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교통수단이랄 게 마땅치 않았던 시기부터도 쉬 닿기 어려운 곳을 찾으며 자기 발걸음을 기록으로 남겨 왔다. 옛 지식인들이 새로운 공간에서 겪고 느낀 바를 남긴 기록은 훗날 중요한 사료가 되기도 했지만,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바쁘고 여유 없는 대중들에게 대리만족을 충족시키는 역할로도 쓰이고 있다. 여행 예능의 탈을 쓴 나영석 PD의 방송 프로그램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지금 내 주 생활공간과는 다른 곳에 서 있다는 일 자체가 방송용 설정이 아니어도 특별하고 독특한 일임을 ‘대신’ 그리고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터다.
어찌 보자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담에 지나지 않을 기록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실감 나는 게 여행 이야기다. 그런 여행 이야기가 만화가를 만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여행이 만화가를 만나 탄생한 재미난 만화들을 한 번 만나보도록 하자.
김진 & 서나래 & 필냉이 공동 창작 | 네이버 웹툰 연재작 (2012.08~2012.11, 완결)

「낢이 사는 이야기」의 서나래 작가, 「나이스 진 타임」의 김진 작가, 그리고 「고양이 일기」의 필냉이 작가가 한 달에 걸쳐 다녀온 몽골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낸 작품. 연일 고된 원고 마감에 시달리던 친한 만화가 여성 셋이 모여 앉아 ‘같이 여행이나 다녀오면 좋겠다.’라 생각한 게 발단이 됐다.
한데 막상 여행 이야기만 꺼내놓고 일상에 치이다 1년이 훌쩍 지나고 중간에 필냉이 작가의 혼인까지 걸리니 어느 순간엔가 이러다가 여행은커녕 얼굴 보기도 힘들 거라는 불안이 폭발한다. 결국 당장 떠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이들이 택한 여행지는 초원과 별과 귀여운 동물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몽골’이었다.
한때 대륙을 호령한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사는 곳이지만 지금은 조용히 유목 생활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척박한 땅. 「한 살이라도 어릴 때」는 그런 곳에 여성 셋이 근 한 달간이나 머물면서 그야말로 먹고 타고 자고 싸는(!) 야생스러운 체험을 감행한 결과물이다. 서로를 잘 아는 여성끼리만 갔기에 가능했을 법한 화제들이 꽤나 적나라하게 등장하는 것도 재미고, 한국에서 산 적이 있다는 가이드 아저씨와의 인간적인 관계 형성도 소소한 볼거리다.
‘몽골에 가면 이것만은 체험해보라.’ 같은 걸 넣기 위한 강박이나 특이한 장면 인증을 위한 강박은 그다지 없다. 물론 ‘이런 거라면 소재로 쓸 만하지 않을까!’라며 웃고 있었을 만화가다운 강박(?)만은 화면 가득 묻어난다. 그 덕인지 이 만화를 읽다 보면 ‘만화로 그린 여행기’가 영상과는 다른 장점이 있음도 새삼 알게 된다. 비주얼 적으로 생생하면서도 다분히 개인적인 사정과 속내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여행기 만화는 대규모 예산과 스탭을 동원해야 만들 수 있는 영상 속 여행과는 완전히 다른 맛을 제공해준다.
몽골은 마침 연예인들의 오지 경험기로 사랑 받고 있는 「정글의 법칙」에서도 바로 얼마 전 다녀간 곳이다. 얼음 밭이었던 시베리아만큼이나 황량하고 척박한 환경에 떨어진 연예인들의 고군분투를 재미있게 봤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를 읽어보며 장면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작품의 백미이자 화룡점정은 역시 제목이다. 먼 여정이란, 정말 늘 ‘한 살이라도 어릴 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저질러야만 시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한 살씩 먹는 만큼 어려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쉽진 않겠지만 세 작가분이 또 다른 곳에 다녀와 그린 여행기 만화가 나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캐러멜 | 다음 만화속세상 연재작 (2014.05~2014.08, 안동/부산 편 시즌 완결)

제목부터 「결혼해도 똑같네」의 연장선 같은 만화 「여행해도 똑같네」. 다른 게 있다면 「결혼해도 똑같네」를 네온비 작가가, 「여행해도 똑같네」를 캐러멜 작가가 그렸다는 점이다. 「여행해도 똑같네」는 어시스트와 만화가에서 스토리 작가와 만화가 사이로, 그리고 부부 만화가로서 따로 또 같이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두 작가가 신혼여행 격으로 다녀온 겨울여행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단 「여행해도 똑같네」에서는 「결혼해도 똑같네」를 본 이들이라면 내내 돋았을 훈내나는 닭살이 여지없이 작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만화 자체가 「다이어터」 「나쁜 상사」를 비롯해 공동 창작과 개인 창작을 번갈아가며 진행하고 있던 아내를 좀 쉬게 하고 싶다는 남편의 일념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당시 네온비 작가가 진행하던 작품이 마무리되면 잠시라도 쉴 틈을 줄 수 있다면 캐러멜 작가가 단독 연재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가 발단이었다. 「결혼해도 똑같네」에서 아내가 잡아놓은 부부 캐릭터를 남편이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들의 이야기로 그려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 염장의 극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행해도 똑같네」는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적잖게 건네주는 만화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가 즐겁기 이를 데 없는 친구들과의 여행이라면 「여행해도 똑같네」는 둘이 부부가 된 후 떠난 ‘신혼여행으로서의 여행’이다. 그리고 이들은 네온비 작가가 원했던 신혼여행지인 제주도가 아닌 안동/부산 쪽을 택했다. 네온비 작가가 데려온 애완견 동구를 함께 데려가야 했기 때문인데, 이로 말미암아 동구는 인생에서 꽤 큰 이벤트 가운데 하나인 신혼여행의 필요조건이 됐다.
작품 속에서 언급하듯 캐러멜 작가에게 동구는 좋아하는 강아지이자 가족이면서 동시에 ‘아내가 된 이가 거두고 사랑을 쏟은 아이이기에 좋아하려 노력하는 대상’이다. 그 미묘한 차이는 엄연히 부부 사이가 ‘1’이지만 또한 ‘2’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이 부부는 2를 1처럼 맞춰가기 위한 고민점 앞에서 쉬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았다.
혼자가 아닌 이상에야, 여행은 말할 것도 없고 매사 간단한 행선지를 고르는 일 자체가 숱한 갈림길과 타협과 포기의 연속이다. 하물며 친구도 아닌 가족이라면 준비하고 고민해야 할 점이 곱절로 늘어난다. 캐러멜-네온비 부부에게는 강아지였지만 사람이어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이 작품이 여행에서의 재미난 이야기만이 아니라 동구 이야기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는 건 여행의 의미를 ‘함께 하고자 하는 것’과 그 이유를 찾는 데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행지를 재밌게 소개하는 여행기만을 기대했다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었겠고 댓글에도 이러한 당혹스러움을 내비친 이들이 제법 보이는 듯하지만 남과 남이 가족을 이뤄 함께하는 첫 여행의 기록이란 면에서 읽으면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의 전제 조건으로 고생해 본이라면 박수를 치며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시즌1으로 종료된 상태로 2년이 흘렀지만 시즌1 열두 화가 주는 여운은 꽤 크다. 아내인 네온비 작가가 그린 「결혼해도 똑같네」를 다시 읽으며 다음 편을 기다려본다.
토노·우구이스 미츠루 글/그림 (2011.12, 단권 완결) | 서울문화사 출판

「치키타 구구」 「칼바니아 이야기」 「코럴」 등으로 코어한 팬층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만화가 토노(TONO) 작가가 동생인 우구이스 미츠루와 함께 그린 해외 여행기. 웹툰이었던 앞서 두 작품과는 달리 전형적인 흑백 출판만화 형식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하와이, 독일, 이탈리아, 북아일랜드, 프랑스,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등을 다녀온 이야기가 담겨 있다.
TONO 하면 워낙 독특한 세계관과 감성이 장기인데, 직접 다녀와 그려낸 여행기마저도 그만큼 범상찮다. 이를테면, 여행기라고 하면 보통 재밌었던 경험이나 추천점과 같은 비교적 긍정적인 부분의 비중이 높게 마련이라는 통념이 있는데 TONO 작가의 여행기는 그런 게 편견이라는 양 내내 거침없다.
한 화가 끝나기 직전 칸까지 내내 고생한 이야기나 괴상한 경험이 펼쳐진다거나 약간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을 문화적 차이 등등이 제목에 ‘우왕좌왕(원제에는 うろうろ)’이라 적혀 있는 말 그대로 정신없이 쏟아진다. 보통은 뭐지 이 괴상한 전개는? 이라면서 찌푸릴 법도 하건만 문제는 이 만화를 그린 게 TONO 작가라는 점이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많은 부분이 납득이 간다는 건 작가가 구축해 온 작풍이 그만큼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재밌는 건 만화가인 여동생 미츠루의 여행기도 언니 못지않게 범상찮은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인데, 언니 TONO에 비해서는 조금 덜 독특한(?) 구성이긴 하지만 만만찮은 고생&경험담으로 가득하다. 이들의 여행 경험에 아마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어머니의 여행벽도 일부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까지 읽고 나면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다.
책 소개에는 ‘여행 가이드’라고 적혀 있지만 가이드로 참고하기보다는 TONO 작가의 독특한 레이더망에 잡힌 독특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상을 함께 즐기는 차원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을 책이다. 만약 이 책을 읽은 독자가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면 여행의 포인트를 조금은 색다르게 잡아보는 데에 도움이 될 법도 하겠다. 같은 여행지를 가서도 보고 겪는 게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 일행의 일본 여행 - 오사카, 고베, 교토」 정구미, 김미정 공저 (2007.03 단권 완결) | 안그라픽스

여행 가이드북과 만화의 만남이라는 측면에 가장 충실한 책으로는 노란구미 작가와 친구 김미정 씨가 함께 지은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 일행의 일본 여행 - 오사카, 고베, 교토>를 들 수 있겠다.
노란구미(정구미) 작가는 일본에서 재일교포 2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재일교포 2.5세로 태어나 20여 년을 살다가 한국에 유학을 와 만화를 그리게 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노란구미 작가는 셀프 인테리어를 통해 힐링을 꾀하는 「은주의 방」을 연재 중이고 한국에서 혼인까지 했지만, 이전까지 연재했던 작품 가운데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 차이와 재일교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소재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청년기 초반까지를 경험한 일본을 바라보는 눈은 현지인에 가까운 편. 이 책은 ‘관광지가 아닌 현지의 일본을 느껴보자’라는 취지로 노란구미 작가와 편집 디자이너인 친구 미정 양이 함께 만든 일본 칸사이(관서) 지방 주요 도시 가이드북이다.
기본적으로는 가이드북인지라 지도, 사진, 글이 많다. 하지만 노란구미 작가 특유의 귀여운 그림이 돋보이는 중간중간의 자투리 만화/삽화는 물론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만화로 구성해 넣은 갖가지 역사 및 지역의 뒷 이야기들이 이해를 돕는다. 특히 노란구미 작가는 단지 만화를 여행 가이드의 곁다리로 넣기보다 생각해 볼만한 지점들을 건드리는 데에 이용하고 있기도 해 여행 가이드에서 만화가 어떻게 쓰이는 편이 좋을지를 잘 보여준다. 교토에서 30년간 택시 운전을 하며 교토 안내를 맡아 온 작가의 아버지도 세밀한 정보와 도시의 매력을 전달하는 데에 한 몫 한다.
노란구미 작가 일행이 칸사이의 주요 도시를 선택한 이유로는 아무래도 역시 먹거리와 역사적 볼거리가 풍부하다는 점이 꼽힐 터다. 다루는 대상을 세 도시로 확실히 좁힌 덕에 정보의 세밀함과 질은 매우 높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1차로 먹거리, 2차로 볼거리를 비주얼하게 소개한다는 목적성에 충실하고 있기에 큰 길 따라 일행 따라 수박 겉핥기만 하기보다 골목 구석구석의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면 참고하기가 참 좋다. 참고로 나 또한, 첫 일본 여행에서 이 책으로 매우 큰 효과를 본 바 있다.
벌써 나온 지 다소 되는 책이어서 중고로 구해야 하는 수고를 겪을 수도 있고 일부 현지 매장 사정이 출간 당시와는 조금 달라진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해당 도시들에 여행을 가고 싶다면 반드시 찾아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