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작가가 그리는 만화이야기2]
흔히 요즘을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 한다. 세상의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만 거기에 스토리가 가미되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토리는 인간의 삶을 성찰하고 인간의 정서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토리는 인간의 감정에 천작한다. 어떤 사물에 스토리가 붙는 다는 것은 사물의 설명이 아니라 사물과 연관된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스토리가 의미를 담보한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감정이고 인간의 감정은 재미로 귀결 될 것이다.
만화는 그 자체로 이미 스토리적이라 생각된다. 가장 자유롭고 다소 황당스럽게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표현하는 만화는, 기호학적이든 이야기적이든 이미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다 보여 지기 때문이다.
만화는 시간 흐름을 그대로 쫒아가지는 않지만 영상과 비슷한 활동사진이다. 따라서 컷 하나로 모든 걸 표현하는 카툰과는 달리 이어진 여러 컷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연결된 이야기는 구조를 요구한다. 그리고 구조는 계산된 감동을 이끌어낸다.
재미가 인간의 감정과 연관된 것이라면 이 감동 때문에 줄거리를 필요로 하고 구조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만화는 대중에 영합한 기호 예술로서 독자의 재미를 중요시한다.
이 때문에 우리 만화는 서사에 치중하고 컷 중심의 회화보다 연출 중심의 흐름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낙서처럼 자유롭게 표현하던 만화가 이야기 중심의 서사구조로 넘어가다보니 줄거리에 어려움을 겪는 작가들이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 지점 때문에 만화스토리 작가가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예전엔 전문적인 만화스토리작가가 없었다. 단지 같은 화실의 문하생이나 선, 후배 중에 줄거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곤 했을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만화가였다. 단지. 주위에서 보기에 그림보다 글이 더 재능이 있다 여겼을 뿐이다.(낫다 못하다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러던 것이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창작 환경이 바뀌어 버렸다. 도제식의 소량 창작에서 이름을 얻은 작가들의 대량 제작으로 풍토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때까지는 작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역량에 따라 자신의 그림체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출판사나 유통의 요구에 의해 히트 작가의 아류 그림체로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D 출판사는 만화의 승부는 스토리에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먼저 무협지 출신의 작가들을 섭외하여, 스토리를 다량확보하고 다작 체제를 자금력으로 밀어붙여 성공시켰다.
공장시스템은 1세대 무협 작가들이 만화계로 들어와 스토리 작업을 하는데 생존의 발판이 되었다. 공장시스템의 문제나 장단점은 논외로 하고 1세대 만화 스토리 작가와 무협 소설 출신의 작가들은 다른 각도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
극화 대량생산 시대가 되면서 전문 스토리 작가가 속속 등장하였지만, 그때까지 만화 스토리 작가는 모두 고스트라이터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만화계에선 그 작품의 스토리를 쓴 스토리 작가 김민기와 김세영이 입에 오르내려도, 그건 만화계 안에서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다작 시스템 하에서 모두 만화가의 이름으로 책을 찍었고, 그때까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주장하는 스토리 작가도 없었다.
그 무렵만 해도 만화계의 정서는, 스토리 작가라는 호칭보다 스토리맨으로 통했다.
만화 작업에 필요한 구성 멤버로서 필요한 사람이지 대등한 위치의 작가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위 일류 작가라는 사람들은 적게는 7~8명에서 많게는 수 십 명의 스토리 작가 집단을 두고 작품을 양산하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스토리의 중요성에 대해선 너나없이 침을 튀기며 강조하지만, 지난 세월 만화계에서 스토리 작가는 늘 변방이었다. 작가 나름이겠지만 만화가들도 대부분 스토리 작가가 나서서 설치는 모습은 생리적으로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스토리에 의해 재미가 좌우되지만 아마도 반쪽이라는 의식이 있지 않았나 생각 된다. 사실 그 문제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정서적인 부분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웹툰 시대가 되면서 문하생 문화가 사라져가고 그림이 좀 된다 싶으면 곧 바로 데뷔하는 게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어시스트 없이 혼자서 매주 연재원고 마감을 하는 것은 피를 말리는 일이다.
무한 경쟁의 웹툰 시대에 작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재미 사냥은 여전히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요즘의 스토리 강의 수강 신청자는 90% 이상이 현역 작가이거나 연재 경험이 있는 작가들이다. 시대 변화를 절감한다.
92년 봄,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스토리 작가들이 경복궁에서 모여 협회를 만들기로 하였다.
그해 가을 한국일보 송현 클럽에서 120여 명의 작가가 참석한 가운데 만화 스토리 작가협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120명이란 숫자는 당시 활동하던 스토리 작가의 90% 가량이었다.
초대 회장엔 2년 임기로 김민기가 추대되었고 2대 회장까지 연임하였다. 김민기는 임기동안 스토리 작가들의 월간 소식지 만작보를 발간하는 등 나름 성실하게 회의를 주도하였다. 그 당시 회원들은 협회를 후원하기 위해서 바보클럽을 만들어 매월 10만 원 이상 일정액을 협회를 위해 투척했는데 그 숫자가 20여 명이 넘었다.
김민기 후임으로 방경수 작가가 회장이 되었고 방경수 후임으로 야설록 작가가 회장이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활기찼던 협회는 표류하기 시작했고 한 동안 흐지부지 활동이 없었다.
5~6년 간 표류하던 협회는 뜻있는 작가들이 나서서 재건키로 하였고 2005년 임웅순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재창립을 하였다.
그 뒤로 조성황, 최재봉, 최금락 회장에 이어 지금은 정기영 작가가 회장을 맡고 있다.
그럼 만화에 있어서 스토리 작가의 역할은 어디까지 일까?
스토리와 그림의 역할 구분에 대해서 흔히들 음악에 있어서 작곡자와 가수의 경우에 빗대어 말한다. 대략 좋은 곡과 노래 잘하는 보컬의 관계 정도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가 협업으로 작품을 만들 경우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대본소 시절엔 스토리의 고료가 일반적으로 데생 고료와 비슷하게 책정되었었다.
물리적으로 스토리는 하루에 한 권도 쓸 수 있지만 데생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그림이 불리하지만 충분히 통하는 데생의 단계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림은 일정한 수준의 데생을 꾸준히 그릴 수 있지만 스토리는 매번 새롭고 재미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스토리 작가의 압박감이 훨씬 더 큰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스토리와 그림의 역할 구분은 큰 틀에선 대동소이하지만, 그림 작가 출신의 스토리 작가가 러프한 그림 콘티를 짜기도 하는데 이 경우 종종 트러블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림 연출에 더 능력이 있는 그림 작가 입장에서 볼 때, 어설픈 연출이 불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직 연출 능력이 떨어지는 그림 작가는 러프 콘티를 원하기도 한다.
지금도 가끔 커뮤니티에서 글 콘티니 그림 콘티니 하며 논쟁이 벌어지는 걸 본다. 사실 오랜 세월 작업해 온 입장에선 그 논쟁이 왜 일어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협업이란 건 항상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아닌가?
보다 재미있고 보다 나은 작품을 위해선 서로 양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누구는 스토리작가의 역할이 그리는 작가가 영상을 떠올릴 수 있는 지점까지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뼈대가 되는 줄거리까지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모바일 기반의 스크롤 방식은 종종 편집을 새로 하기도 한다. 그럼 편집은 누가 할 것인가도 예민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크롤 방식의 편집이 연출 효과란 측면도 있지만 세로로 나열된 컷 구성상 분명 스토리의 명확한 전달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할의 구분은 권리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갈수록 첨예한 대립 양상을 지닌다 하겠다. 하지만 강물과 바닷물의 경계를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없기에 서로 세분화된 권리 관계를 서약하고 작업을 진행하는 묘가 필요해 보인다.
어딜 가나 스토리 스토리를 외친다. 모두 재미의 근간이 스토리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웹툰의 글로벌화를 외치지만 어디에도 만화 스토리의 발전을 위한 논의나 투자가 없다.
좋은 스토리가 없이 무슨 글로벌인가? 지금처럼 작업량의 과부하에 시달리면서 작가 혼자 경쟁력 있는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재미있는 스토리가 경쟁의 선제 조건이라면 스토리를 개발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예술이 개개인의 역량에 의존한다 해도 토양을 마련하는 것은 기관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 좋은 스토리는 좋은 스토리 작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만화스토리에 대한 공모전 하나 없다는 것이 정책 부재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라 할 것이다. 혹자는 경쟁력 있는 스토리가 응모되지 않고 다른 분야로 쏠린다고 공모전의 효과에 의문을 표시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파악하고 더 효과적인 방안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웹소설이나 다른 시나리오 분야의 작가들을 끌어들이는 방안을 연구한다면 보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정책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다음은 전임 회장이었던 최금락 작가의 <나의 작가 교류기>다.
추억일 수도 있고 비하인드 스토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것을 자꾸 남겨야 기록이 된다 확신한다.
---당시 필자가 머물던 수유리 작업실 주변엔 많은 작가들이 살기도 했고 수시로 모여 어울렸다.
스토리작가로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고행석의 ‘왕불청객’을 쓴 김민기, 박원빈의 ‘공포의 보디체크’와 오일룡의 ‘춤추는 센터포드’를 쓴 김은기, 허영만의 ‘2시간10분’과 ‘담배 한 개비’ 등을 쓴 노진수, 조운학의 ‘허슬러’와 허영만의 ‘48+1’ 등을 쓴 장대일, ‘스트리트 파이터’를 쓴 홍여기, 장태산의 ‘야수라 불리운 사나이’와 허영만의 ‘비트’를 쓴 박찬호(박하) 등이 있었으며, 만화가로는 주간만화에 ‘풀하우스’와 보물섬에 ‘브라보 탁박사’를 연재하는 유만영(필명 유영)과 단편의 귀재이자 국보급 만화가로 불리는 박흥용과 ‘기계전사 109’를 아이큐 점프에 연재하는 김준범, ‘스파이크 맨’을 연재하는 최성호, 어린이 만화를 하던 강주배, 대원에서 나오던 만화 월간지 팡팡에 ‘무술소년 꼬망’을 연재하던 최상(본명 최용환), 보물섬에 ‘타잔과 멍텅구리’를 연재하던 손상헌, 이외에도 안춘회, 김한영, 김종한, 이상철, 권가야, 전세훈, 전영석, 김수용 등등이 수유리 인근에 살거나 교제하며 지내던 작가들이었다. 나중에 ‘힙합’으로 유명해진 김수용 작가는 당시엔 김준범의 문하생이었다.
91년 초 어느 날, 김준범이 아이큐 점프에 연재키로 한 작품이라며 원고를 들고 왔다.
스토리는 노진수가 썼다고 했다. SF물인데 그림이 너무 순정 만화 같다고 했더니, 김준범은 그 원고를 버리고 완전히 새로 그린 작품이 ‘기계전사 109’다.
김준범은 스토리 늦게 쓰기로 악명 높은 노진수와 작품을 하면서 매번 밤새워 마감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사람 좋고 인물 좋은 노진수(필명 노을)는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천재 형 작가인데, 술을 즐기고 도박과 낚시, 유흥의 유혹에 약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토리 한 권을 후딱 쓰지만 뒤를 잇는 것은 매번 힘들어했다. 그러다보니 1권만 쓴 스토리가 네 타이틀이나 되기도 하였다. 고행석 작가의 불청객시리즈를 쓸 때, 더 이상 1권은 접수하지 않겠다고 하자 필자에게 도움을 청하여 세 타이틀을 이어서 완결시킨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노진수와 필자의 대화.
필자: 난 허영만 류의 극화 스토리가 어려워.
노진수: 무슨 소리야. 둘리 같은 스토리가 훨씬 어렵지.
필자: 둘리 같은 옴니버스는 틀만 잘 잡고 캐릭터 살리는 대사만 잘 치면 되잖아.
노진수: 그게 어려운 거지. 허 선생 만화는 연출이야. 스토리는 별거 없어.
필자: !!!!!!!!
그 말을 듣고 곧 바로 허영만의 만화들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연출이었다.
그날 이후로 극화에 대한 자신감이 상승하여 스토리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보통의 경우 스토리 작가의 스토리를 만화가가 70% 정도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다.
허영만 작가의 스토리를 쓴 작가들이 한 결 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
허 선생이 데생하면 자신이 쓴 스토리를 120% 살린다는 얘기다.
이 이야기는 특히, 그림을 그렸던 그림 작가 출신의 스토리 작가들이 공감하곤 한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쓴 스토리 작가 김민기(본명 김창기)는 천성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다.
그의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은 때때로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대부분 지나치게 솔직하여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이 히트한 데에는 누구보다 이현세의 공이 크다고 누누이 말하곤 했다.
자신이 쓰긴 했지만 스토리가 너무 허무맹랑한 것 같아서 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내밀었는데, 친구인 이현세가 무지하게 재미있다며 장편으로 가자고하여 3부작 대하 스토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공포의 외인구단’ 외에도 ‘지옥의 링’, ‘국가대표’, ‘생과 사’ 등등의 강렬하고 내실 있는 작품을 많이 썼다. 그가 쓴 작품 중에 허영만의 ‘도룡뇽 구단의 말썽장이들’을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그 작품을 어떻게 구상해서 썼는지 묻자, 일본의 재미있는 네 컷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민기는 극화에 강하지만 코믹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얘기다. 김민기가 쓴 고행석의 불청객 시리즈 중에 필자가 제일 맘에 들었던 작품은 ‘노래하는 불청객’이었다.
김은기 (본명 김철호) 작가는 다재다능하고 박식한 작가다. 그의 스포츠와 밀리터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이며 수 십 년간 모은 프라모델 또한 그 양이 엄청나다.
그의 독서편력은 추리에서 역사와 밀리터리,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원서를 구해서 보는 경지에 이르러있다. 그의 박식은 스포츠, 밀리터리, SF 만화 스토리로 발현되어 이태호의 ‘블랙코브라’, 박명운의 ‘에어조단’, ‘오일룡의 춤추는 센터포드’, 박원빈의 ‘공포의 보디체크’ 등으로 발현되었다.
등산을 좋아하여 전국의 산을 누비던 산악인인 그는 젊은 시절 신장이 망가져서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하기 전 몇 년간 투석을 하며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기도 하였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토리를 구술하면 아내가 받아쓰는 방식으로 스토리 작업을 하였다.
김세영 작가는 젊은 시절, 큰 키에 맑은 얼굴과 장발로 예수 같은 분위기가 배어나왔다. 그는 스토리 작가로는 최초로, ‘오! 한강’에 글 작가 이름을 붙였으며, 허영만의 대본소 시절에도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카멜레온의 시’를 비롯하여 ‘사랑해 사랑해’, ‘타짜’ 등의 연이은 히트에 힘입어 김세영의 갬블시리즈를 신문에 연재하며 주가를 높이기도 하였다. 작품을 연재하던 스포츠 신문이 폐간되고 온라인으로 연재할 때, 하루에 무려 100만 명이 그 만화를 보려고 사이트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2년 전 혈액 암으로 고생하였으나 골수이식을 받고 지금은 좋아져서 완쾌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둑의 고수이기도 한 김세영 작가는 지금 신작 바둑 만화 스토리를 집필 중에 있다고 한다. 국내에 다시 한 번 바둑 열풍을 몰고 올 명작 탄생을 기대해본다.
김세영이 천재 스토리 작가라면 오세영은 천재 그림 작가로 유명하다. 두 천재가 만나서 한겨레 신문사에서 창간한 만화시대라는 잡지에 ‘한라여 백두여’라는 작품을 연재한 적이 있었다.
두 천재의 만남에 모두들 기대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는데 만화시대가 오래가지 못한 관계로 작품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필자의 기억으로 김세영은 그의 명성에 걸 맞는 출중한 스토리를 써냈는데, 오세영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를 살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좀 있었다.
그 무렵 ‘우리만화연대’의 전신인 ‘바른만화연구회’ 모임이 있었고 두 작가도 참석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세영과 김세영이 작품이야기를 나누다 오세영이 김세영에게 주먹을 날렸고 김세영이 코피가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세영은 평소에도 주사가 좀 있는 편인데 술 취한 상태라 감정 조절이 안 된 탓이리라. 졸지에 후배에게 주먹질을 당한 김세영은 그날 이후 그 모임에 발을 끊었다. 그날 선배 동료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오세영을 호되게 나무랐다면 김세영의 서운한 마음이 좀 풀어졌을 텐데....
야설록 작가는 만화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기 전에 무협소설 작가로 유명하였다. 필자는 독자시절 그의 무협소설 팬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고, 그 중 ‘녹수 시리즈’가 기억에 남는 작품인데, 국내 무협 작가 중에 최초로 비정한 살수가 등장하는 작품을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남벌’ 스토리를 이현세에게 건넬 때, 스토리 고료를 받지 않는 대신 이름을 달아 줄 것을 요구하였고, ‘남벌’의 성공을 바탕으로 스토리 작가 중에 최초로 프로덕션을 운영하였다. 대학시절 밴드를 한 그는 전인권을 좋아하여 그의 음반을 내기도 하였다. 그의 팀에서 스토리 작업을 하던 작가 중에 김희재 작가가 있었다.
김희재 작가는 단정한 미인이다. 대부분 남자들인 스토리 작가 모임에서 뛰어난 미모와 탁월한 언변으로 언제나 홍일점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대학에서 연극 영화를 전공한 그녀는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이후로 스토리 전문 회사인 올댓스토리를 설립하여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장대일 작가는 체구가 큰 때문인지 늘 스케일이 큰 작품을 구상하곤 했다. 그는 폭발적인 상상력과 특유의 근성 있는 작업 정신으로 그 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냈다.
그는 허영만의 안개꽃 카페와 48+1을 썼는데 48+1은 후배인 홍영기 작가가 초안을 쓴 작품이었다.
홍영기 작가는 스토리 작가 중에 가장 힘들게 스토리를 쓰는 작가로 유명했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스토리를 썼지만 그만큼 끙끙 앓으며 썼기에 늘 힘들어했다. 요령을 피울 줄 모르는 그는 천성이 게으른 편이고 술을 좋아하여 누구든 그에게 스토리를 받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토리 작가들끼리의 유대는 대부분 돈독한 편이었으나 나름 치열한 경쟁의식도 있었다.
특히 잡지에서의 순위 싸움은 실력 검증의 바로미터인지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스토리 작가들은 대부분 잡기에 능하여 당구, 경마, 포카, 바둑, 주식, 낚시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가 많다. 누구보다도 자신 스스로를 너무나 잘 아는 노진수 작가는 경마에 입문하기 전, 자신이 경마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였다. 본인은 틀림없이 유혹에 넘어 갈 것이고, 넘어가면 분명히 그 세계를 탐닉할 것이며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정기영 작가는 사람 좋다고 무골호인으로 소문이 났지만 스스로 비공식 아호를 정불만으로 정했을 만큼 솔찬히 투덜거린다. 미스터 블루에 연재한 허영만의 ‘오늘은 마요일’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고행석의 스토리를 쓰기도 했고 이재학 팀의 전체 스토리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수년 전에 신문 연재한 ‘총수’가 인기를 끌면서 총수 비기닝을 연재하고 있다.
정기영 회장을 좌우에서 보필하는 협회 부회장 이화성 작가와 박성진 작가의 행보와 이력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이화성 작가는 프로 선수 급의 당구와 탁구 실력을 장착하고 있으며 영화판에서도 뛰어나 필력을 과시하며 왕성하게 활동하였고, 이름만 대면 아는 작품들의 실제 저자이지만 그런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만큼 대인배의 아량을 갖추고 있다. 하승남의 골통시리즈를 탄생시킨 이후로 지금도 가장 핫한 스토리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성진 (필명 금시조) 작가는 특이하게 카이스트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을 다니다 무협작가로 필명을 드날리며 금시조월드를 창조하고 만화스토리작가가 친구다. 그는 소위 말하는 손 빠른 작가로 많이 쓰면서도 특유의 재미를 주는 탁월한 글 솜씨를 뽐내고 있다. 대학 동기들이 IT업계에 많아서 요즘은 콘텐츠 융복합 사업 쪽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는 만화스토리작가의 역할이나 작가들에 관해 알아보았다. 한국 만화는 스토리의 발전과 더불어 성장해 왔다. 그리고 콘텐츠 시장은 한국 만화의 스토리에 주목하고 있다.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만화적 상상력이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에 우리는 좀 더 전문화된 스토리를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좀 더 치열하게 스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작가가 만드는 것이기에 좋은 작가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니, 작가는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 찾는 것이기에 널리 인재를 구해야 한다. 스토리의 공고화! 그것만이 한국 만화가 콘텐츠 시장을 주도하고 세계로 나가는데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