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출판만화로 알아보는 시대적 요구
0. 시대의 요구
2024년 전 세계가 주목하는 미국 대선이 마무리되었다. 공화당 측 인물이 손쉽게 당선되었고(행여나 있을 논란을 위해 이름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다.) 미국은 다시 국가주의 및 청교도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것이 시대의 역행인지 혹은 원래 흘러가야 할 방향성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간은 나아가고 있다. 무역, 난민, 동성애, 전쟁을 포함한 국가 분쟁 등 세계의 모든 정치적 쟁점에서 세계는 변화할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발생한 이후 세계는 약자를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약자를 도우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사회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양보하는 것에 대한 비난과 빼앗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논리가 뒤섞여 현실은 어지러워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는 약자들을 위한 방출구이며 현대에 맞는 이야기는 더 없이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4 우수만화 50선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선정하기보다는 대중들이 읽어볼 만한 만화를 선정하는데 중점이 놓여있다. 현재 출판만화 중에서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나오는 것이 있다. 시대의 요구는 단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놓는 것이다. 만화는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문학적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위상이 올라가 있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를 가진 작품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진주 찾기와 같다. 해외는 그래픽노블이 대세라면 한국은 웹툰이 대세라고 할 수 있는데, 수많은 웹툰의 홍수 속에서 좋은 작품을 골라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24년 상반기 기준 유통되고 있는 웹툰만 약 10,000작품이며, 웹툰 플랫폼만 34개에 달한다.(2024년 상반기 만화웹툰유통통계 자료, 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4) 이것도 유통되는 기준일뿐 매년 75%의 작품이 신작이라고 하니, 다시 말해 매년 7500건 정도의 작품이 새로 나오는 것이다. 매년 7500개를 검토할 수는 없으니 독자에게는 전문가가 골라주는 작품이 필요하다. 단행본으로도 약 2000권정도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상당수를 웹툰이 차지하고 있고 웹툰의 인기에 힘입어 단행본으로 출판되는 경우가 많으니, 웹툰에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문가는 독자에게 필요한 작품을 골라주고 좋은 작품들이 더 많이 읽힘으로써 만화의 전체적인 수준이 더 올라간다는 점에서 우수만화를 고르는 것은 선순환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2024년 상반기 만화·웹툰 유통 수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고른 작품들은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있을까? 여러 전문가들이 고르기에 경향성이 안보일 수도 있지만 흥미롭게도 우수만화 50선 중 국내 29개의 작품에서 어떤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약자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다. 29작품 중 아동을 위한 6작품을 제외하면 총 23작품 정도가 일반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중 11작품이 돌봄 노동, 장애, 가난, 여성 등 약자에 대한 작품이었다. 나머지 12작품은 미술, 로맨스, 현실 판타지 정도가 차지했다. <살아남은 로맨스>, <몽롱한 빛>, <마루는 강쥐>, <루의 실패>와 같이 개인적이고 트랜디하던 2023 우수만화50선과는 또 다른 결이 보인다.
1. 약자의 시대
약자에 대한 작품은 <생각보다 잘 자랐습니다>, <소요>, <괜찮아요 우리는 천천히가족>, <노인의 꿈> 등이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며 전문가들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특징을 알아보자. 가장 첫 번째 특징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인 그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일상에 가까운 단순한 그림체들이 특징인데,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 단순해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의 그림체와 대조적이라고 느낄 정도다. 그렇다고 못 그리는 것은 아니다. <노인의 꿈> 같은 경우에는, 핵심 주제가 미술이기도 하며, 단순한 인물에 비해 배경은 충실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기타 다른 작품들도 인물이 단순하게 묘사된 것에 비해 배경은 항상 충실하게 묘사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그림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들의 생각과 대화가 중점이 되는 이야기이므로, 그림에 주목하게 하는 것은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효과음은 인물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이야기에 충실하기 위해서 만화의 효과를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것은 퍽 그래픽노블처럼 보인다. 이러한 과정들의 목적에는 작품의 주제가 자리한다. 어떤 이야기는 주제로 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향해 주제로 간다는 것은, 이야기에 목적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마치 문학처럼 느껴진다. 최근 유행하는 작가인 한강뿐만 아니라 최은영이나 김애란 같은 드라마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부터 천선란, 김초엽, 정세랑 같은 SF 작가까지 최근 문학 경향도 어떤 주제를 말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자의 입장에서 써지는 문학이 늘어나고 있다. 약자를 향한 이야기가 아닌 약자의 이야기, 그것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해결이 아닌 현실에서의 이야기가 늘고 있는 것은 만화가 하나의 욕구 분출이나 현실에서의 탈출구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가 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약자는 약자 그대로 존재한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과정은 힘든 길이지만 만화들이 그런 힘든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이야기에 매체라는 국경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품들이 우수만화에 반영된다는 것은 더 이상 만화가 대중문화가 아닌 순수문학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고 나아가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그런 작품들이 선정되면서 우리는 여러 방식으로 문학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의 꿈>에선 자식들에게 기대지 못하고 본인 스스로의 힘으로 자화상을 그리는 노인이, 재혼 가정에서 눈치를 봐야 하는 자녀가 있다. <생각보다 잘 자랐습니다>와 <랑자이야기>에선 술로 인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자녀가 있다. 자폐아를 다룬 <괜찮아요 우리는 천천히가족>과 같은 작품을 포함하면 약자 중에서도 가족에 대한 작품이 꽤 있다. 개인의 아픔을 다루는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인 이야기도 많아지면서 만화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아닌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 자신의 상처를 말하는 방식이 말에서 글자로, 글자에서 만화로 넘어간다면, 추후에는 AI와 같은 기술을 통해 영화로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느껴진다.
누구나 아픔을 가질 수 있다. 상처는 과거고 아픔은 그 상처로 인해 아직까지도 느껴지는 현재의 고통이다. 그리고 어떤 아픔, 많은 아픔은 공유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풀려나간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그것은 억압이 아닌 하나의 고백이 되고, 고백으로 인해 약자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만 표현할 줄조차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억압된 약자다. 아픔의 고백은 모든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별했을 때,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아픔은 뱉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아픔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정신질환자는 끊임없이 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힐링 자기계발서 같은 도서들도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다.(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110801032012000003) 개인의 상처가 깊어지고 파편화된 개인이 위로받을 수 있는 사회는 희미해지면서 개인은 각자 연대할 방법을 찾아나가야 하는 위로의 각자도생에 놓여있다. 이전과 달리 상담이 생활적으로 힘든 정신적 질환을 앓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는 것에도 관용적이게 되면서 트라우마에 관한 관심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상담받는 것에 대한 장벽은 높다. 트라우마는 숨겨야 하는 것처럼 취급된다.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다른 사람이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인터넷 공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익명의 공간이어서 다른 사람을 상처 주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그만큼 위로받고 싶다는 의미다. 그런 문학 같은 작품들이 점점 SNS나 포스타입과 같은 개인 연재처에 쏟아지고 있고 이러한 것들이 우수만화로 선정되면서 개인의 아픔을 말하는 작품들이 가치 있는 만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왼쪽부터 <노인의 꿈>, <생각보다 잘 자랐습니다>
2. 여전히 선정되는 만화다운 만화
약자를 위한 작품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화다운, 재미있는 만화도 꾸준히 선정되고 있다. 특히 로맨스와 코미디는 대중문화로써 빠질 수 없는 장르다. 다만 이러한 코믹스도 약간 흐름이 달라지고 있는데, 2023 우수만화에서는 <마루는 강쥐> 이외의 코미디 장르를 찾아보기 힘든 반면, 2024에서는 <조조코믹스>나 <환골탈태>, <여고생 드래곤>, <호랑이 들어와요>와 같은 귀여움을 가미한 코미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위의 코미디 장르의 작품들은 몇 년 간의 연재 끝에 성황리에 완결이 났거나 아직까지 연재하고 있는 오래된 작품들이다. 연재를 오래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고 수요가 있다는 보증이기도 하다.
△ 왼쪽부터 <조조코믹스>, <여고생 드래곤>
4년간 롱런하고 있는 <조조코믹스>는 전작인 <유미의 세포> 때와 마찬가지로 인물 내부의 감정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흔히 말하는 ‘썸’의 복잡한 심리 상태를 긴박하게 풀어낸다. 애매하고 복잡한 현대의 인간관계를 재치 있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고생 드래곤>은 평범한 여고생 민지와 드래곤의 영혼이 뒤바뀐 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드래곤의 몸에 들어간 민지가 몸과 맞지 않는 행동이 언밸런스해 재밌다면 민지에 몸에 들어간 드래곤 또한 몸과 맞지 않는 진지한 로맨스가 재미있다. 메인 스토리가 드래곤 몸에 들어간 민지임에도 불구하고 드래곤이 더 인기가 많았는데, 진지함과 그에 맞지 않는 주변의 인식은 언제나 재밌을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이두나>나 <이제 곧 죽습니다>와 같이 드라마화된 작품들도 선정이 되었는데, 대중적인 취향 또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현상학과 예술』에서 회화와 언어는 다르지 않으며, 이 둘의 그림과 시는 결국 의사소통이기에 작품은 끊임없는 의사소통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재창조 과정이라고 말한다.(모리스 메를로 퐁티, 오병남 옮김,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1983.) 특히 작가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재창조를 강조하는데, 내면의 이야기는 오로지 자신의 것이므로 작가만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체가 뛰어나지 않더라도 이야기에 작가가 녹아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이 늘어나는 것은 만화가 대중적이게 되면서 독자가 늘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도 늘어나면서 생기는 좋은 현상이다.
2024 우수만화 50선은 여러 전문가가 선정하는 것이기에 전문가들의 취향이 전부 같을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많은 전문가들이 문학 같은 작품을 선정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우수만화’라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에도 있다는 점. 그렇게 내면을 고백하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아픔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문학 같은 작품들이 앞으로 더 많이 출판되어 더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