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 쿡방이 우리 사회를 휩쓴 지 오래다. 요리 프로그램은 오래 전부터 편성되었지만, 주로 아침시간 대에 주부들을 타켓으로 요리연구가가 조리법을 알려주던 것이 전부였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교양·정보 프로그램의 주된 정보도 음식과 요리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며, <냉장고를 부탁해>, <집밥 백선생>, <맛있는 녀석들>, <삼시세끼> 등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한 예능이 대세다. 아프리카 tv와 같은 1인 미디어의 등장은 먹방 현상을 더욱 부추겼다. BJ와 시청자의 쌍방향 소통은 미각을 시각으로만 느껴야 하는 시청자들의 고통(!)이 일시적으로나마 해소되는 듯한 만족감을 느끼게 했다. 셰프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자신의 이름을 건 각종 브랜드를 런칭하거나 고객을 모으는 집객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먹방, 쿡방 열풍은 비단 우리 사회에만 나타난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우리와는 배경이 다르지만, 2005년부터 시작한 FOX사의 <헬스키친>은 고든 램지라는 스타셰프를 탄생시키면서 리얼리티쇼와 쿡방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한국의 먹방, 쿡방 현상과 보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는다면 바로 일본일 것이다. 한국보다 앞서 일본은 구루메 혹은 쇼쿠츠우(食通) 열풍과 함께 푸드파이터들이 등장했다. 구루메란 음식에 대한 재료, 조리법, 역사 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거나 미식가처럼 맛을 평가하는 사람, 또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본의 구루메 붐은 장기 불황과 다양·다각화된 개인의 취향에 의해 등장한 문화현상으로 분석된다. 일본의 장기화된 경제 불안은 소비위축을 가져왔고 불확실성의 시대에 개인들은 무리해서 돈을 쓰기 보다는 작은 사치를 통해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을 택했다. ‘나를 위해 한 끼의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자’는 작은 사치는 비싸더라도 기꺼이 맛집에 시간과 돈을 지불함으로써 일종의 자신에 대한 투자로 생각한다. 또한 재료와 조리법에 따라 만들어지는 다양한 요리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다각화된 개인의 취향을 저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예를 들어 <맛있는 녀석들>은 4인4색의 먹방, 쿡방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동일한 음식을 두고도 각자 먹는 방식을 소개하고 각자의 언어로 평가하며, 마지막에는 자신들이 준비해 온 재료를 가미해 새로운 맛을 내는 요리로 재탄생 시킨다.
△ 코미디 tv, <맛있는 녀석들>의 썸네일
이처럼 음식은 단순히 생명연장을 위해 먹는 행위가 아니라, 음식을 통해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고 누구나 편하게 음식에 대해 평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도 한다. 이 때, 인터넷은 바로 이 소통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블로그, SNS, 커뮤니티 등을 통해 맛집 정보나 조리법을 공유함으로써 음식에 관한 정보가 풍부해지고, 이는 점차 구루메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구루메 열풍과 유사하게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 거세진 경제 불황과 불확실성, 취향의 다양화, 인터넷의 발달은 우리에게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다.
다만 일본은 구루메 붐이 불긴 했으나 그 이전부터 영화나 만화를 통해 꾸준히 음식에 관한 소재를 소비해 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데라사와 다이스케의 <미스터 초밥왕>은 대결이라는 구도를 바탕으로 음식 조리의 테크놀로지를 구현했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맛에 대한 취향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오히려 미각의 감각을 확장시켰다. “문어가 온 몸을 휘감고 있는 맛”이라든지, “마치 이 세상이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의 영혼이 된 듯하다”는 표현 등이 그러하다. 지극히 사적인 산물인 미각을 객관화 시킬 수 없을 바에야 되려 추상화시키는 전략을 통해 한 번도 실감하지 못한 상상의 저 너머로 확장시켜 버렸다. 어찌되었건 일본 요리만화에 비해 그 수와 소재의 다양화에 미치지 못했던 한국 요리만화도 먹방, 쿡방 열풍으로 인해 한층 다양해졌다. 특히 장르의 확장성과 형식의 개방성을 열어둔 측면에서는 웹툰의 인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은 음식을 타고 ; 식구(食口)가 되어 ‘먹기’ 다이앤 애커먼은 “다른 감각은 혼자서도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길 수 있지만 미각이야말로 대단히 사회적인 산물”이라고 말했다. 1인 가족의 증가로 혼술과 혼밥이 성행할지라도 한 사람의 성장 과정 속에는 누군가와 밥을 먹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식사에는 단순히 생명 유지를 위한 먹기만이 아니라 음식과 먹는 행위 안에 내재된 사회적 규범과 제도들이 한 사람의 식습관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의학자들은 가족력은 DNA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가족 공동체가 공유하는 식습관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다이앤 애커먼이 말한 미각에는 감각 외에도 음식과 먹는 행위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확장시키는 것이 미각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적합해 보인다.
인간은 지극히 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각을 공유함으로써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 많은 웹툰들이 음식과 로맨스를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혼종적 장르를 배태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흔히 식구(食口)라는 말은 한 집에 살면서 끼니를 함께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가족은 바로 한자 그대로의 ‘먹는 입’을 가리켜 식구라 일컫는다. 가족 간의 유대를 강조한 영화에서 유독 밥 먹는 장면이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는 웹툰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공복의 저녁식사>(김계란), <밥 먹고 갈래요?>(오묘), <잘먹겠습니다>(미소), <밥 해주는 남자>(김원종), <수상한 그녀의 밥상>(두순) 등 많은 웹툰에서 낯선 이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 식사 장면은 서로에 대한 어색함이 호기심, 호감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며, 관계맺기의 시작이자 웹툰 스토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때로는 음식을 앞에 두고 감정을 교감하는 연인이거나,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낯선 이를 기다리는 행위, 혹은 요리를 기다리며 맛을 상상하거나 추억을 나누는 행위 등이 먹기라는 행위에 앞서서 종종 발생한다. 설사 그것이 로맨스가 아닐지라도 함께 밥을 먹음으로써 일상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며 일종의 유사가족을 형성하기도 한다.

△ 공복의 저녁식사(김계란作, 다음웹툰), 9화(좌) / <잘 먹겠습니다>(미소作, 다음웹툰), 12화(우)
일하고 먹고 일하고 : 성인(成人)의 ‘먹기’ <고독한 미식가>와 <와카코와 술>처럼 먹기의 행위가 오로지 혼자만의 의식처럼 여기는 만화도 있다. 물론 이들도 어릴 땐 ‘밥상머리교육’을 받으며 사회구성체로서의 먹기 행위를 체화했겠지만, 성인이 된 이들의 먹기는 너무도 경건해서 일종의 의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주어진 이 경건한 행위도 결국은 노동이라는 사회화 과정이 수반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를 발한다. 먹기의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성화(聖化)된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이 경건한 의식이 끝나면 다시 노동의 시간이 돌아온다.
<술꾼도시처녀들> 역시 노동이 끝난 성인이 오로지 자신들에게 집중하는 의식을 행한다. 와카코와 다른 점은 그녀들은 진창 마신다. “요술의 시대(요리와 술)”, “본격음주 일상툰”을 표방한 이 웹툰은 각기 다른 직업군과 성격의 여성들이 오로지 술 하나로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와 술이 주는 위안은 그녀들 뿐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공감을 얻기에 충분했다. 음식 자체만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느끼는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를 술 한잔으로 가볍게 털어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때로는 낯선 이들을 더욱 끈끈하게 이어주기도 한다. 결국 인간의 먹기 행위는 그것이 혼술이든 혼밥이든 말술이든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치유된 이들이 다시 사회적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재생의 의례다.
△ <술꾼도시처녀들>(미깡作, 다음), 예고편
부엌은 여성의 전유물? ; 요섹남의 ‘요리하기’ 최근,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요섹남’이 신조어로 등장했다. 20년 전, 여인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벽을 치며 안타까워하던 이덕화의 ‘멋진남자’ 카피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후진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발화가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이젠 바야흐로 요섹남의 시대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부엌은 여성의 전유공간으로 인식되어왔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육아와 함께 음식은 늘 엄마의 몫이었고, 가족의 건강, 위생 역시 엄마의 책임이었다. 20세기 초의 현모양처 담론과 함께 모성의 역할은 더욱 강요되었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의 상당한 책임이 여성에게 지워졌다. 부엌은 온전히 여성의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부엌에서 발생하는 행위의 상당수도 여성의 노동이었다.
그런데 이 금남의 공간이 드디어 빚장을 풀었다. 남성이 들어오는 것이 허용된 것이다. tv속 요리연구가는 어느새 남성 셰프들로 채워졌고, 요리 관련 상품 광고는 여성 보다는 남성 스타가 선호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이 현실과는 괴리된 대리만족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여성들의 전유공간으로 인식된 부엌의 고된 노동을 남편이 대신해주었으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현현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어찌되었든 여성의 욕망이 틈새를 비집고 공적담화로 발화되는 것은 좋은 현상임엔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이 웹툰에서도 두드러지는가는 판단유보다. 여성들의 욕망이 구현된 요섹남을 웹툰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남성 캐릭터는 여성이 차려준 요리를 먹거나, 음식에 대한 정보와 비평에 집중된다. 웹툰에서 여성은 주로 요리하는 행위에, 남성은 먹는 행위로 등장한다. <밥 먹고 갈래요>와 <공복의 저녁식사>, <잘 먹겠습니다>의 요리하는 그녀들은 모성성의 대리인들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요섹남을 주도하는 TV 시청층과 웹툰의 독자층 연령의 층위가 다르다는 점에서 가장 단순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자구성의 문제가 전부인지는 좀 더 두고 볼 문제다.

△ <밥 해주는 남자>(김원종作, 올레웹툰), 2화
여담이지만, 평소 즐기지 않는 음식웹툰들을 보면서 왜 독자들이 음식웹툰을 보는지 고민할 새도 없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비주얼들에 뇌는 식탐을 자극하고 위산은 과다분출되어 뭐라도 채워 넣어야만 했다. 그만큼 실제 음식이나 사진보다 더 먹음직스러운 이미지들은 독자의 뇌 속을 마구 침입해 허기진 뇌를 압도시킨다. 먹는 일만큼은 우주의 기운에 홀린 것처럼 웹툰 작가가 제시한 요리에 압도당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 끼를 권한다.
△ <수상한 그녀의 밥상>(두순作, KTOON), 124화
<참고문헌>
데버러 럽턴 저, 박형신 역,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 한울 아카데미, 2015.
다이앤 애커먼 저, 백영미 역, 『감각의 박물학』, 작가정신,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