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작가가 그리는 만화이야기 1]
만화스토리작가는 누구인가.
기능적으로만 보자면 만화스토리작가는 만화스토리를 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건축과 비교해보자. 크고 화려한 건물일지라도, 건축업자들은 “건축 설계도만 있으면 건물 올리는 건 일도 아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건축 설계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만화라는 작품에서 만화 스토리는 일종의 설계도다. 작품의 예술성 혹은 재미에서 만화 스토리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언젠가 만화스토리작가인 필자와 작품을 같이 기획하던 한 만화가가 던진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당신이 우리 선장이다.”
그렇다. 만화스토리작가는 먼 항해의 키를 잡은 선장이다. 선장이 뛰어나지 않으면 배는 어디선가 암초나 거센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만화가가 아무리 연출로 묘수를 낸다 해도, 스토리라는 뼈와 힘줄의 성김을 이겨낼 순 없다.
그럼에도 1980년대 대본소만화 시대까지 만화스토리작가는 유령작가와 같은 존재였다. 스토리작가의 존재는 출간된 만화책 어느 구석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만화가 한 명의 이름만 독자에게 드러나고, 독자는 만화가 이름을 보고 책을 집어 드는 구조였다. 만화스토리작가는 권당으로 원고료만 받고, 크레딧을 포기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작품이 히트하면 그 영광은 모두 만화가에게 돌아갔다. 저작권 문제에 있어서도 크고 작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비밀스런 조타실 한 구석에 숨어 있던 선장은 떳떳하게 푸른 하늘을 보며 키를 잡게 됐다. 21세기 들어 이야기산업 시대가 찾아오면서 선장의 존재와 역할이 공공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만화스토리작가와 만화가는 이제 항해를 이끌어가는 공동의 조력자로서 저작권을 공유하며, 서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지만, 만화스토리작가도 능력만 검증된다면 영광의 월계관을 쓸 수 있게 됐다.
1980년대 대본소 이전 - 급하면 일본만화 스토리 짜깁기도
1960년대~70년대 초창기 만화스토리작가는 독립된 직업으로서의 위상을 갖기 어려웠다. 만화가가 직접 스토리를 쓰거나, 문하생을 시켜서 스토리를 써보게 하든가, 남이 써놓은 스토리를 사버리든가, 선생이 앞부분에 틀을 잡아놓은 작품을 문하생이 이어서 쓰게 하든가 등의 방식으로 스토리가 공급됐다.
여학생에 연재한 이상무의 데뷔작 <노미호와 주리혜>(1966)의 경우 스승인 박기준이 초반부 스토리를 직접 썼다. 박기준은 “내 밑에서 4~5년 간 고생한 이상무에게 먹고 살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문하생이 그 뒷부분을 쓰고 내게 수정을 받으면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요령이 생기도록 했다”고 말했다.
출판사나 작가들 사이에도 저작권 개념이 희박해 일본만화를 구한 후 스토리를 살짝 바꾸거나, 여러 작품의 스토리를 짜깁기해 창작품인 양 내놓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만화스토리 수급에는 질서가 거의 없었다.
이 시기에 자생적으로 배출된 만화스토리작가인 임웅순의 인생 궤적을 따라가 보자. 1945년생으로 인천 출신인 그는 1959년 바이올리니스트 김길영씨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연구소(을지로 4가)에 수강생으로 다니며 인생의 콤비가 된 한희작, 김마정, 박문윤, 엄희자 등을 만났다. 1950년대 어린이 만화를 이끌면서 그 곳의 강사로 참여한 김정파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은 그는 김정파의 <촌놈 솔봉이>를 보고 습작의 길을 걸었다. 건국대 철학과를 중퇴한 그의 피는 만화 쪽에 쏠리고 있었다.

그림에서 한계를 느낀 임웅순은 1960년대 중반부터 몇 작품을 창작하다가 1973년부터 전문적인 스토리작가로 전업했다. 1975년 이재학의 코믹무협 <만두명인>, <생사고락> 등의 스토리를 쓰면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한희작과 콤비로 <서울손자병법>, <모래여자> 등 성인만화를 발표해 스토리 작가로서 만개했다.
임웅순 스토리의 특징은 어떤 부류의 작품이든, 위트가 강하다는 점이다. 어린이만화로 출발한 그의 작품세계에는 하드코어적 성향이 없다. 필자는 임웅순과 한희작을 여러 차례 만났다. 임웅순은 항상 점잖은 신사처럼 보였고, 말이 많지 않았다. 체구가 큰 편인 그의 내면에는 개그감각이 충만했다. 임웅순이 쓴 한희작의 성인만화들은 적나라한 그림으로 승부하지 않았다. 심리묘사라든지, 세태풍자가 품격 있으면서도 당시의 규범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
1980년대부터 허영만의 굵직한 작품 스토리를 담당한 김세영도 1970년대 초반부터 만화스토리작가로서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만화 데뷔작은 1973년 발표한 장은주의 만화 <새로운 노래>였다. 이후 200여 편의 만화스토리를 담당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시(詩) 습작을 하는 등 문인이 되기 위해 만화에서 잠시 손을 뗐다. 허영만이 인정하는 만화스토리작가로서 김세영의 미덕은 감각적인 것보다도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힘이다. 허영만은 “다른 만화스토리작가들은 처음에 괜찮다가 결국 용두사미된다. 그런데 김세영은 마지막까지 스토리에 힘을 유지한다”고 평했다. 김세영의 활약은 1980년대 만화스토리작가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확인하도록 하자.
대본소 시대 - 김민기, 박하, 김세영의 등장
1980년대는 만화를 빨리, 많이 낼 수 있는 작가가 돈을 버는 대본소 체제로 접어들었다. 일명 ‘공장만화’라 불리는 시기였다. 어른이 대본소의 주 독자층으로 편입된 것은 긍정할 만했다. 만화스토리작가도 시장상황에 발맞춰 만화프로덕션에 많은 물량을 공급해야 했다. 빨리 돈을 벌려는 만화 제작의 기업화, 분업화 흐름 속에서 전업 만화스토리작가 층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유명 만화가들과 함께 대본소 시대를 연 ‘공신’ 중 한 명은 발군의 만화스토리작가 김민기였다. 1954년생으로 경남 마산 출신인 김민기 역시 임웅순처럼 어린이만화가로 출발했으나 그림의 경쟁력이 부족해 만화스토리작가로 전향했다. 모두들 아는 것처럼, 그의 대표작은 1983년 발표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다.
김민기는 감성적인 드라마를 쓰는데 능숙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 탄생하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1977년 <누나의 영광>으로 소년한국일보 신인공모전에 당선된 그는 스포츠 관전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농구를 좋아해 고향인 마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경기를 봤다. 그러다가 한 농구여자국가대표선수와 친구를 넘어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어느 날 그의 연인이 근사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만나는 걸 본 그는 자격지심에 빠졌다. 20대의 전반기를 함께 한 연인은 떠나가고, 김민기는 문하생과 결혼했다. 당시 배금택 스토리를 쓰던 김민기는 이현세와 만나 <공포의 외인구단> 스토리를 설명했다. <공포의 외인구단>은 한 마디로, 엄지에 대한 까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김민기의 감정이었다. 이현세는 “스토리가 좋다. 장편으로 제작하자”고 김민기에게 제안했다.
젊은 피로 뭉친 김민기와 이현세의 의기투합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박을 만들어냈다. 김민기와 이현세는 훗날 <공포의 외인구단> 저작권 및 수익분배 문제로 법적소송까지 가며 다퉜다. 이현세는 김민기가 원하는 액수를 보상금으로 주고 인간적으로 결별했다. 김민기는 지금도 “나를 알아봐준 이현세에게 고맙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운명을 함께 한 작가 간 애증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만화계에서 김민기의 주가는 상한가를 쳤다. 그는 이현세 외에 <왕 불청객>, <불청객의 러브스토리>, <폭풍아>, <노래하는 불청객> 등 1980년대 ‘불청객’ 시리즈 일부를 맡아 고행석의 전성기를 함께 했다. 당구를 치다가 스토리를 하나 쓰고 다시 당구를 쳤다는 김민기의 에피소드도 유명하다. 하지만 고행석과도 이별의 끝은 좋지 않았다.
대본소 만화가들이 확실한 흥행을 위해 기용한 만화스토리작가로는 박하(본명 박찬호)를 꼽을 수 있다. 무협만화로 두각을 나타낸 박하는 1980년대 무협만화가로 변신한 이재학, 황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실제로 <무림대천하>(1981), <검신검귀>(1987), <추혼> 시리즈(1990~1999) 등 이재학의 대표작 대다수와 황재의 대표작 <소림108권객전>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1985)의 스토리를 써 장태산을 대본소의 인기작가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만화가 박부길의 문하생으로 만화를 시작한 박하는 이후 만화가 유효종에게 스토리 능력을 인정받아 그에게 만화와 스토리를 제공했다. 당시 원고료는 데생이 권당 1만원, 스토리가 3000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폐결핵에 시달리던 터라 일을 많이 할 수 없었고, 스토리를 한 달에 9권이나 썼지만 공장 공원 월급 밖에 안 되는 돈을 쥐었다. 게다가 동네야구 도중 오른 팔목이 부러져 만화를 그릴 수 없게 됐다. 박하가 전업 만화스토리작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다.
그는 역량 있는 만화스토리작가를 과감히 고용한 허영만과는 1990년대 들어 손을 잡았다. 박하와 허영만의 궁합도 나쁘지 않았다. 1990년대 X세대의 상실감을 그린 <비트>(1994)는 200개 타이틀이 넘는 허영만의 라인업 중 대표작의 오를 만한 작품이 됐다. 그 후 두 사람은 <짜장면>(1998)을 함께 했다.
그의 역량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포츠신문의 장편만화 연재에서도 빛났다. 1990년 일간스포츠가 가판에만 끼워주는 만화부록을 제작하면서 이재학과 박원빈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이재학의 무현만화 <자객가도>, 박원빈의 현대물 <광풍도시> 모두 박하의 스토리였다. <자객가도>는 ‘최평환’이란 기존 필명으로, <광풍도시>는 ‘박하’라는 새 필명으로 나갔다. ‘박하’라는 필명은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에서 따온 이름으로, 감히 같은 한자를 쓰지 못하고 ‘賀’를 ‘河’로 바꾸어 썼다.
1999년 이현세 화실의 에이스 출신 만화가 김일민이 박하의 스토리를 받아 그린 일간스포츠 연재만화 <빅리거>는 당시 탄탄한 미국 메이저리그 취재와 구성으로 화재를 모았다. 박하는 사람 만나는 걸 즐기지 않아 만화스토리작가 동료들 사이에서도 ‘독고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간스포츠에서 만화전문기자로서 <빅리거> 담당자였던 필자가 본 그는 매우 차분하고, 점잖다. 작품으로만 말하려는 완벽주의, 작가로서의 자존심 등이 존경스러운 작가다.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루퉁, 랭보, 로트레아몽 등에 심취한 김세영은 허영만이 이현세와 함께 작품성, 흥행 면에서 양대산맥이 될 수 있는 무게감을 부여했다. 허영만의 1980년대 히트작 <카멜레온의 시>(1986), <고독한 기타맨>(1987), <오! 한강>(1988), 1990년대 히트작 <벽>(1990), <미스터Q>(1993), <닭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안온다>(1994), <사랑해>(1998), <타짜>(1999) 등이 김세영 스토리를 바탕으로 했다. 허영만의 작품에서 짙은 허무주의와 광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김세영의 숨결이다. 김세영은 콘티를 직접 연출한다. 모두들 만화스토리작가가 시놉시스만 쓰는 사람인 줄 알고 있다는 점이 그의 직업상 불만사항이다. 그는 “<타짜>의 남녀 정사 장면에서 새와 멧돼지가 날아가는 배경이 있다. 그 아이디어를 콘티에 써넣고 칸까지 연출한 사람이 만화스토리작가임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허영만은 그 공로를 인정해 만화가 중 최초로 스토리작가 김세영의 이름을 표지에 밝히고 <오!한강>을 연재했다. 하지만 김세영은 항상 마감시한까지 원고를 넘겨주지 않아 허영만의 애를 태웠고, 그것이 허영만과 결별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무협스토리작가들의 만화계 진출
만화가들은 재능 있는 만화스토리작가를 영입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나섰다. 1980년부터 소년동아일보에서 <돌배군>을 연재한 신영식의 경우 1986년 자신의 만화책에 스토리작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스토리작가를 모집한다는 허영만의 광고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그 무렵 대본소에선 고행석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년 동안 소설만 썼던 최금락이 그 광고를 보고 신영식을 찾아갔다. 최금락과 대화를 나누고 작품을 살펴본 신영식은 “돈이 필요한가? 50만원이면 되겠냐”면서 “월 말일에 돈 받으러 오라”고 말했다. 그 때 신영식 화실에는 만화스토리작가가 절실했다. 화실 문하생이 교회전도사를 겸업하는 스토리작가에게 한 주일에 틈틈이 태릉에서 전곡까지 원고를 받으러 다녔다. 한 마디로 스토리 공급이 잘 되지 않아 화실 문하생들이 놀고 있는 실정이었다. 최금락은 보름 후 고행석 풍의 버전으로 두 권을 써갔다. 신영식은 처음에 권당 8만원을 받다가 10만원, 15만원으로 올려 받게 됐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까지 호황을 맞았던 국내 창작 무협소설작가들의 만화스토리작가로의 전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1983년 <공포의 외인구단>의 폭발적 인기를 계기로 만화가 대본소에서 무협소설을 밀쳐내고 헤게모니를 잡았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대본소 무협소설이 크게 퇴조했다. 무협소설 <호림(虎林)> 시리즈로 인기를 누렸던 대망(대룡)출판사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고 무협소설작가들을 모아서 만화스토리를 쓰게 했다. 1970년대 말부터 인기를 모은 사마달, 금강, 검궁인, 야설록 같은 무협소설작가들 중 사마달, 야설록은 대본소에서 만화스토리작가로서 독립적 지위를 갖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만화스토리작가의 몸값은 하루 아침에 껑충 뛰었다. 대망출판사의 임현승 사장은 고용한 만화스토리작가에게 권당 100만원의 고료를 주었다. 출판사가 만화스토리를 사서 그림 작가를 붙이는 식으로 공장형 제작시스템이 구축됐다. 강촌, 조명운, 조명훈, 김현 등이 이 무렵 등장한 만화가들이다.
만화스토리 제작도 더욱 분업화됐다. 출판사는 20~30명의 스토리작가를 모은 후 메인 작가에게 첫 권을 쓰게 하고 여러 명이 나머지 권들을 나눠 맡게 했다. 그 중에서 사마달이 발군이었다. 하지만 공장형 시스템도 곧 한계를 드러냈다. 스토리가 야해지고 비슷비슷해지면서 매출이 떨어졌다.
1980년대 초반 대망출판사 임현승 사장이 스카우트 한 작가들을 모은 사무실의 관리자로 10개월 동안 일하기도 한 만화스토리작가 박하는 “만화가는 작품에 전혀 손대지 않고 공장 경영만 하는 게 나는 너무 싫었다”면서 “작가 입장에서도 그런 시스템이 싫다. 스토리를 주면 데생 다섯 명이 달라붙어 그리기 때문에 그림에 일관성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즉 공장 시스템은 실력 있는 한 두 명이 모든 작품에 개입해 전체를 균질하게 만든다는 발상을 현실화한 것이다.
대망출판사를 벤치마킹해서 서울창작이란 스토리작가 집단이 형성됐다. 일군의 무협소설작가들로 구성된 서울창작은 만화스토리가 필요한 출판사 혹은 만화가를 상대로 무협만화 스토리를 팔았다. 그 중 유광남이 서울창작의 비즈니스를 맡았다. 각 판매의 수익 중 10%는 서울창작 공동운영기금으로 활용했다.
무헙소설 출신 만화스토리작가 중 야설록이 처음으로 독립했다. 삼양출판사 오명천 사장이 자금을 대고 야설록 브랜드를 키웠다. 야설록은 권당 200만원씩 월 30권을 썼다. 야설록의 수입은 월 6000만원이었다. 야설록과 삼양출판사의 동행은 2년으로 그쳤다. 자신감을 얻은 야설록이 ‘야컴’을 설립해 나갔기 때문이다. 야설록은 후에 영화 <실미도>로 유명해진 스토리작가 김희재를 야설록프로 시나리오 팀장으로 기용해 이현세의 <엔젤 딕>(1992), <남벌>(1993) 등의 스토리작업에 투입했다. 그러자 삼양출판사는 야설록 대신 사마달을 잡고 투자했다. 결국 사마달도 독립했다.

대본소만화를 대표하는 현대물 <도시정벌> 시리즈의 스토리작가 신형빈 역시 1980년대 후반 무협소설을 쓰다가 만화가 안춘회와 일하며 만화계에 들어왔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스토리의 힘으로 <도시정벌>을 히트시킨 후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한편 최금락과 신영식의 동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금락은 야구만화 <날개 달린 망아지> 등 세 타이틀을 하고, 잡지만화로 넘어갔다. 신영식이 단행본 제작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최금락은 ‘오수’란 필명으로 주간만화에서 <어느 개인 날 아침>(1988), 아이큐점프에서 <천재들의 합창>(1990) 등을 발표하며 만화스토리작가로서 커리어를 이어갔다.
자기관리에 실패한 비운의 천재 노진수
비운의 천재 만화스토리작가 노진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화가 김준범은 <기계전사109> 단행본 표지 날개에 노진수를 ‘1989년 아이큐점프에 발표되었던 나의 데뷔작 <기계전사109>. …신인에게 대작 스토리를 아낌없이 써주셨던 노진수 형님에게도 감사드리며’라고 소개했다.

노진수는 1980년대 초반부터 허영만 화실에서 일하면서 만화스토리에 두각을 나타낸 작가였다. TV 화면에 안성기 얼굴이 등장하자, 노진수의 어린 딸이 착각하고 “아빠다, 아빠”라고 환성을 질렀을 정도로 인물이 훤칠했고, 만화스토리를 잘 썼다. 1987년 허영만의 만화광장 연재작 <담배 한 개피>, 어깨동무에 연재한 마라톤만화 <2시간 10분> 등이 노진수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했다. 문제는 그가 술을 잘 마시고, 부지런하지 않은 스타일이란 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진수는 후배 김준범이 허영만으로부터 독립해 데뷔작을 준비하자 스토리를 써주었다. <기계전사109>는 지금도 한국의 SF만화를 이야기할 때 회자되는 작품이지만, 노진수가 마감을 코앞에 두고 스토리를 보내 와서 김준범은 벼락치기로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노진수는 1990년도부터 고행석에게도 만화스토리를 팔았다. 그러나 그는 타이틀의 첫 권만 쓰고 후속 권을 작업하지 않았다. 노진수가 고행석에게 첫 권만 팔아먹고 손을 뗀 만화 타이틀이 쌓여갔다. 그는 최금락에게 첫 권만 쓴 타이틀의 후속 열다섯 권을 마무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건들건들 불청객>을 비롯해 최금락이 마무리한 작품만 세 타이틀이었다. 그는 화실에서 원고료 받는 날 포커를 해서 도리어 빚을 지기도 했다. 허영만의 <아스팔트 사나이>의 경우도 노진수가 마무리를 못한 작품이다.
노진수의 부인이 2003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황매출판사를 설립하고 귀여니의 인터넷소설 <그 놈은 멋있었다>를 출간했다. 결과는 생각지도 않았던 대성공이었다. 100만부 판매에 50억원의 수익이 발생했다. 황매출판사는 귀여니의 인터넷소설로 돈을 벌었을지언정, 좀 더 무게감 있는 책들로 곧 라인업을 정비했다. 그로 인해 출판사의 운이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정불화도 이어졌다. 노진수는 출판사 설립 후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 노진수가 취해 있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세 끼니를 막걸리로 먹기까지 했다. “딱 한 잔만 더!”가 그의 특기였다. 2007년 어느 날 저녁 노진수는 최금락과 통화하면서 “내가 말해놓고 우습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비운의 만화스토리 천재였다.
노수진와 함께 다루어져야 할 만화스토리작가는 장대일이다. 1989년 매주만화에 연재된 허영만의 도박만화 <48+1>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주로 <허슬러>(1988), <화이트홀>(1989), <안개꽃카페>(1997) 등을 썼다.
잡지·신문 연재만화시대 - 만화스토리작가도 크레딧 얻다
1990년 전후를 기점으로 잡지만화가 등장하면서 대본소 만화가들이 잡지만화 연재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일간스포츠, 스포츠서울, 스포츠조선 등 ‘빅3’가 형성되면서 스포츠신문도 만화가들의 훌륭한 연재처 역할을 했다. 만화스토리작가들도 그 배를 함께 탔다.
1980년 축구만화 <환상의 라이트 윙>으로 데뷔한 만화스토리작가 김은기는 5년 동안 만화가로 활동하다 만화스토리작가로 전향했다. 스포츠만화 스토리에 강한 그는 대본소 시절 박원빈의 <공포의 보디체크> 스토리로 나름의 성공을 거둔 후 잡지만화 연재로 옮겨 갔다. 아이큐점프 연재작인 오일룡의 <춤추는 센터포드>(1991), 장태관의 <아웃복서>(1994) 등의 스토리로 주가를 높였다. 2013년 밀러터리 소설 <유령의 핵항모> 발표한 그는 만화와 소설을 오가며 활동했다.
만화스토리작가 심경희도 잡지·신문 연재만화시대에 등장했다. 심경희는 독학으로 작가수업을 하다가 조운학의 만화스토리를 도맡으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심경희의 계보를 굳이 따지자면 아주 넓게는 허영만과 연결될 수 있다. 우선 조운학을 살펴보자. 강원도 양구 출신의 시골소년 조운학은 장태산, 황제의 문하생 생활을 거쳐 1987년 허영만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됐다. 그 후 허영만이 운영하던 대본소팀을 넘겨받은 그는 화실을 독립적으로 운영했고 심경희를 스토리작가로 기용하면서 날개를 달았다. 이 시기에 윤태호도 조운학, 심경희와 연결된다. 윤태호는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조운학 화실 문하생으로 있다가 그 다음해 데뷔작 <비상착륙>을 잡지 점프에 연재하면서 독립했다. 하지만 작가 독립이 여의치 않아 다시 조운학 화실로 되돌아간 그는 총 5년을 조운학 화실에서 보냈다.

심경희는 1993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조운학의 <휘파람> 스토리로 데뷔했고, 조운학의 일간스포츠 연재 후속작 <데드라인>에서도 호흡을 이어갔다. 심경희는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글 심경희, 그림 조운학’으로 작가타이틀에 이름을 올린 채 <휘파람>, <데드라인>을 연재했다. 1995년 소년지 찬스에서 연재한 조운학의 최대 히트작 <니나 잘해> 스토리로 심경희는 단단한 입지를 굳혔다. 심경희, 조운학, 윤태호의 인연은 조운학 화실을 축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특징은 ‘챔프’, ‘점프’ 등 일본만화잡지를 모델로 국내에서 창간된 대원씨아이, 서울문화사, 학산문화사 등의 만화잡지들이 단행본 표지에 글·그림 작가를 구분해 표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검정고무신>의 도레미(이영일), <열혈강호>의 전극진, <아일랜드>의 양경일 등은 만화스토리작가로서 브랜드를 얻을 수 있었다.
도레미(본명 이영일)은 강한 내공을 가진 만화스토리작가다. 1958년생인 그는 대본소만화 시절부터 이현세, 이상세 등의 스토리를 썼으며, 만화광장과 매주만화 등의 만화잡지를 경험하다가 1993년 소년챔프에서 연재한 만화 <검정고무신>을 성공시켰다. 이후 이현세의 스포츠서울 연재작 <개미지옥>(1998) 스토리를 맡기도 했다.

전극진은 1994년부터 만화잡지 영챔프에서 연재한 만화 <열혈강호>로 이름을 얻었다. 숭실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신조협려>, <소오강호> 등 김용의 무협소설 마니아였으며 무협작가집단인 서울창작을 드나들다가 <열혈강호>의 만화가 양재현을 만나게 됐다. <열혈강호>는 현재까지 대원씨아이가 발행하는 만화잡지 챔프에서 23년째 연재 중이다. 한국 만화계의 ‘네버엔딩 스토리’로 남게 될 듯싶다.
만화가 이태행의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고 스토리작가의 길을 걸은 윤인완은 만화가 양경일의 스토리 파트너로 판타지만화에서 독보적 위치를 구축했다. 소년챔프 연재만화 <데자 뷰>(1996)로 데뷔한 그는 영챔프 연재만화 <아일랜드>(1997), 영선데이 연재만화 (2000) 등을 거쳐 일본 쇼가쿠간 만화지 월간선데이GX에 <신암행어사>(2004)를 연재하며 정점에 섰다. <신암행어사>는 일본에서 동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류기운(본명 류지호)은 찬스에 연재된 문정후의 코믹무협 <용비불패>(1996) 스토리를 써 데뷔작부터 히트를 쳤다. 1990년대 <열혈강호>와 함께 잡지연재 신무협만화의 양대산맥을 구축한 그는 네이버웹툰에서 다시 문정후와 손잡고 무협물 <고수>를 성공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1977년생인 임달영은 잡지만화의 쇠퇴기에 돌연변이처럼 등장한 존재다. 게임적인 판타지 만화에 특화된 그는 만화스토리작가로만 규정할 수는 없으며 소설, 게임 분야의 창작과 사업까지 아우르는 전방위적 콘텐츠 기획자라고 할 수 있다. 만화에서는 대원씨아이와 학산문화사를 오가며 박성우의 <제로> 시리즈(2000), <흑신>(2004), 김광현의 <불꽃의 인페르노>(2006) 등의 스토리를 맡았다. 18살 때부터 서울창작을 오가며 창작에 관심을 보인 그는 스토리 집필 속도가 대단히 빠른 천재형이며, 웹툰 시대에 접어들자마자 웹툰 플랫폼 ‘코믹GT’를 오픈하며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 활용한 플랫폼사업을 하는 수완을 보여주고 있다.
내공의 만화스토리작가들과 웹툰시대
대본소 시대부터 치열하게 흥행과 싸우며 뒤늦게 빛을 보는 내공의 만화스토리작가들이 있다. 일판만화에서 글을 쓰던 이화성은 1990년대 후반 무협만화가 하승남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꼴통> 시리즈의 스토리로 하승남을 부활시켰다. 이후 영화 쪽에 뛰어든 그는 영화 스토리를 스물다섯 편이나 계약하고 2006년 영화 <흡혈형사 나도열>의 스토리도 맡았으나 영화계의 계약관행에 질려 만화계로 복귀했다. 웹툰의 시대를 맞아 그는 유료 웹툰플랫폼들에서 <손맛>, <목줄> 같은 성인 취향의 웹툰으로 경쟁력을 뽐내고 있다.
무협소설가 출신인 정기영은 이재학과 고행석 등과 일하다가 허영만의 <오늘은 마요일>(1995)을 썼다. 그 역시 이화성과 마찬가지로 상업무대에서의 오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백승훈의 <총수>(2014) 등을 발표하며 유료 웹툰플랫폼에서의 생존을 확보했다. 현 한국만화스토리협회장.
강촌, 강철수 등과 일하며 대본소를 경험한 조성황은 강촌의 스포츠서울 연재만화 <호모사피엔스>(1991), <혈맥>(1994)의 스토리를 집필했으며, 현재도 도박, 성형, 낚시 등 분야의 전문만화들을 창작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이현세, 허영만과 작업한 일군의 만화스토리작가들도 있다. 임광묵의 대표작 <교무위원>(1999) 스토리를 쓴 최성현은 이현세의 <버디버디>(2007), <창천수호위>(2008) 등의 스토리 작업을 했다. 데뷔 초기 최금락, 하승남 등과 교류한 그는 스포츠물을 좋아해 이현세의 골프만화 <버디버디> 집필에 참가했고, <버디버디> 후에는 소설 및 영화 <역린> 각본을 쓰는 등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상훈은 이현세의 <비정시공>(2010), <굿바이 썬더>(2014)를 썼으며, 장상용은 이현세의 복싱만화 <코리안 조>(2014)를 비롯해 최훈의 개그만화 <주르날라리아>(2006), 김성모의 범죄액션물 <무각유전자>(2012), 정민아의 클래식음악 웹툰 <마에스트로>(2014) 등 다양한 영역의 작품을 집필했다. <식객>(2003)을 통해 허영만과 만난 이호준은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2011), <커피 한 잔 할까요>(2015)까지 허영만의 스토리작가로 동행했다.

이종규는 출판만화부터 웹툰까지 힘 있게 내달리는 만화스토리작가다. 그는 김용회의 막걸리만화 <대작>(2010), 이윤균의 액션물 <전설의 주먹>(2011), 두엽과 영인의 맞춤양복만화 <신사의 집>(2014) 등 다양한 소재를 밀도있게 작업했다.
만화스토리작가들이 꿈꾸던 시대가 성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만화계 내부에서 더 커지고 있는 만화스토리의 중요성과 비례해 만화스토리작가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향상됐다. 크레딧, 저작권, 수익분배 등 만화스토리작가들의 권리도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작품 외적 문제로 그림을 담당하는 만화가들과 갈등해야 할 여지도 줄었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이나 일본에서 만화스토리작가들이 상당히 존중받는 수준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럴수록 만화의 선장인 스토리작가의 어깨는 더 무겁다. 생사를 같이 한 선원들이 거친 바다를 뚫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게 할 책임이 선장에게 있는 것이기에. 우리 만화스토리작가들이 21세기 콘텐츠·스토리 대항해의 시대에 가슴을 펴고 멋진 작품을 써내기를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를 그대, 만화스토리작가에게 바친다.
‘오 캡틴! 마이 캡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