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에 한국만화는 100주년을 맞이했다. 한 세기에 이르는 역사 속에서 그 출발이 신문만화, 곧 시사만화였다는 점은 한국만화 역사가 곧 시사만화의 역사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헌데, 최근의 시사만화는 종이 매체를 대신하는 웹 매체의 성장과 함께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 놓이게 되었고, 그에 따라 그 외형과 역할에 있어 100여 년 전의 그것과는 다른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한국 시사만화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에 있어 시사만화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한국만화의 출발점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6월 2일에 창간호를 선보인 <대한민보>에는 ‘揷畵(삽화)’라는 제목 아래 이도영의 한 컷 짜리 만평이 실렸고, 이를 우리 만화의 효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이 작품은 연미복을 입은 신사의 입으로부터 ‘대한민보’로 시작되는 4행시를 구성해보이며, 해당 매체가 당대 언론으로서 가져야할 지향점에 대해 다뤘다. 이 작품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우리 만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두 가지 측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연미복 신사의 입에서 ‘大局(대국)의 肝衡(간형)’, ‘韓魂(한혼)의 團聚(단취)’, ‘民聲(민성)의 機關(기관)’, ‘報道(보도)의 異彩(이채)’등과 같은 말들이 가지처럼 뻗어져 나오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연출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모습은 말풍선에 담겨진 대사를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언론이 나가야 할 바를 압축적으로 명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에 대해 박석환은 “①단순·과장·풍자라는 만화의 3요소를 담고 있고 ②대중 배포를 목적으로 인쇄된 정기간행물에 연재 형식으로 게재되었고 ③다양한 만화적 표현기법을 창안했다는 점에서 한국만화사의 출발점이자 한국 최초의 만화로 평가받고 있다.”2) 설명한 바 있다.
△ 이도영의 삽화
<대한민보>에 발표된 이도영의 작품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신문들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이 세상에 나왔다.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당시 등장한 신문마다 만화를 선보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캐리커처, 네 칸 만화, 한 컷 만평, 연재만화, 독자만화 등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시사만화와 더불어4) 오락성이 두드러진 대중만화까지 발표되면서 신문매체와 만화의 밀접한 관계를 형성시켜 나갔다. 한편, ‘멍텅구리’, ‘허풍선이’ 등과 같이 대표적인 대중만화가 대체로 네 컷으로 구성되는 반면, 당대 민중들의 삶과 민족의 현실을 담아내는 시사만화의 경우는 주로 한 컷으로 그려지면서 압축, 풍자 등과 같은 연출기법을 구사했다. 또한, 시사만화에 대한 현상모집이 진행되기도 했으며, 오늘날 신춘문예에 해당되는 공모전에 만화 장르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만화가로는 김규택, 노수현, 안석주, 최영수 등을 꼽을 수 있다.
△ 멍텅구리 헛물켜기(좌), 허풍선이 모험기담(우)
1945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 해방공간에서 다양한 매체들이 출현했다. 그런 가운데 만화와 관련해 몇몇 주목할 만한 매체도 눈에 띄었으니, 특히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울신문>에는 화가로 더욱 유명한 정현웅의 시사만화가 1946년에 여러 차례 발표됐는데, 주로 당대 어지러운 정치 현실을 반영해보였다. 1948년과 1949년 사이에는 임동은이 시사만화 및 아동만화를 발표했으며, 김용환은 1952년 6월부터 ‘코주부’를 연재하면서 같은 해 10월부터 1954년 4월까지는 시사만화를 선보였다. 한편, 일제 말에 강제 폐간되었다가 1945년 11월에 복간된 <조선일보>에는 복간 초기 김규택의 만평이 실렸고, 이듬해 4월부터는 해외에서 발표된 시사만화가 실린 바 있다. 한편, 1946년 10월에 창간된 <경향신문>에는 창간 초기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던 최영수와 김용환의 동생인 김의환 등이 만평을 발표했으며,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던 또 하나의 신문 <동아일보>는 1945년 12월에 복간된 후 김용환의 시사만평을 부정기적으로 실었다.
6.25 전쟁 이후,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에 손꼽히는 시사만화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서울신문>에서는 1960년대 후반까지 짧게는 몇 개월부터 길게는 1~2년 정도 연재되는 작품이 번갈아 등장하다가 1967년 8월에 장기연재 작품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윤영옥의 ‘까투리 여사’다. 이 작품은 1972년 7월까지 1,400여회가 연재됐다. 이후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잠시 지면에서 사라졌다가 1977년에 다시 등장해 1994년 8월까지 연재됐고, 최종 누적 횟수는 6,773회를 기록했다. <조선일보>에서는 1950년대에 정운경, 김규택 등이 시사만평을 선보였으며, 1962년 6월에 안의섭의 ‘두꺼비’가 등장해 1963년 2월까지 연재됐다. 이후 잠시 지면에서 사라졌던 ‘두꺼비’는 1966년 9월에 다시 등장해 1973년까지 연재됐다.
<동아일보>에서는 1955년에 이르러 연재만화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바로 김성환의 ‘고바우영감’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1955년 2월 1일부터 연재를 시작해 1963년 4월까지 발표됐고, 그 후 작가의 건강문제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64년 1월부터 연재가 재개되어 1980년 8월까지 등장하여 <동아일보>에서 25년간의 연재기록을 세웠다. 한편, 김성환의 건강문제로 ‘고바우영감’이 휴재되던 1963년 4월에 안의섭이 ‘두꺼비’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김성환이 ‘고바우 영감’을 연재 재개한 이후에도 <두꺼비>는 한동안 같이 발표되면서 국내 대표적인 시사만화가 함께 연재되는 특별한 풍경을 낳기도 했다.
<경향신문>에서는 김경언의 ‘두꺼비’가 1955년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연재되었고, 이후 안의섭이 ‘두꺼비’라는 제목을 이어받아 1955년 7월 1일부터 1961년 7월 11일까지 1,852회를 연재하였다. 이후 안의섭은 1964년 8월에 다시 ‘두꺼비’를 연재하기 시작해 1966년 8월 30일까지 이어갔다. 1967년 10월에는 정운경의 ‘왈순아지매’가 등장해 1975년 1월까지 2,236회가 연재된다. 한편, <한국일보>에는 1973년 7월 6일부터 안의섭의 ‘두꺼비’가 연재되기 시작해 1989년 2월 16일까지 장기 연재되었으며, 1965년 9월 22일에 창간된 <중앙일보>에서는 창간호부터 박인성에 의해 연재된 ‘벽창호’라는 네 칸 만화가 부석언, 김봉천 등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1969년 9월까지 발표됐다. 이후 신동헌의 ‘너털주사’, 길창덕의 ‘나원참 여사’ 등의 만화가 선보이다가 1975년 1월에는 정운경의 ‘왈순아지매’가 등장해 2002년 12월까지 장기 연재되었다.
1) 연재기록
흔히 우리나라 시사만화의 3대 캐릭터로 ‘고바우영감’, ‘왈순아지매’, 그리고 ‘두꺼비’를 꼽는다. 그것은 이들 캐릭터가 해방 이후부터 근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들을 독자와 함께 하면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건너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연재 기록들은 강산이 몇 번씩 바뀔만한 시간들이다.
△ <고바우 영감> 연재 사고와 1회 연재물 (동아일보 1955. 2. 1.)
김성환이 발표한 ‘고바우영감’의 경우 한국 전쟁 중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해 김성환이 자신의 에세이집 <고바우와 함께 산 半生>에서 “<만화뉴스>가 1951년 대구에서 <만화신문>으로 개제(改題)되어 속간될 때에 발행인 김용환 씨의 청에 의해 새로운 연재만화를 한 편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을 ‘고바우’로 붙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러다가 신문에 등장한 것은 1955년 2월 1일자 <동아일보>를 통해서다. 이후 ‘고바우영감’은 1980년 8월까지 <동아일보>에서 7,971회가 연재됐고, 1980년 9월에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1992년 8월까지 누적횟수 11,700회를 기록했다. 1992년 10월에는 다시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겨 2000년 9월 29일까지 발표되면서 총 누적횟수 14,139회를 기록했다.
△ 두꺼비 (안의섭, 경향신문)
‘두꺼비’는 1955년 4월에 <경향신문>을 통해 김경언이 첫 선을 보였다가 같은 해 7월 1일부터 안의섭이 연재를 맡았다. 이후 안의섭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그리고 <문화일보> 등 여러 매체를 거치면서 연재를 이어갔다. ‘두꺼비’의 경우 연재 시 횟수를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누적횟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지막 회는 <문화일보> 1994년 8월 4일자 지면에 실렸다. 윤영옥은 “1945년 해방 이후 김용환과 김규택이 현대 한국만화 발전에 큰 공을 기여했다면, 55년 이후 현대 한국 만화의 꽃을 피우게 한 주요역할을 했던 작가로는 ‘고바우 영감’의 김성환과 ‘두꺼비’의 안의섭을 들 수 있다.”3)는 얘기를 통해 한국만화사에서 ‘두꺼비’와 안의섭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 정운경의 <왈순 아지매> 캐릭터와 마지막 연재작 (중앙일보 2002. 12. 24.)
‘왈순아지매’ 역시 ‘고바우영감’과 마찬가지로 시작은 신문이 아닌 잡지였으니, 여성월간지 <여원>을 통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잡지에 발표되었던 당시에는 4컷 만화가 아닌 페이지 만화 형태를 띠면서 시사적인 문제보다는 오락적 재미를 담아내다가 1964년 9월 21일자 <대한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신문에 발표되면서 이후 4컷 시사만화로 정착됐다. 1967년 10월에는 <경향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1975년 1월 1일까지 2,236회를 연재했고, 1975년 1월 6일부터는 <중앙일보>에서 발표되기 시작해 2002년까지 누적횟수 8,829회를 기록했다.
이들이 우리나라 시사만화를 대표하는 캐릭터라는 점은 만화 외 장르에서도 눈에 띌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고바우 영감’의 경우 1959년에 ‘고바우’라는 제목의 영화로 옮겨졌으며, ‘왈순아지매’는 1967년에는 TBC 그리고 1971년에는 MBC를 통해 두 번이나 드라마로 옮겨진 바 있다. 오락성이 두드러진 만화가 아닌 시사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신문 지면을 벗어나 영상 장르로 파급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대중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반증해 보인다.
한편, 중앙 일간지가 아닌 지방신문에 발표된 시사만화의 경우에도 눈에 띄는 시사만화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제주지역에서 발표된 ‘황우럭’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의 경우 1968년 5월 10일자 <제주신문>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1989년 12월 18일까지 총 6,204회가 연재됐다. 이후 <제민일보>, <제주타임스>, <제주프레스>, <한라일보> 등을 거치면서 2015년 4월 27일까지 누적 10,600회를 기록한다. 국내 시사만화캐릭터로서는 ‘고바우영감’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10,000회를 넘는 작품으로 얘기되어진다.
2) 필화사건
대체로 대중만화가 선사하는 오락적인 재미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삼는다. 리얼리티가 가미된다 하더라도 작품 자체는 픽션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으며, 그로부터 현실에서는 접할 수 없는 감동과 웃음을 가공해내기도 한다. 이에 반해 시사만화가 독자들에게 부여하는 재미는 처음부터 ‘현실’을 담보로 한다. 이미 ‘시사’라는 단어에서도 그러한 특징을 반영하고 있듯,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시사만화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한국 시사만화 역사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다.
만화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곳이 매체라면, 시사만화의 경우 대체로 신문 지면이 된다. 헌데, 권력기관의 검열에 의해 발표되지 못하는 상황은 한국 만화의 출발과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즉, <대한민보>에서 발표되었던 이도영의 작품들이 일제의 의해 검열을 받아 시시때때로 실리지 못하는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발표되었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품이 담보한 주제의식, 일테면 근대적 계몽이나 일제에 대한 저항 그리고 친일파에 대한 비판 등과 같은 내용들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시대를 돌아보고 현실을 성찰하는 시사만화 본연의 책임과 의무에 성실하였기에, 민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는 그의 작품들이 고난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해방 이후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앞서 있는 대표적인 필화사건은 ‘고바우영감’에 얽힌 일이 될 것이다. 1958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른바 ‘경무대 똥통 사건’이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부당한 권력을 소재로 다룬 내용으로 ‘경무대에 출입하는 이는 말단이라도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풍자했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 김성환은 서울시경에 불려가 문초를 당해야 했고, 벌금형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한국 시사만화 100년>에서는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여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영감’은 박정희가 권력을 잡자 곧바로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5)고 밝히고 있어서 그 여파가 상당기간 계속되었음을 예상케 한다.

197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은 윤영옥의 ‘까투리 여사’를 통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까투리 여사’는 <서울신문>에 연재된 작품으로 ‘왈순아지매’와 더불어 시사만화에 있어 대표적인 여성캐릭터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72년 6월 15일자 작품에서 당시 농림부 권장정책에 따라 재배한 작물들이 제대로 된 판로를 찾지 못해 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을 다루었는데, 이것이 당시 새마을운동을 비판한 것으로 오해 받아 작가는 회사를 떠나야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윤영옥은 “결국 나는 자진퇴사 형식의 권고사직 결정에 따라 72년 6월 30일, ‘까투리여사’가 등장한지 만 5년 만에 ‘1488회’란 서울신문 사상 최초의 장기 연재 기록을 남기고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6)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작품은 약 5년간 중단되었다가 1977년 7월에 복직되어 ‘까투리여사’의 연재는 재개됐다.
‘두꺼비’의 안의섭은 권력기관에 여러 차례 불려가 고초를 당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문사에서 작품을 연재할 당시 그가 갑자기 사라져 장시간 지나서 나타날 때면 ‘남산에서 라면 먹고 왔다’고 하는가 하면 ‘자꾸 불러서 일을 못하니 일당을 달래서 받아왔다’며 그 돈으로 또 라면을 사 먹자고 했다는 당시 함께 재직했던 동료 기자의 얘기가7)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가 <한국일보> 1986년 1월 16일자에 발표했던 ‘두꺼비’와 관련된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 내용은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당시 미국 대통령 레이건의 상황을 빌려와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비꼬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 작품이 공개된 후 안의섭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두꺼비>는 1년 7개월 동안 발표되지 못했다.
1) 현실을 이해하는 창(窓)
시사만화는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통상 대중만화 경우와는 좀 다른 모습으로 위치한다. 즉, 대중만화가 대체로 문화상품 혹은 문화콘텐츠로서 유희의 개념으로 소비되어지는 반면, 시사만화는 상품이 아닌 ‘기사’의 역할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대중만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해석과 가치판단의 역할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그것은 곧 독자들에게 현실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요청하는 것이며,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시사만화 본연의 기능도 수행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락적인 즐거움으로 소비되는 대중만화에 비해 시사만화는 독자들의 삶과 일상에 보다 깊숙이 관여하는 셈이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김진수는 시사만화가 지니는 효용에 대해 다음처럼 설명한 바 있다.
△ 포털사이트를 통해 서비스 되고 있는 시사만평들(네이버 오늘의 만평)
“신문은 읽기 싫지만 시사문제를 알아야 한다면 시사만화를 읽으면 된다. 시사만화에는 그날그날의 가장 중요하고 최대 이슈가 되는 주제가 담겨있기 때문에 시사만화만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면 젊은이들의 시사뉴스 결핍 현상은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다. 또한 시사만화의 재미를 통해 새롭게 시사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신문을 온전히 다 읽으려면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시사만화는 한 번 쓱 보면 끝난다. 길어야 10초?”8)
요컨대, 시사만화는 바쁘게 생활하는 현대인에게 있어 굳이 신문을 다 보지 않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가장 빠르면서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왔던 셈이다. 그것은 곧 현대 사회에서 시사만화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다름 아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얘기로부터 약 1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미디어 환경은 급격히 변했다. 사람들은 매일 종이 매체의 기능을 대신하는 웹 매체의 성능을 실감하면서 살고 있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신문과 만화가 될 것이다. 과거 샐러리맨들의 출퇴근길 손에 들려있던 신문들의 자리는 스마트폰이 대신하고 있다. 만화책을 즐겨보던 십수년 전의 청소년과 달리 작금의 10대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스마트폰을 통해 서비스 되고 있는 웹툰일 것이다.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는 시사만화에 대한 ‘시대적 성찰’을 불러오게 한다. 즉, 종이 매체의 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앞으로도 시사만화가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주는 통계도 있었다. 가령, 손상익은 “한국의 뉴미디어 환경은 성인 국민 대다수가 인터넷을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IT 강국의 면모와 함께 선진국의 1/3 수준에도 못 미치는 신문구독률이 초라한 ‘올드미디어 소비성향’에서 극명해진다”면서 특히 “신문 시사만화는 양적인 침체와 함께 질적으로도 위축을 거듭하고 있다.”고 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일간종합신문들은 ‘1칸 만평’과 ‘4칸 만화’ 배치를 신문지면 레이아웃의 필수조건으로 견지해왔으나 2009년 현재 서울의 6대 종합 신문 가운데 <경향신문>과 <서울신문>만을 제외하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가 1칸 만평만 게재하고 있으며, <동아일보> 지면에는 시사만화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9)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신문매체의 하락세가 고스란히 시사만화의 대한 소구의 하락으로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종원 역시 매체 환경의 변화는 단적으로 신문산업의 쇠락으로 요약된다고 하면서 신문정기구독률과 열독률이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인터넷을 비롯한 새로운 매체의 등장에 따른 타격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건재해왔던 신문의 위상이 상당 부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신문 산업의 쇠퇴는 결국 신문시사만화의 약세로 이어진다”10)고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웹 매체가 대중에게 소구하는 시대에 있어서 오히려 시시만화가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시킬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가령, 대중만화에 비해 시사만화의 역할이 미비한 일본에서 활동 중인 시사만화가 하시모토 마사루는 “저와 같은 풍자만화가에 있어서 인터넷의 보급은 실로 고마운 일”이라면서 “권력에 저항하는 수단으로서는 정말로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즉, 일본 주류 신문의 시사만화 대부분이 캐리커처를 통해 정치가들의 권력싸움을 희화화 할 뿐, 일본 혹은 세계가 지닌 문제의 본질에 대해 등한시 하는 반면, “인터넷은 매스미디어에서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욕구불만을 해소”11)해준다고 밝힌다. 또한, <한겨레신문>에서 ‘한겨레 그림판’을 연재하는 권범철은 “디지털 전략의 희생양일 줄 알았던 시사만화가 디지털 콘텐츠의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언론의 제 기능을 온전히 작동할 때 독자가 반응한다는 사례로 시사만화를 들 수 있다”12)고 전한 바 있다.
2) 역사를 이해하는 자료
2013년 2월에 ‘고바우영감’ 원화가 등록문화재 제 538호13)로 지정되었다.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존 및 활용을 위한 가치가 커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14)라는 것이 등록문화재가 지닌 특징인 점을 감안한다면, ‘고바우영감’ 역시 “현대사 연구에 학술·사료적 가치를 인정”15)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만화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바우영감’이 한국만화사에 지니는 상징성 그리고 대표성을 고려한다면 역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한국만화가 겪어왔던 정치적, 사회적 억압을 고려한다면 획기적인 일이기도 하며, 그래서 더욱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제 시시만화의 기능이 단순히 현재를 이해하는 수단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듯 실제로 교육현장에서 시사만화를 활용하는 사례에 대한 연구 작업도 있었다. 가령, 박영신은 “시사만화는 발행 당시 과거의 사회의 모습을 반영된 사료이면서 재미있는 그림과 구어체 문장으로 학생들에게 친숙하고 흥미롭게 느껴지고 이해와 기억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검증된 그림과 문자의 ‘복합매체’로 학생들이 이해하기에도 용이하여 기존사료의 문제점을 보완한다.”면서 “이를 사료로 활용한 수업모형을 개발한다면 학생들의 역사수업에 대한 흥미와 역사적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16)고 말한다. 또한, 이성희는 “만화 중에서도 시사만화는 일반적인 만화가 오류로 범할 수 있는 사실 왜곡이나 허구의 내용을 포함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역사 학습에 아주 유용하다 할 수 있다.”17)고 지적하면서 특히 수업자료로서 학생들이 능동적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적합하다고 밝힌다. 황경숙·박영신 역시 시사만화를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사회문제에 대한 학습 동기를 유발시키고 흥미와 참여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며,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향상”18)되는 것으로 연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짐작하고만 있었던 시사만화의 기능을 벗어나 다른 영역으로의 확장을 모색케 한다. 즉, 시사적인 문제를 다루지만 그것이 현재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올곧게 이해하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활용될 수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아래에서 시사만화의 역할이 과거에 보여주었던 모습으로 정체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 및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주)
1) <제주 시사만화 연대기>(2016, 팬덤북스)에 수록된 ‘제주 시사만화 전사(前史)’ 부분을 압축·수정해 정리했다.
2)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6&contents_id=13996&category_type=series
3) <한국신문만화사>(1995, 열화당) p142-143
4) ‘왈순아지매’의 경우 1963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옮겨진 바 있으나, 이는 신문에 4단 만화로 연재되기 시작 전의 일이다.
5) <한국 시사만화 100년>(2009, 일다) 42p
6) <4컷 속에 인생을 담고>(1991, 진솔) 27p
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6849&cid=59065&categoryId=59073
8) <한국 시사만화의 이해>(2009, 커뮤니케이션북스) 머리말
9) http://blog.naver.com/samson1264/70047839204
10) 하종원, 한국 신문시사만화의 지형과 전망, <언론과학연구>(2009년 9월), 626p
11) 하시모토 마사루(2011), 멀티미디어 시대 권력에 대한 저항, <2011년 국제시사만화 포럼 자료집: 세계화 시대, 시사만화 저항은 끝났는가?>, 3p
12)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5028#csidx85197d24e8dce11962e99595bc456f1
13) 538-1호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538-2호는 경기도 안산에 위치한 동아일보사에 보관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에 따르면 “고바우영감 원화는 김성환이 소장하고 있는 6,496매과 동아일보사가 소장하고 있는 4,247매로 총 10,743매이며, 원화는 최고급 양지에 묵으로 그렸으며, 철장과 낱장 그리고 병풍 등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사만화로 단일 만화로는 최장수 연재된 시사만화로, 작품과 캐릭터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중요한 학술적?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한편, 같은 시기에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 원화 역시 등록문화재 539호로 지정되었다.
14)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57146&cid=40942&categoryId=33495
15)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1006010729300170010
16) 박영신(2004), <역사수업자료로서의 시사만화연구>(이화여자대학교)
17) 이성희(2008), <시사만화를 활용한 세계사 수업의 방안과 실제>(경북대학교)
18) 황경숙, 박영신(2009), 시사만화를 통한 어느 고등학생의 사회문제 이해도 변화에 대한 연구>, <시민교육연구> 제41권 제4호(2009. 12) pp.153-181<시민교육연구> 제41권 제4호(2009. 12) pp.153-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