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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상으로 떠오른 BL] BL을 이해하기 위한 넓고 얕은 리뷰 - 테마로 보는 BL

BL. 보이즈 러브, Boy′s Love, 소년애(少年愛). 남성들의 동성애를 바탕으로 하는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통용되는 말이다.

2016-11-24 김소원

BL. 보이즈 러브, Boy′s Love, 소년애(少年愛). 남성들의 동성애를 바탕으로 하는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통용되는 말이다. 특이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특히 인기가 있다. 야오이(やおい. 야마나시(やまなし, 클라이맥스 없음), 오치나시(おちなし, 결말 없음), 이미나시(いみなし, 의미 없음)의 조어)라는 꽤나 폄하적인 단어 대신 최근에는 BL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년들의 동성애를 그린 만화의 시작은 잘 알려진 대로 다케미야 게이코로부터였다. 초기 단편 작품에서 소년들의 우정이상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했고 본격적으로 ‘소년애’를 그린 작품이 <바람과 나무의 시>이다. 두 소년의 베드신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1976년 소녀만화잡지 ≪주간 소녀코믹≫에 연재를 시작하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흥미로운 것은 소녀만화에 남녀의 육체관계를 묘사할 수 없지만 남성들끼리의 사랑 묘사는 가능했던 당시의 현실에서 소년애 만화가 출발했다는 점이다. 다케미야 게이코는 2015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침대위에 남녀의 다리를 함께 그리는 것만으로도 경찰에 불려가고 작품을 출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자들끼리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라고 술회한다. 사랑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스토리를 위해 육체관계의 묘사가 필요했지만 표현의 제한으로 불가능했던 현실이 소년애 만화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때 남녀 간의 애정묘사가 자유로웠다면 소년애 만화는 나오지 않았을까? 대답은 No이다. 아마도 시기가 조금 늦어졌을 뿐 언제고 필연적으로 등장했을 것이다.
△ 다케미야 게이코, <바람과 나무의 시>
몇 년 전 어느 게시판에서 자신이 갑자기 죽어버리면 방에 있는 BL 만화와 동인지들이 걱정이라는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절대 열어 보지 말라는 유서를 미리 써두겠다, 유령이 되어서라도 없애겠다, 평소 잘 숨겨 두지만 난감할 것 같다는 댓글들이 줄지어 달렸다. 많은 여성들이 BL을 좋아하지만 좋아한다 말하지 못한다.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많은 독자들이 존재하고 그만큼 다양한 취향의 작품들이 출판되고 있다.
BL의 장르 구분은 다소 모호하다. BL은 거의 모든 작품이 주인공들의 사랑을 그리고 있어 로맨스 장르에 속한다. 그러나 ‘로맨스’만으로 독자들의 취향과 작품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은 너무 허술하다. 당연히 BL에도 다양한 하위 장르가 존재한다. 그리고 BL의 장르를 이야기하기 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공수’의 개념이다. ‘공수’란 주인공의 역할 구분이다. 공격과 수비를 이르는 攻守가 아니라 攻受로 ‘공’은 남성 역할을 ‘수’는 여성의 역할을 맡은 등장인물을 이야기한다. 간혹 주인공들의 이름 사이에 ×를 넣어 ‘커플링’을 표시하기도 한다. 즉 A와 B의 커플링은 A×B로 표시한다. 이럴 경우 반드시 공이 앞에 와야 한다. 이름의 위치를 바꿨다가는 사생결단이 날지도 모른다. 남녀 주인공을 뒤바꾸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그리고 보통 BL에서는 이들 ‘공과 수’의 성격, 외모, 직업, 나이 등의 특징에 기인하는 하위 카테고리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연하공’, ‘여왕수’, ‘꽃수’, ‘리맨물(샐러리맨물, 주인공들이 회사원)’, ‘야쿠자물’ 등이다. 일본의 경우 BL 초기작품들은 소녀만화의 일부로 연재되었고 이후 동인지로 중심이 옮겨간다. 전문 잡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상업 잡지나 단행본 보다는 동인지를 통해 시장이 성장하고 확산되었다. 한국 역시 동인지와 일본만화의 해적판을 통해 독자층이 형성되었다. BL을 상업만화시장의 규칙과 흐름으로는 규정지을 수 없는 이유이다.

BL인 듯 BL 아닌 BL 같은 너
일본에서 BL만화는 비교적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여성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남성들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BL전문 잡지에 연재되거나 BL전문 레이블을 달고 나온 만화’이다. 드물게 BL잡지가 아닌 만화잡지에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이 연재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의 경우 주인공들의 애정관계에 방점이 찍히지 않거나 애정묘사의 수위는 낮은 것이 일반적이다. 작품의 일부에 동성애 코드가 있긴 하지만 BL이라 부르기엔 모호한 작품. BL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요시나가 후미의 <서양골동양과자점>, 박희정의 ?Martin & John?, 이마 이치코의 <어른의 문제> 등이 있다.
2016년 현재 <오오쿠>와 <어제 뭐 먹었어?>를 연재중인 작가 요시나가 후미는 <베르사이유의 장미>, <슬램덩크>등의 패러디 동인지(물론 BL이다)로 이름을 알린 후 BL전문지 ≪하나오토≫에 실린 <달과 샌들>로 데뷔했다. 무성의한 듯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체와 촌철살인의 화려한 대사가 특징인 그녀의 작품은 동인지, BL전문지, 소녀만화잡지 그리고 청년지로 그 장을 옮겨도 변함없이 상쾌한 매력을 보여준다. <서양골동양과자점>은 ≪Wings≫ 1999년 6월호부터 연재를 시작한 작품으로 케이크 전문점 ‘엔틱’을 무대로 가게를 찾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케이크와 함께 유쾌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요시나가 후미가 누구인가? 프로작가로 데뷔한 후에도 자신의 작품을 패러디한 BL동인지를 꾸준히 발매했던 타고난 ‘동인녀’가 아닌가.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에는 종종 주요 등장인물로 게이가 등장한다. 엔틱의 오너인 엄친아 타치바나는 고교시절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오노에게 ‘나가 죽어. 이 호모야!!’(실제 작품 속의 대사는 더 독하다)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14년 후 타치바다는 천재 파티쉐가 된 오노와 재회한다. 오노가 이성애자인 남자들에게까지 살인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바람에 일하는 곳마다 막장 치정 사건을 일으키고 해고된 ‘마성의 게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오노의 매력이 효과가 없는 유일한 남자인 타치바나이니 이야기 속에 두 사람의 로맨스는 없지만 오노를 중심으로 그려진 몇몇 에피소드는 BL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요시나가 후미는 이렇게 자신의 오랜 팬들을 놓치지 않았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도 포기하지 않았다. 역시 영리한 작가이다.
△ 좌: 요시나가 후미, <서양골동양과자점>, 우: 요시나가 후미 원작, 한국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BL장르에 많은 편견이 덧 씌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BL장르가 주류 만화 시장에서 다뤄진 시간이 그리 오래지 않은 한국에서는 딱 꼬집어 BL이라고 정의하기엔 모호한 작품들이 많았다. BL은 웹툰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성인 취향의 작품이나 연령제한이 있는 작품이 자연스럽게 증가한 후에야 한 카테고리를 차지했다. 대상 독자들의 연령대를 세분화한 잡지와 호러 만화 전문지, 월간·격주·계간지등 다양한 순정만화 전문지가 생겨나는 와중에도 BL전문잡지의 창간은 없었다. 한국의 만화시장에서 BL은 언제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 그러던 중 반가운 작품이 등장한다. 1998년 1월 창간된 잡지 ≪나인≫에 연재된 박희정의 ?Martin & John?이다. ≪나인≫은 성인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순정만화잡지로 세련된 표지와 감각적인 작품을 통해 당시의 순정만화 팬들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던 잡지이다. ?Martin & John?은 현대 한국에서 먼 미래의 우주까지 다양한 시공간적 배경 속에 존재하는 ‘마틴’과 ‘존’을 그린 열 한 개의 이야기를 모은 옴니버스 만화이다. 다양한 에피소드 속의 마틴과 존은 친구이거나 형제, 혹은 연인이다. 특히 마틴과 존의 사랑을 그린 에피소드들은 BL의 DNA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먼 미래 지구와 외교를 수립한 별에서 조난을 당한 지구인 마틴과 투아레테르그인 존의 이야기를 그린 다섯 번째 에피소드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만석지기 양반가의 조온(성은 ‘조’, 이름은 ‘온’이다) 도령과 남사당패의 섹시한 광대 ‘마’씨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일곱 번째 에피소드를 추천한다. 박희정 만화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탐미적인 그림체는 이들 작품을 즐기는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더불어 몇몇 에피소드는 박희정 특유의 개그센스를 아낌없이 발산한다. 특히 일곱 번째 에피소드에서 조온 도령의 누나 말희의 캐릭터는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했다. 동생의 사랑을 응원하며 둘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소재로 소설 ‘夜悟異(야오이)’를 집필하는 조선시대판 동인녀로 설정한 것이다.
△ 박희정의 <Martin John>
<백귀야행>으로 고정 팬을 거느리고 있는 작가 이마 이치코는 요시나가 후미와 마찬가지로 소녀만화잡지와 BL전문지를 병행하는 작가이다. <백귀야행>과 같이 유령, 귀신, 심령 등 판타지가 가미된 작품에서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오토≫와 같은 BL전문 잡지에도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노골적인 성묘사가 부담스러운 독자들이 선호하는 ‘소프트 BL’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그 중 1995~1997년 ≪하나오토≫에 연재된 <어른의 문제>는 15년 전 게이임을 커밍아웃하고 이혼한 아버지와 아버지의 24살 연하 남자애인, 유부남인데다 전 남편의 애인의 형인 10살 연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진 어머니라는 총체적 난국의 상황을 스무 살 청년 나오토를 관찰자로 코믹하게 그려낸다. 전통적인 가족의 질서도 성별의 역할도 무너진 이 난감한 가정사는 나오토의 머리에 원형 탈모증을 만들어낼 만큼 고민거리이지만 나오토도 어른이 되면서 ‘어른의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큰 갈등도 스토리의 다이내믹한 굴곡도 없지만 잔잔하고도 중독성 있게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이마 이치코 만화의 매력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 이마 이치코 <어른의 문제>

고전은 옳다 - BL 클래식
야오이나 BL이라는 표현이 생기기 전, 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작품들이 있었다. 1970년대 중반 일본 소녀만화의 혁신을 이끌었던 여성작가를 이르는 ‘꽃의 24년 조(작가들이 쇼와24년인 1949년을 전후해 태어난 데서 만들어진 조어)’의 대표 주자인 다케미야 게이코와 하기오 모토는 소녀들의 예민한 감수성을 아름다운 소년들의 위태로운 사랑을 통해 충족시켰다.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은 1974년 소녀만화잡지 ≪소녀 코믹≫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유럽의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김나지움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던 열세 살 미소년 토마의 자살 직후 상급생인 유리에게 “이것이 나의 사랑. 이것이 내 심장소리. 너라면 알고 있을 터.”라고 쓰인 토마의 유서가 전해지면서 시작된다. 토마와 쌍둥이처럼 닮은 에릭이 전학을 오고 유리는 큰 혼란에 휩싸인다. 사춘기 소년들의 불안한 심리와 그들이 가진 상처를 유려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은 클래식답게 우아하고 부드럽다.
△ 하기오 모토, <토마의 심장>
<토마의 심장>이 옅은 수채화 같다면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는 훨씬 색이 짙다. 일본의 소녀만화사에서 동성 간의 직접적인 애정씬이 등장한 첫 번째 작품으로 야오이의 효시로 평가 받고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치명적인 매력의 금발 미소년 질베르와 성실한 소년 세르쥬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소년들의 동성애와 근친상간 등 충격적인 묘사로 1976년 연재 당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외모로 많은 이들에게 애정 공세를 받지만 추악한 출생의 비밀과 도착적인 성관계 속에 성장한 소년 질베르. 올곧은 성품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집시의 혼혈아라는 편견의 눈길과 천대를 받아야 했던 소년 세르쥬. 본인들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모순과 불합리한 규칙 속에서 치열하게 사랑하고 사그라진 치명적인 애정 관계를 그린 이 작품은 제목처럼 다분히 시적이고 서정적이다.

少年들의 사랑 - 학원·캠퍼스물
풋풋한 사랑이야기의 배경으로 학교만큼 흥미로운 공간도 드물다. 묘한 긴장감과 금기의 벽을 허무는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라면 다소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는 늘 독자들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나카무라 아스미코의 <동급생>은 학원로맨스의 대표작으로 연재당시 BL에 큰 흥미가 없는 독자들에게도 화재가 되었던 작품이다. 2008년 ≪OPERA≫에서 연재되었고 속편인 <졸업생>, 스핀오프 작품인 <소라와 하라>가 발행되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2016년 2월 개봉했다. 개봉 11일 만에 흥행수입 1억 엔을, 4월에는 흥행수익 2억 엔을 돌파했다. 소규모로 개봉한 장르 애니메이션으로는 쉽지 않은 결과이다. 밴드의 리드 보컬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쿠사카베 히카루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만점을 맞은 전교 1등 엄친아 사죠 리히토를 주인공으로 두 소년의 사랑을 그야말로 ‘달달하게’ 그렸다. 부드럽고 깔끔한 선으로 가늘고 길게 그려진 인물들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칸나누기 연출은 시원시원하며 사춘기 소년의 서툰 감정이 사랑스럽다. 상황에 따라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들의 입체적인 묘사도 즐겁다.
△ 나카무라 아스미코 <동급생>
한국 작가인 피비의 <남친 있어요>는 대학에서 재회한 중학교 동창들 사이의 사랑을 그렸다. 축구 유망주인 현호와 현호의 첫사랑 결은 교양 수업을 듣던 중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정신없이 살고 있는 결은 현호의 관심과 호의조차 버겁기만 하다. ‘첫사랑과의 재회, 가난한 여자 주인공과 그런 여자 주인공을 곁에서 끊임없이 도와주고 지켜주는 강한 남자. 좋아하는 감정을 애써 감추지만 결국 남자 주인공에게 끌리고 마는 여자 주인공’과 같은 전형적인 로맨틱 드라마의 플롯은 현호와 결을 주인공으로 푸릇하고 달콤하게 전개된다.
△ 피비, <남친 있어요.>

귀족 소년, 집사, 그리고 혁명 - 시대물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는 사랑은 애틋하다. BL 독자들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묘한 긴장감과 애절함을 남남 커플의 사랑에서 찾기도 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순애보는 독자를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래서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격차가 존재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더 매력적이다. ≪Chara Selection≫에 연재중인 히다카 쇼코의 <우울한 아침>은 엄격한 신분제가 아직 존재하던 시기 화족(서양의 귀족 작위를 도입해 만들어진 일본식 귀족) 소년 쿠제와 집사 카츠라기의 사랑을 그렸다. 출생의 비밀을 품고 있는 완벽한 남자 집사와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은 고립무원의 귀족 소년. 두 주인공의 나이와 신분의 차이는 작품 전반에 긴장감을 형성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대상의 표현이나 가문의 계승, 입신출세, 화족 사회의 모순과 위선 등을 흥미롭게 그린 수작이다. 가문과 사랑 사이에 고민하던 쿠제의 선택이 카츠라기와 부딪히며 이야기는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매우 흥미롭다.
△ 히다카 쇼코, <우울한 아침>
여기서 ‘믿고 보는’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을 한 편 더 소개한다. <제라르와 쟈크>, 잡지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BE·BOY GOLD≫에 1998년부터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소년 쟈크와 인기 ‘에로소설가’ 제라르가 주인공이다. 남창으로 팔린 귀족 쟈크와 평민이지만 소설을 팔아 부를 이룬 제라르는 구시대의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있던 혁명 전 프랑스의 사회상을 잘 반영한다. 시크하고 도도한 매력이 넘치는 두 주인공의 밀당은 코믹하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도 일품이다. 혁명이 발발하고 공포정치를 피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면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게 되는 두 사람…이라는 요시나가 후미답지 못한 진부한 결말이 되려는 찰나 반전과 웃음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스토리는 2권이라는 짧은 분량이 아쉬울 만큼 독자들을 몰입시킨다. 웃음과 극적 긴장감과 촘촘한 스토리의 밸런스를 훌륭하게 조절할 줄 아는 작가의 작품답다.
△ 요시나가 후미, <제라르와 쟈크>

BL의 정석 - 연상연하 커플
BL의 인기 장르 중 하나는 ‘연하공’, 즉 연상연하 커플을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들의 특징은 보통 연하공의 도발적인 사랑고백이나 애정표현에 대해 ‘수’는 ‘넌 아직 어려…’라며 무시하거나 관심 없는 듯이 행동한다. 어디까지나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야 하는 장르적 특성상 이러한 무관심과 거부는 결국 허물어지고 말지만 연하공이 사랑을 얻어내기까지의 과정이 관전 포인트이다. <실연 쇼콜라티에>로 유명한 미즈시로 세토나의 2005년 작 <쥐는 치즈의 꿈을 꾼다>는 대학 동아리 선배에게 품어온 오랜 사랑을 끝내 관철시키고 마는 이마가세의 집념의 사랑을 그렸다. 남편의 불륜에 대해 뒷조사를 의뢰 받은 흥신소 직원 이마가세는 의뢰인의 남편이 대학부터 짝사랑했던 선배 오오토모인 것을 알게 된다. 예상치 못했던 재회를 통해 이마가세는 오랫동안 전하지 못했던 사랑을 고백하지만 당연히 거절당한다. 결혼까지 한 이성애자인 자신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남자 후배에게 조금씩 흔들리는 오오토모의 고민과 오오토모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아마가세의 길고 긴 짝사랑이 눈물겹다.
△ 미즈시로 세토나, <쥐는 치즈의 꿈을 꾼다>
레진에서 연재되고 있는 제크의 <사랑하는 소년>도 여자와 결혼했던 남자, 삼각관계, 오랜 짝사랑 등 BL의 클리셰투성이 작품이다. 그러나 클리셰는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고 오랫동안 흥미로워 했던 요소라는 뜻도 된다. 세 살 꼬마 때부터 이웃에 살던 소년이 스무 살 청년이 되어 상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어린이에서 소년으로 그리고 성인으로 십여 년을 변함없이 마음에 두었던 사람이 결혼을 했고 모든 것을 포기 했지만 몇 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짝사랑 상대는 이혼하고 혼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은호와 그런 은호에게서 도망치려는 재하 그리고 재하와 오랜 시간 우정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준의 삼각관계는 제법 관능적이다. 저돌적인 은호의 오랜 짝사랑과 이성적으로는 거리를 두고 싶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재하의 사랑의 결말은 뻔해 보이지만 인물들의 조형미와 웹툰임에도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그려진 절제미는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한다.
△ 제크, <사랑하는 소년>

리얼 스토리
라가와 마리모의 <뉴욕뉴욕>은 남성 게이 커플의 이야기를 꽤 현실적인 시각에서 그린다. <아기와 나>로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엄마를 잃은 두 형제의 일상을 그려낸 작가 마리모 라가와가 1995년 소녀만화잡지 《꽃과 꿈》에 연재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게이에 대한 편견, 커밍아웃, 동성애 혐오 범죄, 게이커플의 결혼과 입양 등 두 주인공이 성소수자로서 부딪혀야하는 여러 문제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진지하게 그려져 있다. 경찰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자신의 성정체성을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케인과 어린 시절 창녀였던 어머니에게 버려지고 참혹한 경험 속에 성장해야 했던 멜.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난관을 만난다. 케인이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해를 얻어가는 과정이나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고 딸을 입양해 부모가 되고 함께 늙어가는 모습은 긴 여운을 준다. 소외된 사랑과 인정받지 못하는 애정관계를 진지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 라가와 마리모, <뉴욕 뉴욕>
<뉴욕뉴욕>이 허구의 이야기를 진짜처럼 그린 작품이라면 다음에 연재중인 웹툰 <이게뭐야>는 진짜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일기처럼 그리는 생활툰 장르에 속하기도 하는 이 작품은 게이인 작가와 그의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웹툰 리그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정식 연재된 작품이다. 가끔 등장하는 각종 패러디 장면이나 주인공의 외모가 미화된 극화체가 등장하는 등 연인들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발굴해낸 여러 에피소드들이 즐겁다. 그러나 실제 커플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만큼 두 사람의 커밍아웃과 아웃팅에 대한 고민처럼 현실적인 이야기도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
△ 지지, <이게뭐야>
BL이 상업만화 시장에서 한 축을 담당하기 이전부터 순정만화에는 남남 커플의 묘한 긴장감이나 과하게 아름다운 남자들이 등장했다.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남장 여자는 꽤 인기 있게 반복되는 캐릭터이다. 시청자들은 남녀의 이야기임을 알고 있지만 작중 인물들은 남성과 남성의 관계로 인지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오해와 긴장감은 조금만 방향을 틀면 BL이 가진 재미와도 상통한다. 보이쉬한 여성이나 예쁜 남자처럼 중성적인 외모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정서가 로맨스 장르에서 채워지지 않는 어떤 지점을 자극하며 BL은 독자들에게 인기 장르로 자리 잡았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만화가 존재하고 있고 BL역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아직 접해 본 적 없다면 한 작품 골라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의외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