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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비 그래픽노블 : 사회를 바라보는 창구, 소통의 몸짓.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은 스웨덴 여성 만화가인 오사 게렌발의 『7층』 (2014년 11월 출간)을 펴내면서 시작되었다. 제목에서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2013년 11월 파리 근교 몽트뢰이 아동 도서전에 참가했을 때 우연히 발견하였다. 사실, 이 작품의 프랑스 판본을 출간한 프랑스 라그륌 출판사의 도서목록을 보면서 오사 게렌발 외에도 다른 스웨덴 만화가가 눈에 들어왔는데 『우리 부모님』 의 펠레 포르셰드다.

2017-08-17 한소원

(색깔있는 만화들 2)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은 스웨덴 여성 만화가인 오사 게렌발의 『7층』 (2014년 11월 출간)을 펴내면서 시작되었다. 제목에서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2013년 11월 파리 근교 몽트뢰이 아동 도서전에 참가했을 때 우연히 발견하였다. 사실, 이 작품의 프랑스 판본을 출간한 프랑스 라그륌 출판사의 도서목록을 보면서 오사 게렌발 외에도 다른 스웨덴 만화가가 눈에 들어왔는데 『우리 부모님』 의 펠레 포르셰드다.

프랑스가 ‘스타일’의 나라라면 스웨덴은 우리에게 ‘복지’의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복지’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있다. 사회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시스템을 보다 견고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순진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스웨덴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라고... 그런데 한 출판사의 도서목록에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문제작들이 모두 스웨덴 작가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본인이 겪은 데이트 폭력을 가감 없이 폭로한 오사 게렌발도 그랬지만 특히, 스웨덴 노인복지 문제의 허점을 절제되고 귀여운 그림으로 표현한 펠레 포르셰드의 작품은 책을 덮은 뒤에도 한참동안 생각이 날 정도로 여운이 깊었다.



그 동안 국내에 출간된 대부분의 그래픽노블이 프랑스나 영미 작품들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북유럽 그래픽노블은 생소할 법도 한데, 스토리의 서사적 표현보다는 오히려 그래픽의 미적 감각에 치중하는 프랑스의 그래픽노블 혹은 마블이나 디씨 코믹스에서 볼 수 있는 다크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작품들과는 확실히 다른 깊이가 있었다. 그래픽노블이 다른 문학 매체들 보다 유리하게 한 사회의 바로미터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과 그림을 통해 풍부해진 작가 개인의 경험과 사고를 어떤 틀 없이 자유롭게 확장해 놓은 지면 안에서 독자는 작가와 자연스럽게 호흡하게 된다. 영상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어떤 쉴 틈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과용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가와 독자가 서로 호흡하는 형태다.
독자는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그리고 사회를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사 게렌발과 펠레 포르셰드의 두 작품을 출간하게 되면서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 같다. 개인 혹은 가족의 문제를 통해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들의 라인업이 시작된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복지천국이라고들 하지만 어찌 사람이 사는 곳이 완벽할 수 있으랴. 각 나라마다 고유한 사회의 틀 속에 던져진 물음표들을 표현하는 작가들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이기 때문에 스토리만큼 그래픽이 주는 미덕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쓰는 표현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아름답다’이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혹은 ‘귀엽다’의 단어가 가지는 단편적 이미지가 아닌 ‘아름답다’라는 단어 안에 삶의 희노애락이 담겨있는 것 같다.
우리나비에서 펴낸 또 다른 그래픽노블 『엉클어진 기억-알츠하이머와 엄마 그리고 나』를 보고 있을 때면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따라서 제작자로서 독자와 대면하게 될 때 이 작품을 많이 추천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독자들은 ‘치매’, ‘알츠하이머’라는 단어만 보고 읽기 힘들 것 같다고, 너무 슬플 것 같다고 아예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가족의 위기를 마냥 슬플 것 같다고 외면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는 사람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슬픔과 안쓰러움 그리고 불편한 마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지금 오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런데 그 위기를 어떻게 겪는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그리고 위기를 잘 겪어낸 사람들에게는 따뜻함이 묻어있다. 상처로 구멍 난 마음은 진심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위로할 수 있는 또 다른 창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적이고 사리분별이 밝았던 50세의 어머니에게 닥친 치매가 발병되자마자 딸은 그림일기를 적는다. 그 사적기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하나의 그래픽노블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삶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있는데 그것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가족들이 돌보는 과정에서 나타난 유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유머는 일부러 애를 쓰지 않아도 열린 마음으로 위기를 돌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삶이란 아픔과 어려움이라는 시간 속에서도 자연이라는 공간속에 위로를 받으며 유머를 조미료 삼아 살아내는 것.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이런 작품은 참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밖에도 독일의 젊은 만화가, 아이샤 프란츠의 작품 『사랑하지 않아도』 도 성장 통을 겪는 세 모녀의 이야기가 참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각자의 외로움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외면하려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싱글 맘과 자녀들의 외로운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마치 손에 묻을 듯 한 연필선의 질감을 글과 그림 안에 완벽히 구현해 낸 이 작품은 그래픽노블은 한번만 읽고 서가에 꽃아 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또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어쩌면 이토록 만화가 문학적일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외로움이 가슴 위까지 차올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 이 작품을 다시 꺼내본다면 주인공들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픽노블은 마치 영화처럼 읽혀진다. 콘티가 있는 두 매체가 닮아서일까. 그런데 그래픽노블은 또 한편으로는 연극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리나비 그래픽노블 중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바로 파코 로카의 『내 아버지의 집』과 오사 게렌발의 『가족의 초상』,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이다.


파코 로카의 작품은 잘 만들어진 한편의 스페인 영화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원제가 『집』 인 이 작품은 결국 아버지의 집을 통해 아버지를 차츰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집이 곧 아버지인 셈이다. 배경과 인물 모두 스페인과 그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랑코 독재시절 못 먹고 못 살았던 시절 유일한 소원이 가족들과 오붓하게 살 수 있는 번듯한 집 한 채를 짓고 싶었던 파코의 아버지는 6.25 동란을 겪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과 무척 닮았다. 무뚝뚝하고 과묵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들은 살아생전 잘 알 수가 없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1년 뒤 다시 모인 아버지의 집에서 그를 떠올리며 추억한다. 이처럼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 스토리는 세대 간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가족의 모습, 우리 이웃의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 오사 게렌발의 두 번째 작품이자 30대에 쓴 『가족의 초상』 은 가족 간의 소통 부재를 5막 1장의 심리 드라마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가족도 있는데 이것이 또한 마냥 지어낸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점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한편, 40대에 쓴 최신작 『그들의 등 뒤에서는 좋은 향기가 난다』 는 물리적 학대도 없는 평범한 가족의 구성원이었던 주인공 오사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면서 성인이 된 뒤 결국 ‘정서적 방치’라는 진단을 받게 되는 과정을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성인이 된 내가 안고 있는 표지그림에서 보여주듯이 심리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은 줄리아 워츠의 『끝없는 기다림』 이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도 모두 그러하지만 우리나비의 거의 모든 그래픽노블들은 자전적인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 또한 글로벌 N포 세대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10여 년 전 즈음에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프랑스 소설 99프랑 (이 소설은 프랑스의 젊은 실업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한국사회에서 88만원 세대와 닮아있다.) 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날 청년 실업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줄리아 워츠는 일정한 직업 도 없이 카페 혹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간다. 서비스업이 대개 그렇듯이 감정노동에 시달리면서 건강도 악화되고 성추행을 당하는 등 좌충우돌하는 삶을 산다. 하지만 독서와 그림 그리는 일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결국 자신이 경험한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만화가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만화가 홍연식의 마당씨 3부작 중 제 1부, 『마당씨의 식탁』 과 제 2부, 『마당 씨의 좋은 시절』 또한 캐릭터들이 사람에서 고양이로 형상화되고 판타지가 가미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고스란히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스토리의 큰 뼈대를 구성한다.
『마당씨의 식탁』 은 전작 시골만화 에세이 『불편하고 행복하게』 와 맥락을 같이하며 소소한 삶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건강한 삶이란 어떤 것이고 행복이란 무엇이며 나에게 있어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텃밭을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는 것은 누구나 한번 쯤 꿈꾸어보았을 삶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병든 노부모를 부양해야만 하는 삶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더군다나 창작활동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티스트의 무게감은 자연친화적인 일상을 마냥 즐길 수만은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한국적이면서 보편적인 우리의 밥상문화, 가족문화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녹록치 않은 시골 살이를 겪어나가며 한때는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시절이 척박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늘 어머니의 손길이 있어 따스했던 과거를 반추한다. 지키고 싶은 나만의 세계와 부모님에 대한 애환이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 모두로 하여금 병들고 나약해진 부모님을 한번 쯤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회환과 자책을 가슴 한편에 간직한 채 늘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시고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레 요리해주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마당 씨는 자신이 직접 길러낸 배추와 무로 김장을 담그고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애증으로 보듬고 살아가기로 한다.

한편, 『마당 씨의 좋은 시절』 은 홍연식에게 참 좋은 시절이었던 2011년도 일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로 엄마 생각에 울컥하던 시기였지만 아버지는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상태였고 작가인 그에게 난생 처음 ‘알바’ 안하고 창작에만 몰두한 평화로운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절도 꿈꾸던 완벽한 가정과 현실이 부딪치면서 고민하는 모습이 나온다. 가장으로서의 무게, 무심한 이웃 그리고 아내와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처음 생각했던 전원생활의 낭만은 부질없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그때가 오히려 가족이란 고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 좋은 시절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행복하고 좋았던 시절이었다는 결론을 낸다. 그건 바로 가족과 함께 라는 이유에서이다. 불편하고 힘들고 어렵고 속상했던 일들... 그러나 그 속에 함께했던 가족이 있음에 되돌아보면 모두 행복하기만 했던 일상이었던 것이다.
삶의 분명한 명암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흑백만화를 선택 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 안에서 주인공의 힘든 삶과 대비되는 시골풍경의 모습은 그가 처한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된다. 특히, 페이지 만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배경을 펼침 면으로 연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서사적 몰입에서 잠시 벗어나 사색의 시간으로 안내한다. 어쩌면 그의 전작 『불편하고 행복하게』의 제목처럼 우리의 삶은 동전의 앞뒤 면처럼 조금은 불편하고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나비의 그래픽노블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분모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자 개인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가족 이야기다. 가족은 한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다. 특히 오늘날 가족은 여러 형태로 분화되거나 쪼개진다.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은 다양한 가족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양한 삶의 형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목소리들을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이라는 그릇으로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라와 언어는 다를지언정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닮아있기 때문에 작가들의 개인사, 가정사 또한 보편성을 담보하리라 생각한다. 그 안에서 작가와 독자가 허물없이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지점에 그래픽노블이 뿌리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최근에 소설가 신이현 작가와 만화가 김연수의 콜라보로 탄생한 작품 『알자스의 맛』 또한 다문화 가정의 한 예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국경을 떠나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내리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남자 ‘도미’와 결혼 한 한국여자 ‘현’. 파리에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시댁은 머나 먼 알자스 지방이다. 파리에서도 자동차로 수십 시간을 달려야 하는 알자스. 그러나 그곳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맛과 멋이 있으니, 바로 독특하고 개성 있게 꽃피운 음식 문화이다. 슈크르트, 플랑베, 뱅쇼, 그리고 프랑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각종 와인들까지, 『알자스의 맛』은 사계절 식탁 앞에 둘러앉은 가족들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그려냈다. 평생을 알자스에서 살며 음식을 만들어 온 시어머니 루시, 노심초사형 이지만 다정다감한 시아버지 레몽,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가족들과 친척들이 만들어가는 소박하고 달콤한 삶의 이야기. 작지만 정감 있는 그들의 식탁을 마주하면서 우리의 식탁과 비교해 보는 재미와 함께 식구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일본만화에서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희귀한 색연필로 직접 쓰고 그린 김연수 작가만의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작화 또한 이 작품을 읽는 즐거움이다. 스토리와 작화의 균형이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한편의 일러스트처럼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페이지가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술적인 측면만 고려한 채 알맹이는 빠져버린 듯 한 느낌을 주는 작품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국내 작가들에게 손 글씨를 써 달라고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 만화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될 것이다. 만화는 그래픽과 그래픽 사이에 혹은 그래픽 안에서 텍스트가 자유자재의 형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작가마다 작화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결을 무시한 채 가독성만을 우선시한 무미건조한 식자작업이 된 그래픽노블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것은 마치 조리가 없어 돌을 거르지 못하고 밥을 해 놓아 입안에서 이물질이 걸리적거리는 모습과 닮았다.

식자 또한 그래픽의 한 형태로 자연스레 그림과 녹아 어우러지는 모습을 좋아하다보니 작가님들께 손 글씨를 부탁하는데 처음 작업할 때면 의견이 충돌하기도 하지만 출간이 되어 결과물을 보고 나서 독자와 작가 모두 만족하는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 『알자스의 맛』 도 김연수 작가의 손 글씨작업이었지만 박건웅 작가의 『제시이야기』 또한 먹과 붓 고유의 화풍과 손 글씨가 시대적 배경이 주는 느낌과 적절하게 어울리며 조화로운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들마다 그림 스타일이 있듯이 국내 작가들 고유의 서체를 각각의 작품 안에서 발견하는 재미와 기쁨이 있다. 외서의 경우, 외국 작가님들께 한글을 써 달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되도록 그래픽과 어울리는 서체를 활용하여 작업하려고 노력한다. 『제시이야기』 는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육아일기를 역사적 고증 하에 그래픽노블로 재구성하여 복원한 작품으로 중일전쟁이 한창인 시기이자 맏딸 제시가 태어난 1938년부터 광복 후 귀국하던 1946년까지 고통스러운 시절의 삶을 고스란히 기록하였다.


딸의 재롱에 미소 짓고 조그만 생채기에도 마음을 졸이던 평범한 가족,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 전쟁의 포화 속에 타국을 떠돌며 생사를 오가는 동안의 심경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일전쟁 한가운데 삶과 죽음의 공존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작품은 타국인 중국에서 자라는 제시를 바라보는 부모의 애틋한 사랑, 독립운동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의연함, 한국 동포들 사이의 따뜻한 정뿐만 아니라 한중 정치인들의 우정, 한국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도움과 배려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맏딸 ‘제시의 일기’를 통해 밝힌 것처럼 박건웅 작가 또한 그만의 고유한 화풍으로 중국 상해부터 중경까지의 다양한 모습을 복원했다. 이렇게 홍연식, 박건웅, 김연수 등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외서와 달리 페이지가 꽤 많은 편이다. 많은 것은 600쪽 가량, 최소 3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담다보니 종이 선택에 있어서도 고심하게 된다. 가급적 너무 무거워 손에 들기도 힘든 가까이 하기에 먼 종이를 일차적으로 배제한다.

또한 그래픽노블의 특성상 소장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려다 보니 책 꾸밈새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펄프제지였다. 무겁게 보여도 막상 무겁지 않은 종이 그리고 아날로그의 방식으로 작업한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더 아날로그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종이는 예전의 우리가 만화방에서 손쉽게 만날 수 있었던 펄프다. 가공이 되어 있지 않아 손으로 만져보면 나뭇결이 느껴지는 종이다. 인쇄된 작품이 향수를 불러일으킴은 물론이다. 우리나비 국내작가들의 다섯 작품 모두 판형과 종이가 동일한 것은 묵직한 볼륨이 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SPP 행사에 다녀왔다. 우리나비에서 펴낸 작품들 대부분이 웹툰과는 달리 현실의 삶을 반영하는 진중한 작품들이라서 과연 해외 바이어들이 좋아할 수 있을까? 라고 반신반의하며 별 기대 없이 참가했다. 물론, 그곳에서 만난 대부분의 바이어들이 로맨스 코미디 혹은 시류의 흐름을 타거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웹툰과 캐릭터들을 찾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비가 지향하는 부분을 함께 공감해 주는 해외 업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용기와 확신이 생긴 것도 예기치 못했던 큰 수확이었다. 다양성을 담고 싶다는 의지로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을 라인업하면서도 해외 바이어들의 다양성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만의 고유한 색깔을 지닌다는 것은 마이너한 것일 뿐만 아니라 매니악적인 것이기 때문에 대중을 끌어당길 수 없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트랜드는 오히려 고유한 색깔이 다른 일반적인 색깔들에서 확실한 차이를 보여줄 때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확실히 달라야한다는 강박이 크다고 해서 트랜드를 리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비는 상식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자 한다. 앞서 줄곧 이야기했던 자전적인 작가주의 그래픽노블 외에도 편향된 이데올로기의 횡포 하에 봉인된 역사 속 잊혀져가는 인물들의 삶, 대중의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갇혀있는 사람들,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토론하며 차츰 바꿔나가야 할 우리 사회에 만연된 온갖 부조리 등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작년에 박건웅 작가와 함께 작업한 독립운동가 양우조, 최선화 부부의 육아일기인 『제시이야기』를 출간하면서 느꼈던 부족함을 또 다른 작품으로 제작해 채워 넣을 계획이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색깔 프레임 논쟁의 희생자들로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지극히 저평가 되어있거나 무가치하게 치부되어 버린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적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편,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제이주를 당한 조선인들의 삶을 담은 디아스포라 이야기 등이 있다.


우리나비 그래픽노블이 모쪼록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써 또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소통하여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로써 궁극적으로는 삶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통로로 끊임없이 활용되고 재생산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각기 다른 고유의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는 소명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래픽노블을 읽어야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