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실로 엄혹한 정치의 겨울을 지나 보내고 있다. 정치가 구멍 나 모든 이슈가 정치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시기기도 하고, 또한 그렇기에 오히려 정치에서 눈을 돌림으로써 구멍을 키워선 안 되는 시기기도 하다. 시민들은 이제 대의해 두었던 중앙정치와는 별개로 그 스스로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의 무엇이 한 사회를 어떻게 좌우하는지를 알 필요를 느끼고 있다. 매주 주말 백만 여 촛불이 쏟아져 나온 광장은 비단 분노의 집결지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장소이자 토론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만화 업계인으로서는 참으로 픽션이 감히 현실을 이길 수 없을 듯한 시국인지라 만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엔터테인먼트를 논함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가 끊임없이 고민스럽다. 하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겨울을 잘 보내 좋은 봄을 만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기에 함께 읽어 볼만한 만화들을 골라 보았다. 다만 본격 정치 드라마는 일부러 피했다. 최소한 지금 시점의 우리에겐 뉴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 <북해의 별> 김혜린(1983년작) / 복간판 전 8권 완결(길찾기, 2005)
<북해의 별>은 <비천무>, <불의 검> 등 굵직한 대하 서사극을 그려 온 김혜린 선생의 데뷔작이다. 시대 격변기에 휘말린 인물들을 등장시켜 죽도록 고생시키기로 정평이 나 있는 김혜린 월드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자, 민중, 시민의 힘을 확인할 때마다 다시금 꺼내들게 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18세기, 북해 연안에 자리한다고 설정된 가상 왕국 보드니아를 무대로 삼는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당시 대부분이 왕정이었던 유럽 각국은 자국에도 혁명의 불길이 옮겨 붙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막으려 해서 막히는 게 아닌 것이 시대의 흐름. 보드니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격랑의 한 가운데에 한 젊은이가 휘말린다. 외모도 뛰어나고 머리도 좋고 카리스마까지 발군인 왕가의 외손 출신 해군 장교 유리핀 멤피스. 뭐 하나 빠질 것 없고 그저 부러움만 살 만한 인물인 유리핀은 심지어 지도력까지 뛰어나 많은 이들의 기대와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도 있듯 유리핀은 출중함을 시기한 자들이 씌운 누명으로 말미암아 반역자로 몰리고 만다. 해적 소탕 과정에서 정부 고위층과 해적과 유착했다는 비밀문서를 발견했다가 새 국왕과 대신들에게 모함을 받은 것이다.
연인과도 헤어져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다던 감옥 깊숙한 곳으로 끌려 들어간 유리핀. 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지도력과 카리스마가 어딜 가질 않아, 결국 그 안에 잡혀 있던 이들을 동지로 삼아 탈출한다. 이후 잠시 해적 노릇을 하지만, 유리핀은 자신을 버렸던 나라를 버려두지 못하고 결국 나라로 돌아가 왕족과 귀족의 부조리한 억압을 견디다 못해 저항을 시작했던 시민들 속으로 들어간다. 시민들의 대항 한 가운데에서 유리핀은 그 자신이 왕족이면서도 일개 시민으로서 시민들의 움직임을 이끌어가게 된다. 그 결과 보드니아에도 시민 혁명이 일어나 구 체제가 무너지고 만다.
<북해의 별>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고작 3년여밖에 되지 않았던 그 시점에 시민혁명을 다루는 대범함을 보인 작품이다. 그것도 심지어 ‘성공한’ 시민혁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북해의 별>이 필독서처럼 여겨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까닭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 기인한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해의 별>이 지금까지도 명작 소리를 들으며 회자되는 까닭은 단지 ‘성공한 시민혁명’을 다뤘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시민혁명이 성공한 후 유리핀이 선택한 행보 때문이다. 유리핀은 그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기보다 평민으로 남는다.
실제 역사는 잔인하게도 세상을 뒤집은 자들이 새로운 세상을 이끈다는 명목으로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었던 자들이 공포정치를 펼치다 서로 죽고 죽이고 난 뒤 맞아들인 시대가 나폴레옹 황제 시대였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시민 혁명은 새로운 지배 체제를 만드는 과정이라기보다 인간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선을 긋는 시대의 분기점이란 데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즉 지배자가 바뀔 뿐인 혁명은 반드시 반작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며, 본질은 민중을 재산이 아닌 인간으로 인지하고 모두가 동등함을 재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체제가 아무리 민주주의로 바뀌어도 사고 구조 자체는 여전히 봉건적이었던 결과를 우리는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너무나 잘 보아 왔다.
2016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바로 그 봉건적 사고의 정점에 서 있던 마지막 우상이 무너져 가고 있는 과정이다. ‘개돼지’ 취급을 당하던 민중의 폭발이 결국 반인반신의 일족으로 신격화한 아이콘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유리핀의 선택을 다시 한 번 보자면, 자기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고 더 이상을 탐하지 않았다. 이상에 지나지 않을 뿐일지 모르겠으나, 결국 혁명 이후의 모든 흐름은 시민, 민중의 몫이어야 한다는 선언과도 마찬가지다. 혁명 이후, 많은 나라는 민중의 선택이 정치에 반영되는 대의제 체제를 정착시켰고 우리 또한 껍데기나마 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시민, 민중의 뜻에 동조하고 그들의 마음에 동감할 줄 아는 이들이 선택을 통해 권력을 위임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았던 까닭은 정치인이 다 똑같은 족속이어서가 아니라 어느 쪽이나 정치인을 지도자로 인식한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파를 막론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정치혐오와 대립구도, 정치 몰이해를 부추겨온 까닭 또한 그 편이 자기 위치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단언하건대 거기에 시민은 없다.
촛불이 또 하나의 시민 혁명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지금, 우리는 <북해의 별>의 유리핀을 통해 다시 한 번 점검해야 한다. 우리는 백마 탄 초인과 같은 ‘지도자’를 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삶을 알고 존중하는 ‘민주주의 정치인’을 원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 대의하는 주체는 시민이라는 사실을.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금 얼마든지 방치된 채 살처분 당하는 개돼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새벽의 연화> 쿠사나기 미즈호 / 19권까지 출간 중 / 학산문화사
<새벽의 연화>는 애니메이션화한 인기 일본 소녀 만화다. 근래 등장한 작품 가운데에서 1990년대 일본 소녀 만화의 절정기를 다시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장편 연재작. 하지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재밌게도 묘하게 정치극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무대가 되는 고화 왕국은 왕족인 ‘하늘’을 비롯해 불, 물, 바람, 땅 부족으로 이뤄져 있는 부족 국가다. 이 왕국의 유일한 공주인 연화는 선대 임금의 아들인 세 살 연상 ‘수원’을 좋아할 뿐인 천진난만한 철부지. 하지만 열여섯 살 생일, 축하받고 행복하면 그만이었을 그날 연화는 졸지에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성밖으로 도망 나가는 신세가 된다. 더 큰 충격은 바로 임금을 살해한 자가 자신이 가장 연모하던 수원이었단 사실.
비극적인 사태 앞에 소녀는 졸지에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운명만 남은 듯해 보인다. 하지만 연화는 아무 것도 못한 채 호위무사인 ‘학’에게 의지해 덜덜 떨고 있는 소녀는 아니었다. 마냥 철부지처럼 보이던 연화는 운명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가면서 곧바로 다음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다. 한데 이 작품이 재밌는 건 이 지점이다. 작품의 진행 방향은 곧장 ‘쫓겨난 공주가 아비를 죽인 원수의 목을 따기 위해 세력을 길러 쳐들어가 결국 정의는 이겼다는 선언을 한다’로 달려가지 않는다. 연화는 숨어 살던 신관에게서 건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용의 전사들을 찾으라는 말을 듣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찾고 설득하고 마음을 얻어간다. 몸도 사리지 않고, 아버지 임금이 금지했던 무기까지 잡아가면서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진정성에 감화되어 모든 일행이 모인 시점에 연화는 막상 목적지를 수도인 비룡성으로 삼지 않는다.
<새벽의 연화>에 무게감이 실리는 건 여기부터다. 단지 인물들의 과거가 어떻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얼마나 다면적인지를 연화를 통해 비추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공주로서의 삶 이면에서 민중들은 아버지를 향한 나쁜 평가를 쏟아내고 있었고, 보이지 않던 곳의 삶은 피폐하기만 하다. 탐관오리가 있고, 악독한 마음을 품은 무리도 있으며, 반역을 꾀하는 이들도 있다. 연화는 용의 전사라는 강력한 판타지 파이터들을 동원해 임금이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하지 않고, 밑바닥에서 자기 정체를 숨긴 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 시작한다. 왕권이 쉬 닿지 않아 보이는 곳을 돌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기근과 비위생적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실제의 권력자들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방책을 취하기도 한다. 성을 공격하는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민생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치라면 어릴 때 실컷 해 봤으니 괜찮아요. 그 때 낭비한 물건과 버린 물건을 이곳에 가져왔더라면 좀 더 평등한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지만”이란 대사를 읊는 (구)공주라니! 자기 아버지의 치부거나 잘못으로 말미암은 오류들에 눈돌리지 않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연화의 모습은 그야말로 정치인이다. 하지만 일행에게도 만나는 사람에게도 격의나 신분 의식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 결과 연화는 자신이 어느 정도나 아는지 모르겠으되 나라 안에 적잖은 흐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있다. 연화의 적이 된 수원 또한, 자기 위치에서 자기 이상에 맞게 나라를 재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연화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다. 놀랍게도 연화에게 지금 수원은 원수이자 적이 아니고, 연화의 관심 또한 ‘나라’와 ‘백성’이며, 수원의 역할에 관해 일면 납득하고 있는 부분까지 있다.
물론 이들은 분명 원수 사이일 수밖에 없는 이상 극이 진행되며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할 부분이겠으나, 최소한 지금 시점에서 연화의 행보는 복수를 위해 날을 가는 공주가 아니라 정치인에 가깝다. 소녀 만화라는 틀 안에서 ‘정치는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가, 백성을(민중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고민케 하는 작품이란 점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북해의 별>과 함께 읽어 보면 미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작품이다.

△ <원피스> 알라바스타 편 오다 에이이치로 / 대원씨아이 / 총 83권 중 18권~24권
<원피스>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끄는 만화다. 해적왕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한 소년이 동료를 모아 모험을 떠나는 전형적인 일본 소년 만화의 정석. 최근 전개야 갈수록 강한 적이 나온다는 에스컬레이터 노선이 지나치다 못해 적잖게 독자를 지치게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소위 ‘원나블’(원피스/나루토/블리치)의 선봉에서 여전히 일본 만화를 이끌고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원피스>를 두고 출판사는 미국 신문 광고 지면을 써서 “어이 세계! 이게 망가다!!(HEY WORLD, THIS IS MANGA!!)”라고 호기롭게 소리칠 정도.
한데 나는 <원피스>를 볼 때면 이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 속이 이만큼 정치적 은유를 강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최근의 전개는 초인전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세계 정부와 그 정부의 힘을 뒷받침하는 해군의 존재, 그 권력의 공백마다 자리하고 있는 해적들의 존재 그리고 그러한 대해적시대의 격랑에 휘말려 있는 나라들의 존재들은 그 자체가 끊임없이 국가 시스템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들이 가장 농밀하게 집결된 편이 바로 알라바스타 편이다.
<원피스>의 많은 회차가 흥미진진한 전개와 능력자들의 싸움 구경으로 점철돼 있지만 알라바스타 편은 그 와중에서도 유난히 정치극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편이다. 나라가 있고, 그 나라에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이 사태를 빌미로 정체불명의 세력이 불법은 아닌 형태로 들어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나 이미 들어온 세력을 없애긴 어렵다. 상황을 파악한 영민한 왕녀는 문제 해결을 위해 나라에 들어온 세력의 한 가운데에 잠입해 말단 행세를 자임하지만 왕녀 한 명과 충직한 부하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하지만 여기에 루피 일당이 끼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바로크 워크스라는 ‘회사’ 형태로 들어온 세력의 우두머리는 세계 정부에서 입지를 인정받은 ‘합법 해적’ 칠무해 가운데 하나인 크로커다일. 이들의 목표는 결국 왕국을 뒤집어 엎어 나라 자체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합법의 형태로 들어와 왕족을 향한 원망과 증오를 키우고, 반란을 획책하며, 이들 사이에 들어가 이간질을 서슴지 않는다. 싸움을 멈춰야 한다는 왕녀의 목소리는, 이미 어쨌든 눈앞에 드러나 보인 사실(!)로 말미암은 분노를 막지 못했다. 분노를 조장한 자는 안전한 곳에서 웃고 있으며 들이닥치는 이들을 막아서야 하는 왕궁의 입장또한 얄궂다. 하지만 크로커다일은 루피 일당이라는 불확실성을 간과했고 결국 그로 말미암아 모든 계획을 망치게 된다.
알라바스타 편은 굉장히 많은 정치적 은유를 담고 있다. 특히 정보를 조작하고 재포장해 내놓음으로써 이간질을 하는 모습, 악의적 프로파간다를 통해 선동하는 모습은 악마의 열매라는 판타지적인 설정을 이용하고 있으나 실상 지금 우리네 현실 속에서도 비일비재하게 활용되어 온 일이다. 구도에 차이가 있다면 우리 정부가 한 일이 크로커다일이 한 일과 비슷했다는 것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민중의 분노를 유도하는 과정에 흩뿌려진 정보는 그럴싸한 현상과 현실적 비극에 섞여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된다.
단순한 사실에 몇 가지 거짓을 섞어 진실을 왜곡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가 즐겨 쓴 것이다. 비판적 시각과 다양한 측면의 정보를 취합하면 진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지만, 권력을 획득한 작정하고 정보를 조작하고 퍼트리기 시작하면 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최소한 이제는 우리도 안다.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 언론이 민중의 편이 아니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권력은 현실 속에서 위선이나마 선의 모양새를 취하려 들려는 이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드러내놓고 악을 선택하는 이에게 주어지면 안 되는 것이다. 지난 정권이었던 2009년 5월 한 정부 부처가 홍보 담당자를 교육한다며 냈던 자료에 실려 있는 문구들을 다시금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절대 표 안 나게 유학과 연수, 정보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주요 기자와 프로듀서, 작가, 행정직의 관리가 필요하다” “멍청한 대중은 비판적 사유가 부족하므로 몇 가지 기술을 걸면 의외로 쉽게 꼬드길 수 있다”
알라바스타에는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왕족의 역할로서 국민을 먼저 치지 않으려 했던 임금과 진실에 접근하려 했던 왕녀가 있었다. 하지만 루피 일당의 역할이 없었다면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루피의 역할은 단지 백마 탄 초인들이 아니다. 초인적인 힘으로 그려져 있긴 하나, 이들은 싸우지 못해서 환장한 전투성애자들이 아니다. 동료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움직이긴 하였으나, 그 동료인 왕녀의 목적의식은 백성에게 올바른 정보를 닿게 함으로써 전쟁을 멈추는 데에 있었다. 현재의 우리에게 루피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언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언론 가운데 백성, 아니 이제는 시민들의 목적의식에 부응하는 이들이 누군지,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