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미국 만화상: 퀴어 우정/애정 여행기 <로밍>이 휩쓸다
2024년 미국의 주요 만화상은 싱겁게도, 하나의 작품이 그야말로 천하통일을 했다. <로밍>(질리안 타마키 / 마리코 타마키 공저)이라는 작품으로, 미국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며 업계 종사자들의 투표로 뽑히는 아이스너상에서 단행본 (‘그래픽 앨범’) 부문, 글작가상, 그림작가상을 모두 휩쓸었다. 책으로서의 작품 완성도를 중심으로 보는 일종의 문예상에 가까운 하비상에서도 이 작품이 올해의 도서상과 청소년 최우수 도서상을 수상했고, 심지어 인디출판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그나츠상에서조차 최우수 그래픽노블상을 받았다. 즉 주류업계의 인정, 문예적 완성도, 작가주의적 고집까지 모두 인정받은 셈이다.
△ 로밍 표지
<로밍>은 2009년을 무대로 캐나다의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이하여 대도시 뉴욕에 여행을 다니는 이야기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친구 다니와 조이, 그리고 다니가 데려온 새 친구 피오나. 여행하다가 사이가 틀어지기 딱 좋은 삼인방 구도 속에서, 조이와 피오나 사이에 로맨스가 싹트며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이 작품은 섬세한 감정선, 사실성 넘치는 현장감, 그것을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한 부드러운 선화가 아우러지며 출간과 함께 큰 호평을 받은 바 있었고, 이름에서 드러나듯 세 명 모두 여성이다보니 동성애 혐오를 즐기는 뭇 우익단체들이 도서관에 금서로 지정하고자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 로밍 중
<로밍>이 각종 상에서 얻어낸 성과는, 오늘날 미국 만화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잘 드러내주는 감이 있다. 마블 영화를 필두로 다시금 부각된 슈퍼히어로 피로감에 대해, 원본 매체인 만화에서 다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만화 안에서도 청소년 대상의 성장물이 레이나 탈게마이어 등의 작품으로 대중적 성과가 상당히 쌓여있는데, 한층 더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무언가가 나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안그래도 큰 선거 국면을 맞이하며 극우적 억압을 내세우는 세력이 떵떵거리는 판에서, 성적 지향 같은 당연히 존재하는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속깊음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말이다. 모든 조건을 맞추고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 나와주었고, 만화계는 이것을 2024년 미국 만화의 얼굴로 추대했다.
또다른 패턴은, 만화의 창작 문화를 회고하는만화의 부각이다. 아이스너에서 미니시리즈상을 수상한 피피푸푸(캐롤라인 캐시)는 60년대 미국 언더그라운드 만화계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그림체 또한 당대의 거친 스타일을 오마주했다. 아시아 만화 번역서 부문을 수상한 <내 그림 일기>(후지와라 마키) 또한, 일본의 전설적 대안만화가인 츠게 요시하루의 부인인 작가가 가족의 일상을 그림일기 형식의 만화로 풀어낸 작품이다. 이그나츠상에서 모음집상을 얻은 <펄핑>(펄핑 조합 공저) 또한 아예 ‘만화에 관한 만화’를 부제로 달고 있을 정도다. 창작 환경 자체를 돌아보는 작품은 어느 정도 원숙한 매체에서는늘 나오곤 하지만, 여러 부문에서 그런 작품들이 주목을 받는다면 만화계 전반의 어떤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산업으로서의 만화라기보다, 문화적 창작으로서의 만화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 말이다.
△ 펄핑 표지
그 외의 미국 바깥 만화나 웹만화 같은 경우는 무난하게 최근 수년간의 기조가 이어졌다. 아니 기조가 아니라 아예 작품이 그대로 이어졌는데, 아이스너의 국제만화상은 <블랙새드>(후안 디아즈 카날레스, 후안호 과르니도 공저)의 신작에 돌아갔고, 웹만화 부문은 또다시 <로어 올림푸스 >(레이첼 스마이스 / 웹툰 연재)에게 돌아갔다. 고무할만한 지점은 웹만화 후보작 다수가 한국 기업과 연결된 웹툰과 타파스에서 배출했다는 것인데, 그만큼 디지털 분야에서의 주류적 입지가 탄탄한 상태다. 하비상의 경우는 미국 바깥의 해외 작품상으로 <던전밥>(쿠이 료코)를 뽑았는데, 올해 완결되면서 마침내 만화 자체가 완성도를 제대로 인정받은 감이 있다.
△ 출처 짐 리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jimlee/p/C98RyTZyMQL/?img_index=1)
이외에도 아이스너와 하비는 만화 명예의 전당에 작가들을 등극시키곤 하는데, 한국계 스타 만화가이자 DC코믹스의 창작 총책임자인 짐 리가 마침내 올라갔다. 한편 하비에서는 올해 세상을 뜬 토리야마 아키라가 올라가며, 점점 더 공고해지는 <드래곤볼>의 미국에서의 문화적 영향력을 증명해주었다.
한편, 미국 주류 만화산업을 지탱하는 ‘이슈’ 제본 단위의 슈퍼히어로 위주 장르만화는 수상 분야가 매우 좁은 편이었다. 아이스너상에서 최우수 이슈상으로 <나이트윙 #105호>가, 장기연재 최우수작으로 <트랜스포머즈>가 탔을 따름이다. 모음집상도 마블이나 아미지 같은 업체의 장르 작품 후보들을 제치고, 시사성 높은 <우크라이나를 위한 만화>가 탔다. 흔히 그쪽 작품이 수상하곤 하는 그래픽앨범 재출간상 또한 DC의 <원더우먼 히스토리아: 아마조네스들>이, 스트리트 음악 문화를 다룬 <힙합 패밀리 트리>와 상을 나눠야 했다. 마치 미국 대중 음악에서 락앤롤이 오랫동안 군림했지만 최근 십수년간 재밌는 사운드는 힙합으로 넘어간 상태이듯이, 미국 만화 역시 산업으로서의 크기와는 별개로 만화로서의 흥미로움은 슬슬 슈퍼히어로의 담장 바깥에서 더 커지고 있는 흐름을 반영하는 단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다만 만화 학술상을 수상한 <클레어몬트 작가 시절: 엑스멘의 성 역할 전복>이나 만화 관련 단행본상의 <내가 법이다: 저지 드레드는 어떻게 우리 미래를 예견했는가>에서 보듯, 만화의 사회적 문화에 관한 접근은 여전히 주류 슈퍼히어로 장르를 중심으로 놓은 것에 초점이 유지되고 있다.
작품성에 대한 부침과 별개로, 여전히 시장 측면에서는 주류 슈퍼히어로물의 몸집이 크다. 하비상을 발표하는 뉴욕 코믹콘에서는, 미국 만화 업계 시장 현황을 가장 근사치로 추정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ICv2의 백서도 발표된다. 2024년의 경우, 예년 대비로 우선 다이렉트 마켓 (만화 전문점 위주의 직접 판매망)이 11.7% 성장했고, 단행본 일반 유통 역시 5.7% 늘었다는 추산이 보고되었다. 마블이 얼티메이트 라인을 집중 투자하고 엑스멘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되살리며 이뤄낸 성과인데, 이것은 흥미롭게도 영화 제작 쪽에서 판권이 정리되며 <데드풀3> 등 마블 주도의 엑스멘에 대한 기대가 불거진 덕으로 보고 있다. 한편 DC코믹스는 기존 이슈보다 작은 판형인 (6*9인치) “컴팩트 코믹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시키며 시장을 성장시켰다. 나아가 TV 시리즈로 인기를 얻은 <더보이즈>, <인빈시블> 등이 만화 원작의 판매를 다시 견인하고, 웹툰 단행본 역시 온라인 상에서의 인기를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꼽았다.
종합적으로, 2024년 미국만화상들이 보여준 모습은 슈퍼히어로 장르 오락물의 축복이자 굴레를 자연스럽게 벗어내고, 속 깊게 시대와 호흡하는 매체로서의 만화를 다들 이미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자연스레 과시한 자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디지털에서 이미 주도세를 붙잡은 한국식 연재 플랫폼에서도 이런 흐름을 잘 받아들여서, 더 폭넓고 섬세한 작품들을 발굴하고 밀어주는 전략이 필요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