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만화50선으로 본 2024년도 해외 출판 만화 경향
21세기가 시작된 지 어느새 23년이 지났다.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것들이 발전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며 바뀌었고, 이는 만화 시장 또한 마찬가지다. 국내 해외 가릴 것 없이 장르부터 작품의 형태 등 많은 것이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 나온 2024 우수만화 도서 50선은 한국 만화 30개와 해외 만화 20개가 선정되었다. 2022년 우수만화 도서 50권에서 해외 만화가 14개, 2023년에는 12개가 선정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가 꽤 늘었다. 더 많은 만화가 선정된 만큼, 해외 만화 시장 흐름의 변화를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더 많은 국가의 작품, 더 다양한 장르가 선정되다.
2024년엔 저번보다 더 많은 해외 작품이 선정된 것 외에도, 더 다양한 국가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2023년에는 일본과 미국,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이렇게 4개 국가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번엔 일본과 미국, 스위스, 독일, 영국, 대만, 캐나다, 그리고 네덜란드 이렇게 8개 국가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 중 일본 작품이 9개로 가장 많았고, 영국 작품이 3개, 미국이 2개, 그리고 남은 스위스와 독일, 대만, 캐나다, 네덜란드에서 각각 1개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이젠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 세계화가 진행되어 다른 국가의 작품들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 체감된다.
장르 쪽으로 보았을 때도, 지난해보다 더 다양하게 선정되었다. 특히 지난해엔 해외 작품에서 선정되지 않은 장르들이 나온 것이 눈에 뜨인다.
일본의 경우 현재 가장 유행하는 장르가 이세계 판타지이다. 그럼에도 이세계 판타지 장르가 선정되지 않고, 현대에서 판타지 이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판타지 세계에서 진행되는 정통 판타지 작품이 3개 선정됐다. 정통 판타지는 아니지만 <히카루가 죽은 여름>은 현대 호러 판타지 장르의 만화라는 점을 감안하면 판타지 만화는 총 4개가 선정되었다.
<벌새>와 <동경일일>, <곱슬곱슬 이대로가 좋아>, <괜찮아 나탈리>, 그리고 <남과 달라도 괜찮아> 이렇게 드라마 작품은 5개가 선정되었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깊게 인생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가 이목을 끈다.
역사를 다룬 작품 또한 5개나 되는데, 그것도 대만과 일본, 독일, 캐나다, 그리고 노르웨이 이렇게 다양한 국가의 작품들로 선정되었다. 그러면서도 자국의 역사를 다룬 작품은 대만에서 만들어진 <대만의 소년> 한 작품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자국 역사가 아닌 다른 나라 역사를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일본의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그리고 캐나다의 제작한 <육식, 노예제, 성별위계를 거부한 생태적 저항의 화신, 벤저민 레이>는 영국 인물 윌리엄 댐피어와 벤저민 레이의 일대기를, 독일의 <최은희와 괴물들>은 우리나라와 북한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을, 네덜란드의 <철학자, 강아지, 결혼>은 고대 그리스의 여성 철학자 히파르키아의 일생을 다루었다.
로맨스 장르의 경우 <결혼한다는 게, 정말인가요>와 <스킵과 로퍼>, 그리고 <하트스토퍼> 이렇게 3 작품이 선정됐다. 각각 결혼을 앞둔 커플, 고등학생 남녀 사이의 우정 속에서 조금씩 싹트는 사랑, 그리고 동성애자 남고생 두 명 사이의 사랑을 다뤘는데, 같은 로맨스 장르면서도 모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 외엔 고전 SF 명작 소설인 <멋진 신세계>의 그래픽 노블 버전과, 사람의 감정을 읽고 반응하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친구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미우라 씨의 친구> 이렇게 SF 작품이 2개, 격투게임을 즐기는 여고생을 다룬 코미디 만화 <대전 감사합니다>가 선정되었다.
만화 강국이라 불리는 일본과 미국 외에 다양한 국가에서 선정됐고, 우리가 자주 접하지는 않는, 만화 쪽으로는 다소 생소한 국가인 네덜란드나 스위스 등의 국가에서도 선정되었다. 만화 시장은 점점 커져가고, 여러 나라에서 자기 나라의 작품을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지금, 우리는 더 다양한 만화를 접하게 되었다.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은 있을지 없을지, 매번 서점과 도서관을 찾을 때 마다 기대되게 한다.
만화의 영상화, 그리고 OTT 시장의 확대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등 여러 OTT 시장이 커지면서 서로 자신들 만의 컨텐츠를 만들기 시작했고, 아예 오리지널 컨텐츠보다 원작이 있는 컨텐츠를 사람들이 더 선호하다 보니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도 많이 만들어지게 됐다. 이번 선정작에서도 이런 영상화된, 혹은 영상화될 예정인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2024년 10월 기준, 선정작 중 총 5개의 작품이 영상화됐다. 이 중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작품이 <던전밥>(애니메이션화)과 <하트 스토퍼>(실사 드라마화)로 두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는데, 인기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트리거에서 제작한 던전밥 애니메이션은 인기에 힘입어 시즌2가 제작될 예정이고, 2022년 4월 실사 드라마가 공개 되었던 하트 스토퍼는 올해 10월에 시즌3가 공개되었다. <장송의 프리렌>은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면서 많은 호평을 받아 시즌2가 예정됐고, <스킵과 로퍼>는 2023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공개, <결혼한다는 게, 정말인가요>는 2024년 10월에 애니메이션 방영을 시작했다. <대전 감사합니다>는 일본 한정 OTT인 Lemino를 통해 실사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앞서 말한 시즌2가 예정된 두 작품을 제외한, 영상화가 예정된 작품은 <고깔모자의 아틀리에>, <히카루가 죽은 여름>, 그리고 <대전 감사합니다> 이렇게 3개 작품으로,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대전 감사합니다>가 드라마화되고 애니메이션도 제작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OTT 등으로 영상매체 시장이 점점 커가는 현재, 만화는 여러 영상매체로 나아갈 길을 걷고 있다. 막 나와서 인기를 얻은 작품도, 과거부터 꾸준히 연재되면서 인기를 얻은 작품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면 영상화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만화를 단순히 읽는 시대에서 벗어나, 만화를 감상하고 듣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체성을 다루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성별에 대해, 성향에 대해, 인종에 대해, 신체적 특성에 대해, 취향에 대해 등등 여러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때로는 이런 많은 정체성 속에, 혹은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거나 숨기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2020년대 들어 자주 나오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이에 대한 법적 또는 사회적인 차별을 금지하고 막자는 얘기가 나오고,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들의 시선을 위해 갖춘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갖춘 나다운 나를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아예 사회 운동으로까지 뻗어 나가고 있다.
만화계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볼 수가 있다. 기존에 선정되었던 우수만화 50선 중에서는 물론이고, 이번에 선정된 해외 작품 중에서도 이러한 정체성을 다룬 작품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곱슬곱슬 이대로가 좋아>는 주인공 마를린이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 때문에 여러 갈등을 겪지만, 그러면서 점차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여주길 원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철학자, 강아지, 결혼>은 고대 그리스 당시 사회적 억압으로 제대로 된 철학 활동을 하지 못했던 히파르키아의 일대기를 다루면서, 먼 과거에도 있었던 편견과 선입견을 다루었다. <남과 달라도 괜찮아>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으면서 다른 사람과 다소 다른 행동을 보이는, 그렇다 해서 그게 나쁜 것은 아닌 삶을 보여준다.
퀴어적인 면에서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다. <하트스토퍼>는 게이 고등학생 두 명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히카루가 죽은 여름>은 처음엔 작가가 BL(Boys Love)로 시작한 작품인 만큼 다소 동성애적 색채를 띄고 있다. <대전 감사합니다>는 ‘~숙녀는 격투 게임을 안해요~’라는 부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인 시선 속에 격투 게임이라는 취미를 숨기고 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들 사이에서 조금씩 싹트는 사랑을 그려냈다.
살아가면서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골라가며 만날 순 없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여러 사람과 만나면서 그들에 맞춰가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만들어지는 내 성향과 취향, 태어나면서 혹은 살면서 겪은 일로 인해 만들어진 신체적 정신적 차이는 남들 눈에 띄기 부끄럽거나, 편견 등의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이를 숨기고 살아가는 경우가 잦다. 이런 만화들은 그러한 것들을 더는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말하고 있다. 단 한 번만 사는 삶 속에서 남들을 위해서 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진정한 나 자신을 부끄럼 없이 남들에게 보여주자.
웹툰, 웹코믹의 성장
지금까지 우수만화 50선에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 웹툰 단행본이 많이 선정되어온 것에 반해, 해외 작품 중에선 지금까지 웹 연재 작품이 선정된 경우는 2022년의 <스파이 패밀리>(소년점프 + 연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엔 웹으로 연재되는 작품이 2개나 선정됐다. 텀블러와 픽코마, 그리고 Webtoon을 통해 연재되고 있는 <하트스토퍼>, 그리고 영에이스 UP을 통해 웹 연재되는 <히카루가 죽은 여름>이다.
신문이나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에 실린 채 나오던 만화가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시장에서, 점차 인터넷으로 연재되다가 정기적으로 단행본이 출간되는 세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국 만화가 국내 만화 잡지 시장이 침체 된 이후 웹툰으로 다시 살아났듯이, 외국에서도 점차 웹 연재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웹 연재 시장 비율을 아직은 크다고 말하긴 힘들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에 선정된 웹 연재 작품은 2개 외엔 없다. 다른 해외 만화 18개는 단행본으로만 나오거나, 잡지에서 연재되던 작품이 단행본으로 나온 케이스다. 종이 연재의 역사가 긴 만큼 그러한 출간 방식의 작품이 갑자기 줄어들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웹 연재 시장이 더 커질 일이 없다 말하기도 힘들다. 텀블러에서 연재되다 사람들의 눈에 띄어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최근 애니메이션도 나온 <니모나>, 아이스너상과 하비상, 그리고 링고상 등 각종 만화상을 계속해서 수상한 <로어 올림푸스>에서 보듯이 외국의 웹 만화 시장은 점차 커져가고 있다. 국내에서도 픽코마나 Webtoon, 타파스 등으로 해외에 국내 웹툰 형식을 진출하려는 현재, 웹 연재 시장은 더 크게 발전해 나갈 가능성이 무한히 존재한다.
또 한가지 특징은 이러한 웹 연재 작품들이 아직까진 종이에 그리던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점이다. 2022년에 선정된 <스파이 패밀리>부터 올해에 선정된 <하트스토퍼>와 <히카루가 죽은 여름>의 경우 기존의 만화가 그랬듯이 원고지에 그려지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하트스토퍼는 좀 더 국내 웹툰의 세로 스크롤 방식에 가깝긴 하나, 칸마다 적혀져 있는 페이지 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반 원고지 크기의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다. 지금까지 해외의 웹 연재 작품이 3개나 우수만화 50선으로 선정되었으나, 한국 특유의 세로 스크롤 형식을 모방한 웹 연재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언어가 나라별로 다르듯이, 만화의 연출 기법 또한 나라별로 다르다. 그러한 연출 기법은 다른 나라의 연출 기법과 섞였을 때 기발한 기법이 나오곤 한다. 우리나라 웹툰이 해외에서 잘 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이런 웹툰 기법의 영향을 받은 해외의 세로 스크롤 형식 만화가 언젠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무리 지으며
2019년부터 매년 뽑아온 우수만화, 이번에는 유독 많은 해외 작품이 선정된 만큼 그동안 해외 만화계에 어떠한 변화가 흐르고 있는지, 트렌드는 무엇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때로는 변하는 게 너무 커서 시장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단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런 흐름에 점차 적응해 나가고 더 많은 작품을 받아들이면, 우린 더 많은 우수만화들을 볼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만화가 배울 수 있는 좋은 점은 무엇인지, 역으로 해외에 가르쳐줄 우리 만화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서로가 서로를 토대로 발전해 나가는 만화계에서 이런 점은 좀 더 생각해 볼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