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을 쓰는 자격 증명을 하는 것이 예의일 것입니다. 저는 현재 영화 시나리오와 잡문(雜文)을 써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이 세계의 평범한 풋내기 작가입니다. 이렇다 할 대표작은 아직까지 없고요. 실사 장편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본 것이 연출 경험과 경력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화 쪽은 비슷하게나마, 젊은 시절의 과오이자 흑역사로 남은 한 권의 책에서 일러스트까지 도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할게요. 여하튼 감히 이 자리에서 만화와 영화 연출의 차이를 논하기엔 터무니없는 바탕입니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을 만화와 함께 해왔고 앞으로도 만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서, 제가 가진 묘한 자부심과 사명감 그리고 어떤 숙명으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현업에 종사하는 자가 직접 몸으로 부딪힌 식견과 그간의 고민에서 튀어나온 정제되지 않은 관념이, 전문가나 이론가의 현학보다는 오히려 더 쉽게 본질에 접근할 수 있을 거란 믿음으로 어줍잖은 소견을 개진해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저와 비슷한 처지의 풋내기 만화가나 지망생이 되셔서 같이 만화책이 여러 권 꽂힌 카페에 앉아 커피나 마시며 떠들고 있는 정경을 상상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실에서 한 소년이 책상 위에 웅크려 딴 생각을 합니다. 칠판 앞에서 선생님은 쉴 새 없이 시험에 나오는 단락의 포인트를 짚어주고 학생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데, 이 소년은 공책에 필기 대신 낙서를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외모를 극도로 과장시킨 캐리커처를 그리며 상상에 빠집니다. 절대 진리를 가장한 저 미심쩍은 말들을 다른 녀석들은 무조건 믿고 따르는 걸 보니 지금 이곳에 자유로운 영혼은 자신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저들과 나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애초에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 아니었나? 외부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킨 이 아웃사이더는 자신의 망상에 살을 얹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미래― 어느 독재 제국에서 인간은 지배계층 교사와 피지배층 학생으로 계급이 나누어지고, 세뇌 교육에 의해 체제의 로봇이 되어가던 학생들 중 한 소년이 마침내 반기를 든다… 상상은 망상으로, 망상은 공상으로, 공상은 이제 스토리의 형태를 갖추어 갑니다. 소년은 필통에서 자를 꺼냅니다. 공책을 뒤집어 뒷장의 여백에 자를 대어 줄을 긋고 칸을 만듭니다. 세계관의 설정을 설명하는 배경 그림을 맨 위의 칸에다 그립니다. 아래, 타이틀이 될 커다란 칸에는 어느새 사이보그가 되어 있는 선생님의 얼굴 아래 나름의 타이포그래피로 작품 제목과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천재 신예 작가(바로 자신!)의 이름을 적습니다. 다음 칸부터 배경 위로 인물이 배치되고 말풍선이 붙기 시작합니다. 이 중학교 2학년 학생은 지금,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학생은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 있거나 이미 영화감독이나 만화가가 되어 있는 누군가의 과거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중학생일 때 소년챔프 만화대상 공모에 습작을 응모하여 입상은 못했지만 심사평에서 짧게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만약 입상했더라면 지금 한국 만화계는 바뀌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봅니다만, 제가 영화를 만들어도 한국 영화계는 이렇게 멀쩡한 걸 보아하니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얌전히 입을 다물어야 하겠지요. 어쨌든 만화 창작을 시작한 최초의 사례는 이처럼 누구나 비슷하더군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태블릿이나 디지타이저로 곧바로 자신만의 만화를 그려 SNS에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부분은 이렇게 공책이나 연습장 만화로 시작한 사례가 많습니다. 제 주변의 영화감독님들 중에도 비슷한 경우를 자주 발견했습니다. 어렸을 때 만화를 줄곧 그렸고, 지금도 수준 높은 만화애호가인 분이 대다수입니다. 감독들은 만나면 영화와 소설만큼 만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영화인들은 항상 만화를 사랑하고 만화의 위대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스토리와 재미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화와 만화 사이에는 좀 더 긴밀한 어떤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만화는 내용 전개를 위해 여러 컷이 필요한 스토리 만화를 가리킵니다.
만화의 연출과 영화의 연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별 차이 없습니다. 물론, 몇몇 사소한 요소들의 쓸데없이 커다란 차이가 있겠지만 이 차이는 과정과 결과에 존재하는 것일 뿐, 두 매체의 ‘연출’에 있어서 애초에 본질적인 차이는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물론 이것은 창작자, 연출자의 입장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독자와 관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소년이 만화를 그리는 순간, 이미 ‘연출’ 역시 시작되었습니다. 소년을 통해 연출을 ‘형식’과 ‘내용’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만화를 그림으로써 연출을 시작한 이 중학생의 사례에서 중요한 지점은 소년이 자(ruler)를 꺼내들었다는 것입니다. 공책의 여백에다 선을 그어 칸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죠. 스토리 만화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칸입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빈 칸이라도 연속된다면 의미가 생깁니다. 작가가 일부러 무(無)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이 칸에 무언가가 곧 등장할 거란 기대감을 주지요. 영화는 사각의 스크린이라는 제한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습니다. 만화는 만화책의 펼침 페이지 안에서(웹툰의 경우 사각의 모니터나 액정 안에서), 다양한 크기로 설계된 칸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담습니다. 영화의 스크린은 곧 프레임(frame)이죠. 만화의 칸은 바로 영화의 프레임입니다. 만화의 한 칸은 영화에서 한 장의 필름 컷(cut)이고, 동시에 한 세팅의 카메라 숏(shot)이며, 칸의 연속성은 곧 컨티뉴이티(continuity)가 됩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칸=프레임으로 가두어 놓은 틀의 제한이 내부를 구성할 무한의 자유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또 여러 칸=컷으로 나누어놓은 형식 역시 단절이 아니라 반대로 계속되는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일상툰 등에서 명확한 칸의 구분을 생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림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어 보이지 않는 칸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영화가 사실은 24컷의 정지 사진을 초당 24프레임으로 돌려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영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다음 만화를 생각해봅시다. 연속된 정지 화면의 예술인 만화는 칸과 칸의 구분을 통해 독자의 머릿속에 가상의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칸과 칸 사이 그려지지 않은 움직임은 독자 스스로 채웁니다. 재미있는 만화와 영화를 보며 독자, 관객이 느끼는 흥미진진함은 모두 칸=컷으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환상입니다. (영화와 만화 사이 이러한 유사성을 쉽게 떠올리려면 중간 과정으로 애니메이션을 대입해보세요) 틀의 제한으로 이루어진 내용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사각의 교실 안에 갇혀있던 소년이 만화라는 환상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신기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만화와 영화가 독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는 이유. 우리를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무궁한 자유로 도피하게 해주는 환상의 엔터테인먼트면서, 형식이 곧 본질을 담아내는 완성된 예술 형식(art form)이기 때문입니다. (영상의 재생과 책-스크롤-넘김의 개념은 굳이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칸=프레임=컷 형식의 유사성을 가지고서 만화와 영화 어느 쪽이 먼저인지 따지는 일은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 영화와 만화 둘 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 정해진 형식이 갖추어진, 아직도 변화 가능성이 큰 비교적 젊은 예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만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만화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 아래 적극적으로 영화적 문법을 가져오면서 ‘만화로 그린 영화’(극화)의 개념과 역사가 있습니다만, ‘움직임’의 문제는 영화의 컨티뉴이티 이전에 연극이 있었고, 인간의 시공간 개념은 오랫동안 시각으로 보이는 움직임과 변화에 의존해왔으니까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간의 문명과 무의식에 그 일반적인 형식이 새겨졌다, 라고 할까요. 저는 만화와 영화에 대해서 두 형제가 같이 자랐다는 단순 무식하지만 쿨한 결론을 여러분께 권하고 싶습니다. 쓸데없는 걸 고민하느니 여러분이나 저나 그림 한 컷 더 그리고 시나리오 한 문장 더 쓰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되니까요. 두 매체 역시 결국은 회화의 자식들이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중간에 영화에게는 사진과 광학(光學)이, 만화에게는 약화(略?)나 기호학 같은 각자의 중간 혈연이 존재하겠습니다만, 결국 둘이 사랑하는 엄마는 회화입니다. 프레임 안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려는 욕망은 영화와 만화, 모두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림이 보여주려는 욕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연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 이제 이 ‘욕망’을 다룰 차례입니다.
다시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소년은 그림을 그려 넣기 이전에 칸을 만듦으로써 연출의 기본인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그림만 그리려는 욕망이었다면 칠판 앞의 선생님을 기괴하게 변형시킨 캐리커처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낙서는 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굳이 형식을 갖춘 이유는, 소년의 욕망은 그림 그리기 자체에만 국한된 욕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림을 통해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와 생각하고 느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망― 바로 스토리텔링입니다. ‘인간이 지배층 교사와 피지배층 학생으로 계급이 나누어진 미래의 디스토피아에서 한 소년이 로봇이 되길 거부하고 학교에서 떠나 벌이는 모험’이 스토리라면, 그 메시지는 ‘획일화된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겠지요. 형식은 결국 형식일 뿐, 그 안에 담을 내용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죠. 여기서 영화와 만화의 부모 중 나머지 한 분이 등장합니다. 그분은 문학입니다. 문학과 회화가 영화와 만화의 부모입니다. (엄마 아빠는 지극히 유아적인 구분이고 물론 성별은 없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는 욕망은 결국 문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살면서 문학 따위는 한 번 거들떠 본 적도 없는 작가라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탄탄하고 메시지가 훌륭한 만화를 그리거나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 작품은 ‘문학적’입니다. 문학적이라는 표현은 그 작품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뜻의 여러 표현들 중 하나이므로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업계나 돈만 잘 벌면 충분히 감사하지만, 우리가 훌륭한 작가의 역사에 남길 위대한 작품과 그저 그런 작가의 당장 태울 불쏘시개를 구분하고 결정짓는 영역. 이제부터는 단순히 형식을 넘어 정말로 중요한 욕망, 내용의 연출이 필요합니다.
‘미장센(mise-en-scene)’이라는 용어는 이제 모두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습니다. 영화나 만화 등에서 프레임 내부를 구성하는 모든 것의 총체적인 계획과 실행을 미장센이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배경과 인물과 사물을 어느 위치에 놓고 어떻게 움직일 것이며, 어떤 사이즈로 화면에 담을 것인가? 이때 카메라는 그(들)에게 다가갈 것인가, 멀어질 것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움직일 것인가? 이러한 미장센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고민하고 정하는 것이 곧 연출이며, 만화가나 영화감독이 하는 일은 결국 이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만화가가 이것을 모두 손수 그림을 그려 컷 안에 배치한다면(어시스트와 컴퓨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겠지요), 감독은 미술, 조명, 촬영 감독 등등 온갖 파트의 담당자들과, 역할을 맡은 배우들 간의 합의와 조율을 통해 한다는 것이 다릅니다(또 영화는 나중에 더 많은 합의와 조율을 이루어내야 하는 편집과 후반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이 미장센의 구현을 위해, 만화와 영화는 동일하게 ‘콘티’의 단계를 거칩니다. 콘티는 모든 연출 계획의 설계도입니다. 영화에서는 ‘스토리보드’라고도 부르죠.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이 나뉘는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의 연출입니다. 노련한 연출자는 이야기의 매 장면을 어떻게 하면 독자와 관객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지의 문제에서 더 나은(혹은 더 음흉하고 사악하고 자극적이고 계산된) 선택을 합니다. 경험이 적은 연출자는 이야기 전달에 급급해서 나이브하거나 상투적인 선택을 하죠. 이것은 물론 연출 기술과 경험의 영역이지만 단순하게 기교와 경력의 차이만으로 쉽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업계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새로운 작가가 등장하는 법이니까요. 백전노장의 성벽이 높고 두터운 만큼, 처녀 출전한 신인의 무기와 전술이 또 먹히는 업계가 바로 만화와 영화입니다. 독자와 관객은 어떻게 훌륭한 작가를 알아보는 걸까요? 준비된 이야기와 메시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그림을 어마무시하게 잘 그렸다고 해서 위대한 만화가 되지는 않습니다. 영화 역시 비주얼이 화려하고 배우들의 연기가 출중하다고 해서 무조건 영화사에 남는 걸작이 되지는 않습니다. 독자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출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물론 그걸 안다면 제가 이 글을 더 건방진 어투로 썼겠지요.
제가 처음 영화 공부를 하면서 접했던 개념들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감독은 현장에서 각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가장 떨어지는 스태프’라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뜨악, 하는 반응이 나올 만한 내용이었죠. 가장 전문성이 떨어지는 스태프가 어째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과정과 그래서 나온 결과물에 책임을 지는 거지? 조명의 프로페셔널은 조명 감독, 촬영은 촬영 감독, 미술은 미술 감독… 당연히 파트의 담당자가 감독보다는 그 분야의 전문가일수밖엔 없겠지요. 그런데 감독은 하다못해 연기 지도의 전문가도 아니라는 걸까요? 사실입니다. 연기의 전문가는 배우들이죠. 감독이 하는 일은 나머지 모든 스태프들에게 부탁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하지 말아주세요. 영화판에서 경험이 부족하여 갈팡질팡하거나 스태프들과 소통할 줄 모르는 연출자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감독놀이’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전문가들 눈에는 어떤 부류의 감독들이 커다란 공사 현장에 놀러 온 통제 불능의 어린 아이처럼 보일 것입니다. 때로는 골방에 혼자 틀어박힐 수 있는 만화와는 달리(결코 만화를 위한 노력을 영화와 비교하여 비하하려는 표현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규모의 문제에 있어 영화는 더 많은 인원을 상대해야만 한다는 사실의 지적이죠. 책상 앞에서 벌어지는 나 자신과의 사투를 영화인들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경험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인력과 돈과 시간을 무한정 잡아먹기 딱 좋은 영화판에선 연출자의 판단이 곧 매일의 프로젝트 진행과 직결됩니다. 육체노동과 정신적 고통이 없는 창작이란 없습니다만, 영화판은 좀 심각하게 고통스럽죠. 그런데 감독은 이 고통의 도가니탕인 현장에서 어느 정도 자신만의 편협한 욕구와 즐거움을 추구해야만 하는, 어디까지나 직업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스태프 모두 서서 뛰어다니는 현장에서, 감독 혼자 의자에 앉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시 프레임으로 돌아가 봅시다. 만화의 칸과 영화의 스크린은 결국 독자와 관객의 시선입니다. 두 매체 모두 연출이란, 이 시선을 붙잡아 쉽게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선을 철저히 계획하고 선택한 미장센으로 통제하여, 장면이 겉으로 담고 있는 내용 자체를 넘어 그 이면에 담긴 어떤 진실이나 감정에 독자와 관객을 도달하도록 만드는 일이 바로 연출입니다. 재미있게도 이 시선의 주인은 독자와 관객 이전에 연출자입니다. 연출자는 자신이 보려는 것을 독자와 관객보다 먼저 봅니다. 감독이 현장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있는 이유. 자신이 이야기를 파악하여 전해주려는 연출 의도에 지금의 촬영 장면이 합당한지를 관객보다 먼저 감상해보고 선택이 옳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만화가가 컷을 구상하고 배치하고 그 안에 들어갈 그림의 움직임과 크기를 판단하는 것도 먼저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스토리입니다. 독자와 관객이 이 작가를 다른 작가와 구별하게 만드는 그만의 정체성, 연출자의 오리지널리티는 바로 그가 그의 시선으로 선택한 스토리텔링의 방식입니다. 그 시선이 뻔하지 않고 새로우며 치장이나 거짓 없이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다면, 독자와 관객은 반드시 (뒤늦게라도)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품은 언제나 팔리길 원하기에 근사한 포장으로 영악해지고 소비자인 독자와 관객은 현명하기에 겉모습에 쉽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작가는 항상 새로운 시선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독자와 관객 역시 새로운 시선을 받아들이기 위한 감식안을 기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작품의 독자이자 관객인 만화가와 영화감독은 먼저 자신의 시선을 깊게 채웁니다. 만화와 영화는 물론 돈을 버는 사업이지만, 단순한 경제 활동을 뛰어넘는 기능이 있습니다. 나만의 시선으로 타인들과 같이 본 세상을 통해 이 세상의 진실을, 혹은 다른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함께 꿈꾸는 일이지요. 모두 한낱 이상주의자의 과장된 의미 부여일까요? 제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만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어쨌거나 공책에 만화를 그리며 자기 세계에 푹 빠져있는 이 소년은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
어느덧 세 문장 요약을 해드려야 할 부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구구절절 길게 떠들었습니다만 요약하자면, 1. 만화와 영화는 칸=프레임=컷의 형식에 내용을 담는다는 점에서 연출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2. 스토리텔링을 위한 미장센의 구성이 곧 만화와 영화가 연출하는 욕망=내용이다. 3. 칸=프레임=컷 안의 미장센은 관객과 독자의 시선이기 이전에 작가의 고유한 시선이며, 이 시선의 통제가 바로 연출이다. 글을 마쳐야 하니 어떻게 잘 정리한 것 같네요. 만화와 영화 연출의 차이점을 주로 이야기하길 바라시고 원고 청탁을 주신 것 같습니다만, 전 비슷한 점만 중점적으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이 의외성이 언제나 제가 추구하는 것이지요.
에필로그 삼아 조금만 더 떠들겠습니다. 요즘 들어 더욱 활발한 만화의 영상화, 소위 ‘미디어 믹스’는 일단 콘텐츠의 다양성을 위해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다만 한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모 웹툰의 실사영화화 프로젝트에 몇 년간 종사한 적이 있습니다. (원작의 제목을 밝히진 않겠습니다) 영화사에서는 수백억을 투자하는 블록버스터에다가 무려 삼부작을 기획했었고, 저는 1편의 시나리오와 트릴로지의 큰 방향성을 잡은 2,3편 및 외전의 시놉시스를 작업했었지요. 프로젝트는 당시 외부적으로 알려진 유명세에 비해 영화사 내부에선 의외로 오랫동안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모 유명 감독님께서 작업하시다 남긴 시나리오를 보았지만 원작에서 아이디어와 캐릭터 설정 일부만 끌어왔을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죠. 저는 원작의 에센스가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워 도리어 원작에 충실하길 제안했고 각색 방향이 통과되어 열심히 썼답니다. 마침내 회사 내부에서 제작에 들어갈 수 있는 시나리오란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원작자로부터 (대면한 적이 없기에 직접은 아니지만) 각색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메시지를 전해 듣고 무척 기뻤지요. 결론은, 프로젝트는 다시 멈췄어요. 판권의 재계약도 도중에 그친 모양입니다. 표류의 시간을 좀 더 줄일 수 있었다면 어떤 결과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최근에도 다른 모 웹툰의 영화화 각색 제의를 받았다가 고사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역시 원작에서 아이디어만 가져오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버전만의 재해석은 물론 좋습니다만, 설정이나 아이디어 일부만을 가져오는 것은 원작의 유명세나 인지도를 손쉽게 소비할 뿐인 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게으른 기획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죠. 웹툰 원작이 돈이 된다는 건 원작자에게는 물론 아이템에 목마른 영화사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원작을 영화로 만들면서 만화적 상상력을 영화적 개연성과 현실성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을 너무나 쉽게 간단히 포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독자가 그 작품을 사랑한 이유는 단순히 몇 가지 설정만은 아닐 것이고, 원작만이 가진 개성과 그 본질을 찾아내서 영화에 제대로 담아야만 진정한 미디어 믹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냥 일회성 이벤트에 지나지 않지요. 결과물에 독자와 관객이 계속해서 실망한다면 지금의 붐이 사그라질 것이고 업계는 위축됩니다. 그러면 서로 좋을 게 없죠. 방송 쪽에서는 비교적 원작에 가까운 각색이 점차 이루어지는 반면, 영화에서는 아직 경직된 면이 있는 듯 합니다. 원작자는 판권을 팔고 재창작의 공정을 모두 맡기는 선에서만 그치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영화사에서도 원작자의 개입을 계약 선에서 봉쇄하는 대신 처음부터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영화화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판권을 사고 팔면 끝이 아니라 서로를 진정 존중하면서 원작을 어떻게 제대로 영화화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양쪽 모두 막연히 돈을 벌리라고 예상하는 선에서 손쉽게 OK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죠. 한 작품이 또 다른 작품으로 영향력을 이어가는 일은 단순히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노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진짜 노력은 다른 사람이 하다 보면 수준에 못 미치는 영화화가 되거나, 표류의 시간이 길어져 애초의 시도가 없던 일이 되고 마니까요. 만화는 만화고 영화는 영화다, 란 생각은 낡은 관념입니다. 제가 연출의 본질은 같다고 앞에서 말한 건 진실이니까요. 업계 간에 서로의 경계를 열지 않으면서 껍데기뿐인 미디어 믹스만 한다면, 마블 앙상블에 버금갈 수준의 훌륭한 만화 원작 영화는 이 땅에서 절대 볼 일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