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참관기 ②]
제44회 앙굴렘국제만화축제가 지난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 동안 프랑스 앙굴렘시 전역에서 개최되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아시아관에 한국만화홍보관 ‘Manhwa’를 조성하여 이나래 작가의 허니 블러드를 위시한 웹툰 22편을 아이패드와 캐릭터전시로 소개하였고, 프랑스에서 출판된 만화 80권을 비치하여 관람객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작가 드로잉쇼, 웹툰 시연회, 사인회 등의 이벤트를 개최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만화수출상담회를 운영하여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4일 동안 만화가, 출판사를 위시한 만화관련업체, 기관관계자 및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등 약 18만여 명이 작은 앙굴렘시에 모여 제9의 예술인 ‘만화’의 상승하는 인기와 가치를 재확인하는 풍경을 만들었다.
이번 축제에서 전시는 총 16개가 개최되었다. 거장전이라 할 수 있는, 침묵과 자연의 서사로 폭력을 그리는 헤르만의 회고전과 일본 여성의 삶을 감각적 화면으로 그린 카미무라의 헌정전시, 미국 그래픽 노블의 대표작가인 윌 아이스너의 전시와 함께 만화작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필립 뒤피, 루 휘펑, 그레고리 제리&오토 티, 소피 게리브, 미로슬라브 등의 전시가 개최되어 작품성 있는 작업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또한 가스통 라갸프, 마블, 미키마우스, 샤토 데 제뚜알 전시는 대중적인 캐릭터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전시로 구현되었으며, 아뜰리에 “S”, 작가의 집 소속작가들 전시는 다양한 시각의 신선한 작품들을 관람케 하였다. 그리고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제작, 즉 만화와 영화의 콜라보레이션 전시인 발레리앙과 seuls전시가 개최되어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 파생되는 만화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시사하기도 하였다.
△ 헤르만 전시
2016년 제43회 앙굴렘국제만화축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벨기에 작가 헤르만(Hermann Huppen 1938~)의 전시가 라는 타이틀로 Espace Franquin에서 개최되었다. 작가는 지난 50년 동안 5,000페이지의 만화를 그렸고 이 전시에는 원화 및 스케치 166점이 전시되었다. 그의 작업에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영향으로 자연적 요소와 더불어 암울한 사회상이 잔인하고 담담하게 반영되어 있다. 레퍼토리를 무시한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리지만 특히 헤르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모티브는 북미원주민부족인 코만치족으로 그의 만화 Bernard Prince는 마치 서부영화를 연상시킨다. 고문당하는, 벌거벗겨진, 목이 잘린 죄수들의 시체가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고요히 침묵하고 있다. 즉, 헤르만의 만화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은 힘이 쎈 사람들에게 지배당하는 암울한 사회를 암시하는 것이다. 전시는 작가의 많은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미로형의, 각 작품별로 컬러가 다른 벽면에 주요 작품들을 설치하여 주목성을 높였다.
△ 루 휘펑 전시(좌), 카미무라 카즈오 전시 (우)
△ 윌 아이스너 전시 (좌), 미래 프랑스혁명의 중요한 순간 전시 (우)
라오스 태생의 루 휘펑(Loo Hui Phang) 전시 도 같은 장소(Espace Franquin)에서 열렸다. 노르망디에서 문학과 영화를 공부한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시나리오를 만화와 일러스트로 그린다. 성적긴장감으로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작품 등의 원화와 함께 일러스트, 영화 스크립트, 퍼포먼스 영상, 단행본 등이 전시되었고, 마치 작가의 혼재된 감정이 조형화된 듯한 설치물이 전시장 초입에 설치되어 집중도를 높였다. 설치조형물은 앙굴렘대학(EESI:Ecole europeenne superieure de l’image d’Angouleme) 학생들과 콜라보하여 제작, 설치하였다.
앙굴렘박물관에서는 컬트작가이자 프랑스에 처음으로 일러스트레이터의 예술성을 선보였던 카미무라 카즈오(Kamimura Kazuo 1940~1986)의 헌정 전시회 가 열렸다. 가부장적 사회 속 일본여성의 삶과 심리를 섬세한 스토리라인과 감각적 화면으로 그린 작가는 성인만화 게키가(gekiga)를 유행시켰다. 우리가 함께 살았을 때 When we lived together, 시나노 강 Shinano River을 비롯한 작품들의 원고와 일러스트들이 극적이고 감각적으로 그려져 열정적 사랑에 배신당한 여성의 복수극을 리얼하게 전달했다. 매력적 화면 안에서 불출되는 여성의 처연하고 때로는 섬뜩한 삶의 모습이 흡입력을 높였다.
미국 그래픽 노블의 대표작가인 윌 아이스너(Will Eisner ~2005)의 전시 는 앙굴렘만화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작가는 경찰시리즈 스피릿 Spirit과 흑백 장편만화 신과의 계약 A Contract with God 등을 출간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1975년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전시는 마치 만화 속 공간 안에 실제로 들어가 있는 것처럼 공간을 조성하였고 만화장면이 입체적으로 재현되어 흥미로웠다. Spirit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모습이 크레이트를 이용한 구성으로 재현되었고 그 3차원의 어두운 도시 안에서 만화주인공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요소요소 등장해 생동감을 더했다. 더불어 완성도 높은 만화 원화들이 벽면을 따라 전시되고 관련 인쇄물들이 쇼케이스를 통해 보여지며 전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였다.
앙굴렘만화박물관에서는 전시도 함께 열렸다.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레고리 제리(Grégory Jarry)와 오토 티(Ott T.)가 2005년에 출간한 Petite histoire de la Révolution française는 과거 프랑스와 현재 프랑스의 공존을 날카로운 유머로 그리고 있다. 시민들의 폭동으로 탈출한 대통령 대신 루이 20세가 국회를 통제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의 에피소드들을 차용하여 현재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난다면? 을 유머러스하게 상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만화적 상상력의 도출은 어쩌면 230여 년 전의 시민혁명을 다시 예고하고, 향수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이런 유쾌한 발상이 바로 만화의 매력임을 말하는 듯하다.

△ 발레리앙 전시 (좌), 필립 뒤피 전시 (우)
알굴렘역 뒤편에 걸립된 앙굴렘 신미디어테크 l'Alpha에서는 발레리앙 전시가 이라는 타이틀로 개최되었다. SF만화 발레리앙과 로흘린 Valérian and Laureline을 원작으로 한 뤽 베송 감독의 영화 Valérian et la Cité des mile planétes 개봉(2017.7.26.)을 기념하는 전시로 만화의 제작배경과 원화, 캐릭터 일러스트 등이 영화 의상 및 소품 등과 함께 전시되었다.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의상 및 소품전시공간까지 관람인원을 제한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고 영화개봉 전이어서 그런지 의상 및 소품전시공간은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비교와 의상, 소품 등이 영화로 재현되는 과정이 특히 흥미를 끌었다.
앙굴렘만화도서관 1층 전시실에서는 필립 뒤피(Philippe Dupuy) 전시가 열렸다. 전시는 뒤피의 2016년에 출간한 작품 Une histoire de l’art(A history of art) 의 스케치 및 원고를 15m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설치하여 반복적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원고의 위쪽 모서리만 벨트에 부착시켰기 때문에 원고가 벨트 아래로 이동하면 각 각 낱장으로 붙여있게 되고 다시 위로 올라오면 하나로 연결되어 보인다. 만약 왼쪽 컨베이어벨트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다면 자동 스크롤된 원고를 한 자리에서 읽어볼 수 있다. Une histoire de l’art 도입부는 묘사된 그림들이 칸 없이 등장하는데 뒤피는 연대기적 글보다 즉흥적인 퍼포먼스나 정신적 풍경들이 예술의 역사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뒤피는 2016년에 루 휘펑과 함께 Nuages et pluie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 새로운 얼굴 미키마우스 전 (좌), 소피게리브 전시 (우)
△ Knock Outsider Komiks 전시 (좌), 사계-미로 슬라브 전시 (우)
뒤피 전시 바로 옆 전시실에서는 <새로운 얼굴 미키마우스> 전시가 있었다. 벽면에는 미키마우스 원고(흑백, 컬러)와 캐릭터 일러스트, 조형물 등이 전시되었고 전시실 중앙에서는 관람객들이 직접 컬러링한 미키마우스 도안으로 배지를 제작해주고 있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어른들이 참여하여 관람의 재미를 부가시켰다.
갤러리 아트이미지에서는 앙굴렘 작가의 집 소속 작가인 소피 게리브(Sophie Guerrive)의 전시가 열렸다. 2007년에 등단한 작가는 단정하고 컬러플한 동화 같은 작품을 그리며 작품 안에 유머와 철학을 담아내고 있고, 마치 브뤼겔을 연상시키는 감각적이고 도식화된, 복잡한 화면 안에서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중세 십자군전쟁을 연상시키는 잔인한 전쟁그림과 성의 안팎 공간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 등을 흑백 톤의 감각적 화면으로 그리고, 컬러플한 풍경그림을 유머러스한 요소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성 시몬 호텔에서는 전시 가 열렸다. 정신장애가 있는 작가들에게 작업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아뜰리에 “S” 작가들의 전시다. 도미니끄 시떼(Dominique Théâte)를 위시한 스무명 남짓의 정신 장애 작가들은 벨기에 아덴네에 있는 아뜰리에 “S”에서 기성작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다양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들은 그들에게 창작도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적 도움과 대화상대가 되어 줄뿐 창작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의 예측 불가능한 예술행위로 인해 아뜰리에 “S”는 장애가 있건, 없건 간에 함께 아이디어가 교환, 실험되고 창조되어지는 공간이 되었다. 성 시몬 호텔 외벽의 창문 등에도 작가들의 그림 6~7점이 걸렸고, 좁은 계단으로 이어진 2층 전시실에는 아뜰리에 “S”의 활동(출판, 전시)과 결과물 등이 연대순으로 소개되었고, 흡사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정제되지 않은 컬러플한 그림들과 거친 드로잉, 스케치, 그리고 만화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퍼포먼스작업의 영상과 사진, 의상 등도 함께 전시되었다.
앙굴렘종이박물관에서는 <사계 미로슬라브 세큘릭 스트루자 Les Quatre saison De Miroslav Sekulic struja> 전시가 열렸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화가이자 만화가인 미로슬라브는 만화책 여름, 가을 과 겨울, 봄을 통해 1980~90년대 폭력이 난무한 동유럽의 어두운 일상생활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동유럽의 한 고아원에서 성장하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거리의 아이들, 매춘부, 그리고 주변인들의
△ 냉혹하고 암울했던 현실이 어둡고 묵직한 화면으로 재현되었다. 전시 중간 중간 만화 제작을 위해 그린 작은 에스키스들이 스트립 아트 전시 (좌), 샤또 데 제뚜알의 또 다른 정복 전시
전시되어 작가의 작업과정을 유추할 수 있게 하였고, 종이박물관 그레이트홀에서는 마드리드 피아니스트 아그나시오 플라자(Ignacio Plaza) 공연과 함께 ‘봄’을 라이브벽화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 마블의 프랑스 터치 전시 (좌), 가스통 라갸프의 세계 전시 (우)
△ 스트립 아트 전시 (좌), 샤또 데 제뚜알의 또 다른 정복 전시
△ Seuls 전시
이외에도 앙굴렘 극장에서는 <마블의 프랑스 터치 Marvel’s French Touch>가 개최되어 스파이더맨, 엑스맨, 아이언맨, 어벤져스 등 마블의 수퍼 히어로들을 소개했고, 앙굴렘시청 앞쪽에서는 <가스통 라갸프의 세계>가 야외 패널전시로 열렸다. 1957년 스피루(Spirou)에 연재되기 시작했던 익살스런 라갸프의 이야기와 전개방식, 원고, 캐릭터 일러스트 등이 전시되어 관람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작가의 집 1층에서는 작가의 집 레지던시 작가들의 작품들이 <스트립아트>라는 타이틀로 전시되어 젊은 만화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었고, 앙굴렘만화박물관에서는 우주탐험을 다룬 <샤또 데 제뚜알의 또 다른 정복 Le Château des étoiles conquest of the ether> 전시가 360° 3D 상영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한국만화홍보관이 있던 아시아관에서는 판타스틱만화 가 영화로 제작되는 과정을 전시로 소개하였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소품, 장면들을 영화로 재현, 제작하는 과정과 영화 장면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만화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학과 시각예술이 결합된 장르가 바로 만화이다. 이번 축제 전시를 관람하면서 전시마다 원화의 아우라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필치와 에너지가 모든 원고들에서 각양각색으로 분출되어 만화가들의 작가주의를 그대로 전달받을 수 있었고 왜 만화를 제9의 예술로 인정하는지 충분히 이해되었다. 작가주의 전시뿐만 아니라 영화, 새로운 3D기술과 결합한 전시구성과 구현은 또한 만화의 발전, 진화 가능성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야기인 텍스트가 매우 중요한 만화 전시에서 전시설명을 모두 불어로만 해놓아 불어를 모르는 관람객들은 매순간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국제만화축제인 만큼, 글로벌 언어인 영어 서비스를 확대하여 관람객들의 편의를 고려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이 매번 엄습했다. 이번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쁜 친구의 앙꼬작가가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해 우리나라 만화의 높은 수준을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수상자들에게 전시 기회가 보다 쉽게 주어지는 만큼 조만간 앙꼬작가의 전시가 유럽만화문화의 메카인 앙굴렘국제만화축제 전시로 개최되어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이 닿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