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산업의 현장을 가다 1]
만화책을 손에 들면 먼저 작가의 이름이 보입니다. 표지에 눈에 잘 띄도록 적혀 있지요.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다른 경우는 두 명의 이름을 보게 됩니다. 해외 작품이라면 옮긴이의 이름이 같이 들어가고, 판권을 확인해 보면 편집자 말고도 제작에 참여한 여러 부서와 직원들의 이름이 나오지요. 그중 어딘가에 편집 디자이너의 이름도 있습니다. 명칭은 때에 따라 다릅니다. 그냥 ‘디자인’으로 표시될 때도 있고, ‘미술’로 표시될 때도 있으며, 생략되기도 합니다. 혹은 ‘식자’라는 명칭이 익숙할 수도 있겠네요.
△필자의 만화편집 진행모습
만화책 한 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힘이 필요합니다. 편집자가 좋은 작품을 골라 계약을 맺으면 번역(해외 작품일 경우)이나 교정교열, 윤문을 진행한 뒤, 그림을 수정하고 판형에 맞춰 편집하는 디자인 작업을 거쳐 인쇄하고 판매처에 배포합니다. 최근에는 전자책이나 웹툰 플랫폼을 통해 디지털 데이터 형식으로만 제공되는 만화도 많은데요, 이런 디지털 전용 작품도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 교정과 식자 편집을 마친 뒤 서비스합니다. 해외 서비스를 위해 외국어로 번역하고 편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 편집자의 의도에 맞춰 제작 실무를 진행하는 사람이 만화 편집 디자이너입니다. 예를 들면 최근 작업한 한 작품은 편집자가 “나중에 모든 글자를 쉽게 수정할 수 있도록 효과음도 프로그램 서체를 이용해서 작업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작가가 그림으로 그린 효과음과 손글씨를 모두 서체로 바꾸어 작업했습니다. 어떤 서체를 골라야 작가가 원래 그려 넣은 모양과 비슷해질지 고심하며 서체를 선정하고 바꾸고를 반복했지요.
반면 어떤 작품은 “프로그램 서체로는 원화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어려우니 긴 문장이라도 모두 손글씨로 써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양의 대사를 손으로 써 넣었습니다. 작가가 일부러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는 똑같이 삐뚤빼뚤하게 따라 하면서요. 둘 다 진행할 때는 어려웠지만 돌이켜 보면 기억에 남는 작업이 되네요.
이와 같이 편집자가 원하는 점을 잘 이해하고 그에 맞춰 가장 보기 좋은 결과물을 가장 빨리 내어 놓는 것이 만화 편집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굳이 ‘만화’ 편집 디자이너라고 강조한 이유는 편집 디자이너의 업무를 바탕으로 만화의 특성을 살릴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스크롤 편집
만화 편집을 크게 나누면 웹툰을 포함하여 디지털로만 서비스되는 만화 편집이 있고, 인쇄하여 실물 책으로 나오는 단행본 도서 편집이 있습니다. 우선 인쇄를 하든 디지털로만 서비스를 하든, 페이지 형식이든 세로스크롤 웹툰 형식이든 만화에는 공통된 만화의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만화는 그림과 글이 섞여 있기 때문에 말풍선이라는 작은 영역에 대사를 적절하게 집어넣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이라면 모든 페이지의 동일한 영역에 정확한 줄 수로 글이 들어가야 보기 좋지만, 만화는 각 말풍선에 독립적으로 어떻게 정렬하고 배치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말풍선의 모양이 온전하다면 중앙 정렬로 대사가 배치될 것이고, 말풍선 왼편이 컷에 가로막혀 끊겨 있다면 왼쪽 정렬을 사용하여 배치할 것입니다. 지금 주변에 만화책이 있다면 한번 펼쳐서 확인해보세요. 원문과 번역문의 글자 수도 다르기 때문에, 할당된 공간에 어떻게 하면 가장 보기 좋게 넣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 디지털 편집
또한 작업하다 보면 그림에도 손을 대게 됩니다.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그림으로 나타내는 글인 ‘효과음’이 있다는 것인데요, 이 효과음도 한눈에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어로 수정한다는 점이 한국판 만화책의 큰 특징입니다. 해외에서는 효과음에 주석만 달거나 아예 주석조차 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비용 문제도 있고, 효과음 자체를 작가의 그림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옛날에 출간된 작품은 일본어를 지우는 일에 집중하여 원화를 크게 가리거나 흰 공백으로만 남겨 두는 일도 많았지만, 만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사람이 늘면서 원서와 동일한 느낌을 살린 고품질의 단행본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마니아층이 늘어났고, 작업 환경이 수작업에서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되면서 정밀한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기에 요즘은 최대한 원화 느낌을 살리면서 수정하는 추세입니다. 작업은 힘들지만 완성된 책을 보면 뿌듯하지요.
△ 스캔 보정 및 복원
또 다른 특징은 작은 점으로 이루어진 스크린톤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웹툰이 인기를 끌면서 컬러 만화의 비중이 높아지긴 했지만, 일본 만화를 포함한 번역서와 과거 작품을 포함하면 아직은 흑백 톤 만화의 비중이 높습니다. 번역서 그림 작업은 일본어 효과음을 지운 뒤, 빈 공간을 주변에서 동일한 패턴의 스크린톤이나 그림을 복사해서 메꾸는 일이 많습니다.
과거 수작업일 때는 같은 종류의 실물 스크린톤을 덧대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디지털 데이터로 수정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주변의 어떤 이미지를 복사해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빠르게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화 편집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만화 공통 특성을 고려하면서, 서비스 형식에 따라 다르게 편집하게 되지요.
우선 웹툰 등 디지털로 서비스되는 만화는 모니터나 핸드폰 액정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집중하여 편집하게 됩니다. 특히 핸드폰 액정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손바닥 정도의 사이즈이기 때문에, 한 화면에 너무 많은 컷을 넣지 않고 글자도 약간 큼직하게 편집합니다. 만약 작가가 한 페이지에 너무 많은 컷을 그려 넣었다면 해당 페이지를 나누어 서비스한다든가, 글자 크기만 키운다든가 하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좋은 편집일지를 고민하게 되지요.
△ 해외판 편집
최근 한국 웹툰이 국내에서 직접 해외판을 만들어 외국에 서비스하는 경우도 많이 늘었는데 이때도 많은 것을 생각하며 편집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으로 수출할 때에는 일본의 만화 시장은 물론이고, 통신 시장에 대한 조사도 함께 하며 편집 방향을 정합니다. 일본에서 한국 만화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고해상도 이미지 다운로드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통신 상태인가, 일본에 가장 많이 보급된 휴대폰에서 볼 때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 등에 대한 것이죠.
그 결과 “일본 사람들이 볼 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자연스러운 효과음으로 디자인하고, 작은 휴대폰 액정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게 글자 크기를 최대한 키우며, 그에 따라 말풍선을 확대하여 새로 그려 넣어 달라”는 편집자의 요청이 있었고, 한정된 시간과 비용 안에서 이 요청을 어떻게 가장 잘 이루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여 작업했던 적이 있습니다. 해외에 수출된 한국 만화들이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 이렇게 자기 작품처럼 신경 써서 편집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 단행본 도서는 인쇄를 고려하여 편집하게 되는데요, 모니터로 볼 때와 실제로 인쇄한 뒤에 볼 때 격차가 크기 때문에, 인쇄하면 어떻게 보일지를 고려하면서 편집해야 합니다.
인쇄는 원하는 사이즈보다 크게 인쇄하여 가장자리를 잘라내는 방식으로 책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가장자리의 잘려나가는 영역을 도련이라고 하는데, 편집 단계에서 잘려나가는 부분과 잘려나가지 않는 부분을 구별하여 작업하는 것이 디지털 만화와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모니터나 핸드폰 액정에 맞춰 큼직하게 들어간 글자를 그대로 인쇄하면 너무 커서 보기 힘들기 때문에, 출판에 알맞은 크기의 글자로 다시 편집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표지, 차례, 캐릭터 소개, 띠지 등 작가의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보조 페이지도 제작되어야 하고요.
△ 출판 편집
최근에는 웹 사이트에서 세로스크롤 방식으로 서비스하던 웹툰을 단행본 도서로 출간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에 컷 배치를 작가 대신 편집 디자이너가 담당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늘었습니다.
웹툰은 컷과 컷 사이의 여백이 넓고 컷 바깥에 말풍선과 대사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어디까지 편집해서 단행본 형식으로 만들지는 편집하는 사람의 의도가 많이 반영됩니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를 해치지 않으면서 읽기 편한 단행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겠죠. 한정된 시간 안에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숙련된 기술도 필요하며,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편집을 꿈꾸는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만화 편집은 기본적으로 편집 디자인에 해당하므로 관련된 내용과 툴 사용법을 배워두면 도움이 됩니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만화는 일반 서적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편집 디자인 교육을 들어 보면 ‘만화’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부분은 현재 출간되는 만화책을 꾸준히 들춰보면서 자기 눈으로 익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만화만이 아니더라도, 다른 직종 모두 학교나 학원에서 기본적인 툴 다루는 법을 배우고 나면 모든 것은 실무에서 다시 배우게 됩니다. 입사한 뒤 선배에게, 혹은 본인이 고군분투 하면서 실력을 쌓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만화 편집에 관심이 있다면 평소에 자주 만화를 들춰 보고, 평소에 즐겨 보지 않는 장르도 한 권씩 찾아보세요. 실무 스킬은 교육으로 배울 수 있지만 디자인을 보는 눈은 다른 사람이 알려줄 수 없습니다. 만화 편집 디자이너도 다른 여느 직업과 마찬가지로 최신 프로그램과 기법을 익히고, 요즘 나오는 책은 어떻게 편집되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톤과 그림, 만화 연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앞서 편집자의 의도를 살리며 보기 좋게 편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를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재미있는 만화를 그릴 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만화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원고를 그렸는지 이해할 수 있어야 그 의도를 살려 편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웹툰이 늘어나면서 컷 배치를 조정해서 재편집 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만화 작가를 위한 기본적인 수업을 들어두거나, 짧은 단편을 그려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와 편집 디자이너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웹툰 플랫폼에서는 어느 정도의 만화 편집을 직접 할 수 있는 PD(편집자)를 선호하기도 하는데요, 작품 업로드를 하다 보면 오탈자 수정을 직접 할 수 있는 편이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책이 나오지 않고 웹 사이트에서만 서비스하는 만화의 경우, 외주 프리랜서나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여 빠르게 대량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번역부터 교정교열, 편집까지를 한 명이 맡아서 진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만화에 특화된 편집자와 편집 디자이너가 필요해질 것이며, 그 수요도 늘어나리라 예상합니다.
만화에 작가의 이름을 글/그림으로 나누어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작가의 이름만을 표기할 뿐 보조 작가나 어시스턴트의 이름은 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화로 따지면 감독 이름만 나오고, 제작에 참여한 다른 스태프의 이름은 생략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인 거죠.

△ 웹툰 편집
그랬던 만화도 분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글 작가와 그림 작가 외에 어시스턴트의 이름을 표시하거나, 번역자의 이름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표지 디자이너, 타이틀 캘리그라피스트,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을 도서 날개 부분에 표시하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표기할 수 있으니 더 멋진 작업물을 만들려 하고, 그것을 보고 자란 사람들이 그보다 더 멋진 작업물을 만들려 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편집 디자인에 고민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편집 디자인을 담당한 사람이 당당히 편집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릴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더 예쁘고 보기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자부심을 불러올 것이고, 이 자부심은 많은 사람들이 더 재미있는 책을 볼 수 있는 좋은 독서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