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하는 것이냐, 해체되는 것이냐: 대중문화 상품으로서 가챠에 대하여
가챠는 어떻게 라부부를 2억으로 만들었을까
한국뿐 아니라 글로벌 단위에서도 ‘가챠(Gacha, がちゃ)’는 IP 비즈니스를 B2B에서 B2C(혹은 D2C)로 전환하기 위해 판매 채널을 소매 사업으로 확장할 때 반드시 검토하는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았다. 가령, 1세대 한정판 리셀 가격이 한때 2억 원을 넘기며 단순한 인형이 아닌 미들레인지 럭셔리로 자리 잡은 팝마트의 라부부 IP 역시 가챠와 원리가 동일한 랜덤 박스 소매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팝마트의 랜덤 박스 소매 전략은 라부부를 미들레인지 럭셔리로 포지셔닝하게 만든 성공적인 가챠 활용 케이스 중 하나로서, 그 과정을 주의 깊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캐릭터 하나로 전개된 IP 비즈니스의 전략 활용 사례 톺아보는 일은 만화 시장의 사정과 다소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전략 케이스를 톺아보는 일은 그 전략이 어떤 환경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전개되는지 파악하려는 노력일 뿐만 아니라, 전략에 대한 평가를 넘어 인간의 행동 양식과 선택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조망을 제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이다.

[사진1] 리사가 봄부터 업로드하기 시작한 인스타그램 스토리 사례
(출처: Reddit – r/popculturechat)
라부부가 미들레인지 럭셔리로 자리 잡기까지, 팝마트는 라부부 피규어를 마치 패션 아이템처럼 마케팅했다. 2024년 봄부터 블랙핑크의 리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피드에 라부부를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이는 레딧을 비롯한 대형 커뮤니티의 많은 유저가 리사가 라부부의 오가닉 팬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리사는 실제로도 라부부의 오가닉 팬일 수는 있다. 하지만 리사가 자신이 라부부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점을 자랑하기 위해 인스타그램 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한 관점이다. 리사의 인스타그램 활동은 블랙핑크 그룹의 수익사업, 나아가 블랙핑크의 소속사인 YG 엔터테인먼트가 전개하고 있는 수익사업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추측을 근거하는 직간접적 배경은 다양하다.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배경을 한가지 뽑아보자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활발하게 현직으로 활동하며 소속사와 유무형의 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글로벌 셀럽이 순수하게 상품에 대한 애정을 밝히거나 자랑하기 위해 소셜 서비스 피드를 사적으로 활용하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깝다. 관심 시장의 최전방에 나와 있는 글로벌 셀럽의 소셜 서비스 피드는 대중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홍보 채널이라는 점에서 리사가 소속되어 있는 YG엔터테인먼트 측의 전략 자산에 가깝다.
따라서 리사의 라부부 인스타 스토리 업로드는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자랑하는 행위와 같은 소비 행동의 일환이라기보단, 차라리 투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셀럽의 소셜서비스 포스팅 가격을 추정하는 데이터 분석 기업 ‘호퍼 HQ’에 따르면, 2024년 이후 리사의 인스타그램 광고 포스팅 가격은 8억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는 2023년 동일한 환경에서 3억으로 추정된 리사의 인스타그램 광고 포스팅 추정가에서 약 165% 상승한 것이다2. 팝마트가 리사에게 인스타그램 광고 포스팅을 의뢰한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팝마트와 리사는 윈윈관계로서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라부부가 리사의 인기에 편승하여 IP 가치를 급상승시켰다는 점이 아니다. 우리는 팝마트와 리사가 소셜 서비스를 지렛대 삼아 트래픽을 공유하여 자신들의 교환 가치를 동기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이 시너지를 일으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시너지는 IP 비즈니스가 내세우는 캐릭터 그 자체의 교환 가치보다 무언가를 공유하는 행위 그 자체의 교환 가치가 훨씬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챠와 포스팅이 공유하는, 즉각적 행위성
여기까지만 소개하면 팝마트의 랜덤 박스 소매 전략은 패션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셀럽과의 제휴 마케팅 벤치마킹을 통해 견인된 하위 전략으로 보일 수 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가챠 전략 자체가 IP 비즈니스의 확장 전략이라는 점에서 모객 전략보다는 비즈니스의 지속을 위한 전략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가챠를 ‘통해’ IP가 유명해지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나 아주 드물다. 그러나 가챠라는 판매 채널의 영향력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마이크로 브랜드였던 IP가 가챠 시장을 통해 럭셔리로 포지셔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즉, 제품과 소비자 사이를 채워나가는 유통의 관점에서 가챠는 매우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가챠는 서서히 그 행위 자체로 소비자에게 의미 있는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반다이 남코의 자회사이자 반다이 남코의 가챠의 북미 시장 전개를 운영하고 있는 해피넷(Happynet)의 조사에 따르면, 가챠의 주 고객인 15세 미만의 고객층에서 가챠의 매력에 관한 질문에 남녀가 각각 ‘기계를 돌리는 즐거움(何が出るかかわらないドキドキ感)’에 대해 35.8%, 38.9%로 구매 동기의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3.

[사진2]「캡슐 토이 수요 실태 조사」 중 캡슐토이 구매 동기 관련 설문
(출처: 東京新聞)
설문 결과에 대해 우리는 가챠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중심에 앞에서 이야기했던 캐릭터 자체의 교환 가치보다 포스팅하는 행위 그 자체의 교환 가치가 더 크다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캐릭터와 포스팅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시장에서의 두 개념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시장에서 캐릭터의 물성은 작가가 창작한 일종의 관념을, 작가의 권위를 바탕으로 물질화하여 소유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여 물성을 가지게 된 경우를 가리킨다. 그리고 포스팅 행위의 즉각성이란 커뮤니티의 유저가 사진이나 글 등으로 고정한 순간이나 생각을 공적 장소에 개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시장에서 캐릭터는 물성을 거쳐 평가받고, 포스팅은 행위로 평가받는다. 이에 따라 캐릭터와 포스팅을 비교하는 것은 물성과 행위를 비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성은 부서지기 쉬울지언정 원리적으로는 외력이 없는 한 고정된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행위는 연속될지언정 특정한 순간에만 현현된다는 점에서 즉각성을 내재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가챠에 적용하면, 여전히 고객들은 피규어의 높은 퀄리티를 요구하므로, 피규어의 퀄리티 자체도 높아야 하지만 순간적인 즉각성이 소비의 형태로 물성과 결합했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장의 과점에서 두 개념을 비교하여 평가하면, 캐릭터의 물성은 특정한 행위의 즉각성(instantaneous)을 다양한 형태로 경유할 시 교환 시장에서 그 가치는 급격히 높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던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즉각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느냐이며, 왜 하필이면 오늘날 대중에게 즉각성이 옹호받고 있느냐이다. 물성과 즉각성의 가장 큰 차이는 지속성과 구체성의 유무다. 즉각성의 경우, 그 개념 자체가 순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지속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지속성의 유무 자체는 구체성의 여부와도 쉽게 연관된다. 구체성은 인식에 대한 개념으로써 인간의 인지와 기억 등의 사고 작용에 수반된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 작용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에 대한 비가역적 감각이 개입되는데, 이는 즉각성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게 어려운 바탕이 되기도 한다. 결국 물성과 즉각성은 서로 상보하는 관계에 있되, 즉각성이 오늘날 새로운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너지의 형태가 가치를 쌓아 올리는 형태가 아닌 해체하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고도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작가적 고유성을 해체하는 가챠
가치를 쌓는 대신 해체하고 있다는 점은 가챠의 소비자들이 자신이 가진 캐릭터에 대한 기억을 새로운 형태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챠는 캐릭터를 어떤 형태로 해체하고 있는가?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라부부의 사례로 되돌아가 보자. 라부부를 대중에게 소개한 것은 리사였지만, 본격적으로 라부부를 구매하게 만든 계기는 태국 왕실 인사들이 라부부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시작하면서였다. 태국 왕실 인사들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개된 라부부는 태국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등지의 동남아 시장을 강타하며 서서리 존재감을 넓혔고, 이는 국경이 없는 인터넷을 타고 북미까지 닿게 되었다. 이윽고 라부부는 리한나와 두아 리파 등 글로벌 영향력이 있는 셀럽들의 계정에서 소개되며 단순히 코어 팬덤을 형성한 것을 넘어 글로벌 수집 열풍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리사의 남자 친구로도 알려진 LVHM 그룹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인 프레데릭 아르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승수효과로 볼 수도 있지만, 최소한 라부부의 사례를 관통하는 욕망은 계급 상승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다.
물론, 라부부의 사례만 가지고 모든 가챠에는 계급 상승의 욕망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급 상승의 욕망이 마케팅 과정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라면, 왜 하필이면 랜덤 박스에서 이러한 마케팅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랜덤 박스에는 모호성을 보완할 요소가 필요하며 라부부가 (의도했든 아니든) 지속적이며 일관되게 계급 상승의 욕망을 자극하며 일관성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가챠의 모호성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가챠의 속성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프로스트버그 주립대가 공동 연구한 「온라인 정보 제공이 블라인드 박스 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 분석」에 따르면, 가챠는 필연적으로 △주관성(subjectivity) △다양성(diversity) △가독성(readability)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구현되어 있느냐를 통해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이는 가챠가 정보의 비대칭성을 활용한 소비 상품이기 때문인데, 가챠를 구성하는 4개의 언어적 정보 요소 중 3가지가 모호성을 보완하는 셈이다.

[사진3] 가챠의 4대 언어적 정보 요소(△주관성 △다양성 △가독성) △모호성과 가격의 상관관계
(출처: 온라인 정보 제공이 블라인드 박스 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 분석)
가챠가 모호성을 상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언어적 극단성을 추구하게 된다는 점은 라부부의 랜덤 박스 소매 전략에서 계급 상승 욕망을 일관적으로 자극한 게 어떻게 성공 요인이 되었는지 시사하며, 나아가 가챠의 즉각성이 물성의 어떤 부분을 해체하고 있는지 드러낸다. 그것은 소구점이 무엇이 되었던지, 일관된 욕망을 극단적으로 자극해야 한다는 방향의 일관성이며, 캐릭터의 물성이 내재하는 작가적 고유성은 그 방향에 맞추어 해체된다. 그리고 가챠라는 판매 방식이 내재한 즉각성은 그 과정을 촉진한다. 물성에서 작가적 고유성이 가챠에 의해 해체된다는 점은, 가챠의 상품화에 있어 작가는 계기를 제공하는 스파크 플러그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점을 지목한다. 이는 대중적 소비가 작가적 고유성을 원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 20세기를 유동의 시대로 정의했던 사회학자 지그문드 바우만은 ‘해체가 생산하는 유동성은 소비의 시대를 불러올 것이고, 이는 다수의 권리를 통한 평등 대신 소수가 독점한 권력으로 자리 잡을 것5’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로 정의했던 에릭 홉스봄 역시 경계가 사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가치가 아닌 새로운 폭력을 생산하게 될 것6’이라는 전망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작가성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쩌면 작가적 고유성을 원하지도, 추구하지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시대에 살고 있을 수 있다. 가챠는 만화의 친구인가, 적인가? 나아가 가챠는 바우만과 홉스봄이 이야기했던 새로운 리바이어던의 신호일까, 아니면 새로운 목적을 갈구하는 대중의 목소리일까?
1 hopperHQ, 「hopperHQ Media Outlet 2025」, 2025.
2 한국경제, 「제니보다 더 받는다…리사, 인스타 게시물 하나에 8억」, 2024.08.23.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4082303877)
3 Happynet, 「캡슐 토이 수요 실태 조사(カプセルトイの需要実態調査)」, 2025.03.12. (https://adv.tokyo-np.co.jp/prtimes/article6824/)
4 Xun Xu1·Yiming Zhuang·Jonathan E. Jackson, 「Investigating the impact of online information provision on the market price of blind box」(Electronic Commerce Research), 2024.05.
5 지그문드 바우만,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2000.
6 에릭 홉스봄, 『폭력의 시대(Globalization, Democracy, and Terrorism: 9/11 and Its Aftermath)』,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