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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역사 (1)만화속의 시대와 개인

원래 개인과 시대는 서로 얽히며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지만, 그 진실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아마도 급격한 역동 혹은 격변의 시기, 즉 시국이 지극히 불안정한 때일 것이다.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개인은 일상 속에서 자신과 사회, 시대 등의 거대한 흐름과의 연결고리를 의식하지 않거나..

2008-07-01 김혜신

                                                                        [연중기획 Comic & Culture 15 ] 만화와 역사

격동의 시기는 만화에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아무리 요즘 트렌트가 가볍고, 의미 없는 것들이라고 하지만, 만화의 명작들 중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둔 팩션(fFaction) 이라는 것을 되집어 보면 격동의 시기 자체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지 알수 있는것 이겠지요.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격동-역동의 시대를 가로질러 살아가는 개개인의 모습을 만화속에서 찾아봤습니다. (편집부)

테르미도르의 이미지
[테르미도르](김혜린)의 이미지

원래 개인과 시대는 서로 얽히며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지만, 그 진실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순간은 아마도 급격한 역동 혹은 격변의 시기, 즉 시국이 지극히 불안정한 때일 것이다.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개인은 일상 속에서 자신과 사회, 시대 등의 거대한 흐름과의 연결고리를 의식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유독 어렵고도 가혹한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란의 시기 속에 무조건 대세에 편승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자신의 소신에 충실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등, 구석에 몰려 하나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순간, 비로소 개인은 자기 자신의 내면과 대면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시대성을 가진 작품은 험난한 시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더라도, 시대를 초월하여 보는 이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문은 시련이면서도 미래를 열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열쇠이며, 그에 대한 해답도 숙고하고 탐구하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다. 이번 회에 소개할 만화들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살아간 개인의 모습에 주목하면서, 현재의 역동기-혹은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안정적인 시기에조차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써 자각해야만 하는 자신의 정체성과 그 의무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그 방식은 혁명투사가 되어 자신의 목숨을 장렬히 불사르는 비장한 형태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기억하는 것과 이야기하는 행위,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도 있다.


혁명에 살고 죽다 : [테르미도르]

테르미도르

테르미도르는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에 이르는, 가장 열기가 뜨거운 시기로, 프랑스 혁명력에 있어서는 공포정치를 행하던 혁명정부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가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지도부의 숙청이 이어진 테르미도르 반동을 의미한다. 같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여성만화라도 1973년 일본에서 그려진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1988년 한국에서 태어난 [테르미도르]는, 전자는 혁명에서 클라이막스를 맞이하고 끝나버리는 반면 후자는 혁명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점이 결정적이고 치명적으로 다르다. 이 점은 사실상 전복적 사회운동이 거의 절멸해버린 70년대의 일본과, 군부출신 대통령의 취임이 지속되어 좌절과 함께 타파할 [적]이 여전히 뚜렷했던 80년대의 한국이라는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어느 쪽 작품이 상대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지향점이 각자 다를 뿐.) 중요한 것은 [테르미도르]는 혁명의 뜨거우면서도 싸늘하고 아름답고도 추악한 그 과정을, "혁명 그 후"라는 애매하고도 혼란스러운 시점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나 실성한 어머니를 모시고 불우하게 자란 주인공 유제니는 순수하면서 치열한 열의로 혁명을 위해 싸우지만, 왕가와 귀족이 상징하는 구체제라는 공공의 적의 숙청 이후 분열되어가는 혁명정부,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그 혼돈의 희생양이 되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또한 유제니가 사형장으로 이끈 아버지의 죽음이 어머니의 충격사로 이어지고, 그가 멸문시킨 귀족 집안의 딸 알뤼느가 복수를 위해 다시 유제니와 얽히는 등 혁명전사로써의 행동의 결과도 단지 혁명에 기여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 무거운 업을 낳는다. 그런 모순점과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에 혁명은, 그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지지하거나 부정하고 시대 안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던 사람들의 싸움은, 진정 의미 있고 갚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 수많은 시행착오와 피가 흘려졌음에도 불구하고-아니 피가 흘려졌기에, 미래와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음이, 유제니라는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상태의 혁명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의 삶과 죽음, 그리고 유산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의 시대를, 여기서는 혁명이라는 것을 무작정 미화하지만은 않으면서, 그 열기와 추함을 드러내면서도 그 의미와 희망을 유제니를 비롯한 혁명전사들은 물론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살아가는 알뤼느와 줄르의 모습에서, 인간의 신념과 정신이야말로 죽음 같은 표면적인 패배와 단절을 초월한 그 무엇임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역사의 현장에서 달리며 스러져가다 : [나라가 불탄다]

나라가 불탄다

[나라가 불탄다]는 사실 한국인으로써는 최근에 와서야 대중문화적으로-그것도 그나마 조심스럽게나마-다룰 수 있어진 1920-30년대를, 그것도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꺼려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만화는 주인공들의 희망과 절망,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거리낌없이 폭로해가는 것마저도 (사실상 주인공이야말로 독자의 감정이입의 대상이자 대부분의 경우 작가의 목소리이기도 하므로, 이런 선택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다.) 주저하지 않으며 주로 만주국 설립을 둘러싼 당시 동아시아의 현실과, 거대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당시의 일본이란, 일본인이란 어떤 시대적 맥락 속에 어떠한 결단을 내렸으며 혹은 내렸어야 했는지 조명한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두 명이라고 볼 수 있는데, 농민 출신이나 성적이 좋아 지주에게 입양된 후 엘리트 코스를 밟아 관료가 되었지만 농민 출신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혼다 유우스케와, 재벌가 아들로 태어나 중국에 건너가 아예 중국인이 되어 중국을 통일하겠다는 다소 허황된 꿈을 품은 마츠마에 요우헤이다. 혼다는 "만주나 조선, 대만 등 식민지는 일본에게 필요없다-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 전쟁의 굴레가 끊어질 것이다"라는 소일본주의를 주장하는 스승 이시바시 탄잔(실존인물로 언론인, 학자)의 가르침을 내심 따르면서도 국가의 발령에 만주에 갔다가 만주국의 이상을 품고 일본인 이주정책에 관여하게 된다. 한편 마츠마에는 장개석의 국민당에 입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사로운 이익이나 자존심 채우기를 위해 자국 민간인의 목숨마저 고려하지 않는 일본군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후에는 난징대학살마저 목격하게 된다. (참고로 한국에 발매된 단행본에서는 이 장면을 볼 수 없다. 2004년 11월 [주간 영점프]에 실린 이 부분은 난징대학살이 근거 없다는 우익단체의 항의와 정치가들의 압력으로 단행본에 실리지 못했고, 만화는 2005년 1월에 급히 종료되었다.) 20년대에서 출발하는 스토리는 경제불황과 식량자급력을 잃고 극소수의 좌파가 제대로 발언조차 하지 못하는 와중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급격히 우익화되고 전쟁을 악순환적으로 반복하는 일본과, 그 안에서 각자의 이상에 충실하기 위해 분투하고 좌절하는 주인공들의 인생역정을 담고 있다. 이것이 만화 자체가 연재 당시에 겪었던 고난, 그리고 일본 뿐만이 아닌 세계적인 조류를 본다면 20년대 일본만의 현실이 아니지 않을까.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말아라, 결코 자신의 신념을 꺾지 말거라, 한명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관철할 수 있는 방법이다]라는 이시바시의 편지는, 만주로 건너가던 혼다뿐이 아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가슴에도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인 것이다.


살아남는 것, 이야기하는 것, 남기는 것 : [쥐], 그리고 [페르세폴리스]

물론 모두가 혁명투사가 되거나 역사 중심의 현장에서 활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간적이고 태생적, 환경적 한계로 주변부에 존재할 수 밖에 없었거나 단순히 그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면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자로써 가능한 것이 있다면 과거를 잊지 않고 전달하는 일이다. 역사는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여기서는 음모론적인 면보다 역사가 다분히 인간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후세에 계속 이야기 되어지지 않고 잊혀지는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었다 하여도 이미 역사가 아니다. 역사 속 지도자들은 때로는 치졸해 보일 정도로 악전고투 끝에 정복한 도시나 사이가 험악했던 선왕(先王)의 묘와 기록을 철저히 파괴 혹은 왜곡하는 데에 몰두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기록을 지워버림으로써 역사에서 제거해버리는, 즉 산 자들에게 기억되지 못하는 진정한 죽음을 선고하려는 의도이다. 역으로 현재에도 계속 이야기되는 역사는, 그 시대를 겪었던 인간들의 삶은 어떤 의미로는 지금까지 살아가는 것으로써 힘을 지닌다. 예를 들어 피해자들의 증언을 가해세력이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널리 회자되고 공감을 얻는 것이 어떤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야기는, 특히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귀중한 일이다.

쥐

[쥐]는 구체적인 실화를, 개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려진 만화이다. 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미국인은 개로 묘사되는 등 국가별로 의인화된 동물을 채용함으로써 적절한 가벼움과 무게를 절묘하게 유지하고 있다. [쥐] 속에는 정확히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작가의 부친으로 2차 세계대전 중의 유태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블라덱 슈피겔만의 과거 이야기와, 또 하나는 부친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작가 아트 슈피겔만 자신의 이야기로 액자식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블라덱이 경험한 전쟁은 정치판이나 전장이 아닌 수용소였다. 그는 역사의 중심에서 활약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의 희생자였고, 잊혀질 뻔한 존재였다. 하지만 살아남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남김으로써 그의 과거 역시 역사가 될 수 있었다. 블라덱과 같은 생존자들이 입을 열었기에 유태인 대학살은 인류 최악의 범죄 중 하나로써, 반성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역사로써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쥐]가 그 수많은 유태인 대학살 이야기 중에서도 독보적인 점은, 만화라는 매체라는 점과 더불어 아들 아트의 시점에서 전하는 아버지 블라덱의 이야기라는 점을 숨기지 않은 진솔함이다. 아트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여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실화 내러티브의 생생함을 반감시켰다고 할 수 있지만 역으로 더 생생하게 살려내고, 되려 일종의 객관성의 부여로 그 리얼리티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예를 들어 블라덱이 경험한 온갖 현실 같지 않은 끔찍한 사건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충격적인 것은, 스스로가 처참한 인종청소의 피해자인 블라덱이 흑인을 경멸하고 욕하는 장면, 그리고 그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그려낸 만화가 아들 아트의 선택이다. 작가에게 있어 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은 곧 아버지가 경험한 시대와,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스러우면서도 의미 있는 것이다. 독자로부터 강렬한 공감과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 점은, 바로 이러한 난산을 거친 진솔한 이야기 전하기에 들인 노력 덕분이다.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는 작가가 [쥐]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는 작품으로, 흑백의 담백한 화풍이나 자서전적인 면에서 유사점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는 언제까지나 자기 자신이 바라본 이란 혁명과 유학 시절의 이야기를 그렸으며, 따라서 어떤 어린 시절의 기록인 동시에 성장기이기도 하다. 특이한 점은 이 이야기는 단순한 어른이 된 작가의 회고록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독자를 이란 혁명 속의 작가의 소녀시절, 그 공간 속 그대로 빨아들이는 듯한, 일종의 시간여행과 같은 면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른의 해석 없이, 어린 시절의 관점과 감성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보이고 싶지 않아했던 점(예를 들어, 아내를 만나기 전 사귀었던 여자의 이야기)마저 그려내던 [쥐]의 작가와 같이 [페르세폴리스]가 자서전으로써 지닌 미덕은 그 꾸밈없는 진솔함에 있다. 어린 마르잔에게 있어 운동권 친척들이 얼마나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지는 친구들 사이의 자랑거리일 뿐이고 혁명 후의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두는 좋아하는 옷을 못 입게 하는 불만의 대상이고, 한마디로 혁명이든 전쟁이든 그녀에게 있어선 어떤 당연한 현실이자 일상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기 자신의 경험이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독자는 이란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몰라도 거리낌없이 공감하게 되고, 동시에 마르잔이 어린 마음에 느낀 충격과 슬픔도 그만큼 강도 있게 느끼게 된다. 특히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며 2005년 폭동을 일으킨 무슬림 이민자들을 쓰레기라고 불렀던 정치인이 경제 활성화를 원한 국민들에 의해 현재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중인, 갈수록 중동과 이슬람이 타자화되고 악마화되어가는 현실에서,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지각하기 어려운 진실을 이 만화는 한 작은 소녀와의 공감을 통해 서구의 독자들에게 깨우쳐 주었다. 이처럼 이야기의 힘은, 그 어떤 나약한 존재라도 역사에 자리잡게 하고 시대에 관여할 수 있게 해준다. 힘없는 피해자라도, 어린아이라도 말이다.


이처럼 개인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싸우다가 스러져갈 수도, 극수소는 공식적인 역사에 기록될 수도, 또 다른 이들은 이야기를 후세에 전해가면서 시대를 이어가고 역사를 전승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역사 속에 활약한 개인들의 예로 [테르미도르]나 [나라가 불탄다]의 예를 든 것은 결코 그들이 소위 말하는 역사의 승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식 역사에는 남지 못하고 도중에 좌절하고 스러져간 자들로 거의 이름조차 남지 못할 이들이다. (그래서 가공의 주인공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비록 가공이지만 오히려 더 다수를 차지했을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고, 일순 허무하게 죽어간 것으로 보이나 그들의 기억과 정신이 이어지는 이상 사실 그들은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좀더 현실적인 예로 [나라가 불탄다]가 연재 중에 사회적 정치적 압력으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조기 종료 당한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는 하나, 작가가 그 정도의 반발을 각오하고 난징대학살을 그려낸 점, 그리고 그것이 2004년의 시점에서는 억압되었다는 기록 자체는 남아 있고 그 화제성 탓에 계속 이야기될 것이며, 따라서 작가의 선택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 의지가 패배한 것도 아니다. 일본인에게 극히 예민한 야스쿠니 신사를 파고든 다큐멘터리 [야스쿠니]가 우익의 압력으로 개봉이 무산될 뻔했으나,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상영이 가능해진 것도 어느 정도 발전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써 가능한 것은 하면서, 계속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모의 이야기든, 주변의 언뜻 보기에는 하잖은 이야기든, 모두 시대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말이든, 그림의 형태든 글의 형태든 영상으로든 계속 기록되고 이야기되고 이어지는 것, 바로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한 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써의 의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