%로 2위를 차지한 것에 비하면 돈을 내고 보는 독자들의 소비 여력이 줄어든 양상이다. 만화·웹툰 관련 상품 구매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지난해 45.0%에서 올해 29.9%로 급감한 것도 웹툰 산업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는 사람이 줄었다고 웹툰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낙심할 필요는 없다. 시장의 흐름은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는 법 아니던가. 장르 편중화로 식상함을 느낀 독자들의 떠난 마음은 새로운 장르의 참신한 작품들이 얼마든지 되돌려 놓을 테니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듯 재미를 좇는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매년 수백 편씩 쏟아지는 작품 중에 인기작은 나올 테고, 팬덤이 작동하는 한 굿즈와 팝업스토어는 형태와 방식이 진화화면서 명맥을 이어갈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다만 차별화된 기획과 디자인으로 만든 신선하고 기발한 굿즈, 이토 준지 호러하우스 체험 전시 같이 오감을 만족시키는 즐길 거리로 놀이터를 채우지 않는다면 ‘식상함을 느낀 독자들의 떠난 마음’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벽에 붙인 그림 몇 장,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굿즈, 싸구려 경품 이벤트를 “세계관을 경험하고 몰입해 보면서 작품의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기회”라는 번지르르한 말로 잔뜩 포장해 그들을 언제까지나 붙잡아 놓을 순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