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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샤를리지? - 프랑스에서의 웃음과 데생의 50년 2부

2016-01-21 로랑 멜리키앙 / 번역 : 한상정
1980년대 동안 경제적 위기의 충격 때문에 사회주의 권력의 인기는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프랑스 국제정치는 미국의 위세에 대해 저항하는 다른 방향의 길을 선택한다. 1991년 1월 프랑스는 이라크에 대한 제 1차 걸프전에 동맹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처럼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대구경 곡사포의 이름이기도 한 <그로스 베르타(La Grosse Bertha)>라는 새로운 풍자 주간지가 탄생한다. 이 잡지는 <샤를리 앱도>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뿐 아니라 <샤를리 앱도> 필진의 대부분이 관여하고 있었다. 1992년 여름 동안 <그로스 베르타>의 발간인과 풍자작가인 편집장 필립 발(Philippe Val)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고 필립 발은 카부(Cabu)와 함께 이 잡지를 떠난다. <샤를리 앱도>를 재출간하기 위해 대부분의 필진들이 그들을 뒤따른다.  

쇼롱 교수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카부, 볼랑스키, 제베(Gebe), 빌렘 그리고 카바나 등이 새로운 <샤를리>의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다. 쇼롱은 옛 동료들과 사이가 틀어진 채로 <하라-키리>를 재출간하려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새로운 <샤를리>에는 정치적 성향이 명확한 또 다른 잡지만화가가 참여하게 된다. 시네(Sine)라고 불리는 모리스 시네(Maurice Sinet)는 50년대 말부터 유명해졌는데, 알제리전쟁이 벌어질 당시 고문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샤를리>와 <하라-키리>가 쇠퇴기에 접어들던 1981년에 두 잡지에 합류했었다. 선배들의 지독했던 풍자적인 태도를 그대로 견지했던 뤼즈(Luz), 리스(Riss), 티그누(Tignous), 샤르브(Charb), 오노레(Honore), 줄(Jul) 등의 젊은 작가들의 참여는 이 잡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후 이들은 이 잡지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많은 대중들의 환호를 받게 된다.   

2004년까지 편집장으로서, 그리고 2009년까지는 잡지 발간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던 필립 발의 주도하에 <샤를리 앱도>는 다른 색깔을 취하게 된다. 유머는 항상 잡지의 주요한 정신이었지만 카툰과 스토리 만화들은 이때부터 정치 사설들, 전문적인 기사들, 경제적 문화적 기사들과 함께 결합했다. 국가적인 정치적 논쟁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특히 국민전선(Front national)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마리 르 펭(Jean-Marie le Pen), 그리고 그의 딸 마린 르 펭(Marine le Pen)이 주도하는 이 극우 정당은 1981년에는 아주 작은 정당이었다. 하지만 몇 년 후 국민전선은 프랑스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게 된다. 국민전선의 지도자들은 이민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취하면서 <샤를리 앱도>의 감성과는 반대되는 외국인 혐오증, 인종차별주의, 유태인 학살을 부인하는 입장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1995년 이 잡지는 국민전선의 활동을 금지하는 청원을 전개한다. 이 청원의 작성자들에 따르면 이 정당은 그들의 인종차별주의적 프로파간다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부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6년 4월 타부, 샤르브(Charb), 그리고 필립 발은 173, 704명의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소형 화물차를 타고 내무부에 방문한다. 청원은 커다란 성과 없이 끝나게 된다. 

필립 발이라는 인물은 자주 논쟁의 중심에 대두된다. 영향력이 큰 인물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이후의 잡지가 견지하게 되는 좌익의 이상(理想)에서부터 너무 떨어진 입장을 취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그는 1999년, 코소보의 분쟁을 끝내기 위해 유엔이 유고슬라비아에 가한 폭격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의 의견은 잡지 필진 대다수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았었다. 2008년 1월, 필립 발과 시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시네는 <샤를리 앱도> 외부의 몇몇의 편집자들이 반유태인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모호한 성격의 짧은 글을 잡지에 싣는다. 그러자 필립 발은 시네에게 이러한 혼란을 야기한 점에 대해 사과의 글을 올릴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시네는 이를 거부하고, 샤를리의 몇몇 동료들과 많은 이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시네를 해고한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시네는 자신의 잡지 <시네 앱도(Sine Hebdo)>라는 주간지를 창간한다. 이 잡지는 몇 달 후 <시네 망슈엘(Sine mensuel)>이라는 월간지로 바뀌게 된다. 2014년 필립 발은 잡지가 거의 매번 조롱했던 프랑스의 당시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Nicolas Sarkozy)의 동의하에 프랑스 인터(France Inter) 라디오의 사장으로 임명되어 잡지를 떠나게 된다. 그의 후임으로 2015년 1월 7일 살해될, 작가 샤르브가 취임하게 된다. 

잡지의 재발간 이후 <샤를리 앱도>에서 국가 검열의 문제는 더 이상 없었다. 이런 문제가 더 이상 핵심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잡지의 출간에 대해 사람들과 단체들이  48번이나 법정에 제소하면서 문제가 야기된다. 이러한 법적 소송들은 무엇보다 국민전선 소속의 국회의원들이 진행했다. 1998년 2월, 극우 정당의 2인자인 부릐노 메그레(Bruno Megret)와 그의 부인이자 비트롤르(Vitrolles) 시의 시장인 카트린느 메그레(Cathrine Megret)는 뤼즈(Luz)의 만화 연재물인 <작은 쥐(Petit Rat)>와 <구르드(Gourde)>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그들의 소송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유로 각하되었다. 극우에 가까운 극단적인 카톨릭 단체들 역시 교황이나 예수에 관한 캐리커처들에 대해 ‘카톨릭에 대한 비방’으로 주장하면서 <샤를리 앱도>를 고소한다. 그들은 거의 소송에 실패하고 만다. 2007년부터는 결국, 이슬람 운동 단체들이 잡지를 법정에 소송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1970년대의 대중성에는 못 미치지만 이 기간 동안 <샤를리 앱도>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잡지 초기의 주간 판매 부수인 20만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주간지의 판매부수는 상당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등장은 잡지의 발간에 또 다른 반응을 야기하게 된다. 때로,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분노를 야기하기 위해 질 낮은 그림이 이 인터넷 망을 통해 지구 전체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프랑스에서의 대중들이 살아가는 삶의 중요한 양상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18세기부터 신성한 권리를 지닌 군주가 국가를 지배했을 때 루소, 디드로 혹은 볼테르와 같은 철학자들은 카톨릭과 같은 종교의 교리와 상관없이 사유의 자유를 주장한 바 있다. 그들의 이상은 사상의 자유와 국가와 종교적 제식의 분리를 확립하는 1789년 프랑스 혁명에 그대로 드러난다. 공화주의자들, 군주제 혹은 제국주의자들로 체제가 변화되었던 19세기 내내, 이러한 종교적 지배 없는 표현의 자유는 항상 쟁점화되는 문제였다. 결국 1875년과 1905년 사이, 많은 법들이 프랑스를 다른 종교들에 대한 한 종교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법으로, 제도로 규정했다. 이후 종교는 프랑스에서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것에 관여할 수 없게 된다. 신앙들, 그것에 대한 실천 그리고 교리들에 대한 비판은 인종적 증오를 유발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허가된다.  (비세속적인) 카톨릭 기관과 (세속적인) 국가 기관의 주창자들 사이의 대립이 진행되는 동안 신문에서 카툰은 자주 격렬한 주장과 표현을 하기 위해 나타났다. <샤를리 앱도>는 그들의 적대자들로부터 ‘세속주의 놈들’이라 지칭되는 이러한 예술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잡지이다. 

1980년 이후, 신적인 법이라 불리는 샤리아(charia)가 지배하는 사회를 세우려고 하는 국제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의 등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에서 시민전쟁을 발생하게 했다. 유럽에서 프랑스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를 표한 최초의 나라들 중 하나이다. 우선 세속적인 공화국은 국민의 공공교육기관인 학교들에서 종교적 베일의 착용과 같은 이슬람적 요구들을 용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유럽에서 이슬람에 기원을 둔 많은 사람들과 유태인들을 받아들인 나라이기도 하다. 만약 이슬람 기원을 지닌 프랑스 시민들 중의 일부가 이슬람적인 이상에 집착한다면 중동의 긴장들이 프랑스의 현실에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이에 <샤를리 앱도>는 모든 대립자들을 비판하면서 잡지의 고유한 입장을 유지하고자 했다. 때로는 잘못 이해되거나 종종 조작되기까지 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대한 잡지의 풍자는 이슬람인들 전체의 견지에서 보면 일종의 공격으로 보여지곤 한다. 

2004년 영화감독인 테오 반 고흐(Tjeo Van Gogh)가 네델란드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2005년 9월 30일 덴마크의 일간지 <질랑-포스텡(Jyllands-Posten)>은 이 살해사건 이후의 언론에 관한 자유에 대한 논쟁을 표현하기 위해 예언자 마호메트에 대한 캐리커처를 싣는다. 이슬람의 어떤 지도자들은 이 그림들이 이슬람에 기원을 가진 사람들 전체를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이슬람의 대부분의 경향들(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은 마호메트의 표상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다른 일간지들은 이 그림들을 싣게 된다(이를 실은 최초의 일간지는 이집트의 신문 <알 파그르>(Al Fagr)이다). 논쟁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확산된다. 프랑스에서는 일간지 <프랑스-수아>(France-Soir)가 2006년 2월 1일 이 캐리커처들을 싣는다. <샤를리 앱도> 역시 2월 8일 잡지 필진들이 제작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이 캐리커처들을 게재했다. 이 잡지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포위된 마호메트’라는 제목으로 카부가 그린 표지화를 실었는데, 이 그림은 “바보 같은 놈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참 힘들군”이라며 한숨을 내쉬면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는 터번을 쓴 수염 난 남성을 그리고 있다. 결국 <샤를리 앱도>는 이슬람 단체들, 특히 프랑스 이슬람계 전체의 공식적인 대표체가 되기를 원하는 ‘이슬람교 프랑스 위원회’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법정에 소환된다. 2007년 3월 재판은 많은 매체들의 관심을 받았다. 소송한 사람들은 주로 덴마크 신문에 실린 그림들과 카부의 그림들을 공격했다. <샤를리>가 진행했던 공격들에 대한 증인들 중에는 이 잡지가 빈번히 조롱했던 정치적 인물들도 소환되었다. 특히 몇 달 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보수주의자 니콜라 사르코지는 “캐리커처의 부재보다는 캐리커처의 과도함을 선호한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잡지는 파리 대법원의 판사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선고내용과 함께 무죄판결을 받았다. “세속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모든 신앙들에 대한 존중은 그 신앙이 어떤 것이건 간에 종교들에 대한 비판의 자유와 함께 하는 것이다.” 판사들은 또한 <샤를리 앱도>가 이슬람교 전체를 모욕하려 했던 것이 아니고 ‘보수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일부 이슬람주의자들의 일탈적인 생각들에 대한 토론’에 관여하고자 했다는 점을 덧붙였다. 

어떤 주의자들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건 간에, <샤를리 앱도>가 강박적으로 대중의 삶에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종교들과 그 신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려던 것은 아니다. 선지자나 혹은 그를 따르는 보수주의적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니콜라 사르코지나 다른 프랑스 정치인들 역시 자주 잡지의 표지에서 캐리커처를 통해 조롱되곤 했다. 2015년 2월 사회학자 장-프랑수아 미뇨(Jean-Francois Mignot)와 셀린 고페트(Celine Goffette)는 일간지 <르 몽드>(Le Monde)에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내보였다. 2005년 1월과 2015년 1월 사이에 출간된 <샤를리 앱도>의 523개의 표지들 중 336개는 정치적인 이슈와 연관되어 있으며 38개는 종교와 연관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도 단지 7개의 표지들만이 이슬람의 변종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이 잡지는 이슬람 운동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법정에 의해 마호메트의 캐리커처가 금지될 수 없다는 선언 이후, 이슬람 단체들 중 가장 극단적인 자들은 위협적인 문자들과 사이버 공격 등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며 잡지를 공격했다. 2011년 11월 2일 잡지사의 일부 장소가 방화의 표적이 되었다. 비록 이 방화에서 희생자는 없었지만 사무실은 피해를 입었다. 아침에 <샤를리 앱도>의 표지에 “당신이 웃음 때문에 죽지 않는다면 100번의 채찍질을”이라고 마호메트가 선언하는 장면을 담아 출간했던 날이었다. 프랑스 경찰의 행동에 대해 규칙적으로 비판해왔던 이 잡지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경찰의 공권력의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2013년 봄, 이 잡지의 발간인인 샤르브의 이름은 테러리스트 운동 단체인 알카이다가 제거하도록 지명한 10명의 리스트에 올라갔다. 2012년 샤르브는 일간지 <르 몽드>에 “나는 아이도, 부인도, 차도, 신용도 없다. 아마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 으스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는 서서 죽기를 선호한다”라고 선언했다. 

2015년 1월 7일 수요일, 총으로 무장한 두 사람이 <샤를리 앱도>의 건물에 들어와 회의실에 침입한다. 수요일은 다음 잡지 발간호의 방향을 결정하는 편집회의가 열리는 날이라 잡지의 주요 인물들이 참가하는 요일이다. 테러리스트들은 단 몇 분 만에 저널리스트, 경찰들, 건물 관리인들, 잡지의 관련자들 그리고 작가 카부, 볼랑스키, 샤르브, 티그누, 오로네 등을 살해한다. 회의에 늦게 도착한 뤼즈는 두 명의 남자가 도망가는 것을 목격했다. 목격자들은 그들이 “우리는 알카이다 소속으로 우리 선지자의 뜻에 따라 복수했다”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다. 테러의 소식은 급속히 퍼져 나갔다. 프랑스는 이러한 폭력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50년이 넘도록 프랑스 시민들과 동반했던 카부와 볼랑스키와 같은 인물들은 이제 그들의 가족처럼 되었다. 샤를리 앱도의 진보적 사상들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나이든 어떤 사람들조차 “그들은 그랑 뒤뒤쉬(Grand Duduche)를 살해했다”라고 슬픔을 토로했다. 당일 저녁, 만 여 명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테러가 일어난 장소에서 삼 백미터 떨어진 공화국(Republique) 광장에 모여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표현의 자유, 웃음의 자유, 그리고 세속성(정교분리)의 원칙이 위협받았음을 느꼈다. 이틀 후인 1월 9일 두 테러리스트의 공모자가 유태교의 규칙에 따른 상품들을 파는 유태 식료품점 카셔(kasher)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살해한다. 일요일인 1월 11일 공화국의 원칙들을 지지하는 행진이 벌어졌는데, 여기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혹은 신앙인들을 가리지 않고 400만 명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이민정책을 비난하기 위해 이 잔혹극을 이용하고자 하는 극우성향의 국회의원들은 이 행진에서 배제되었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피켓이 도처에 보였다.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먼 <샤를리 앱도>는 우상처럼 숭배되어졌다. 결코 타협하지 않던 어떤 잡지의 아이러니한 운명이기도 했다. 

1월 14일 수요일, <샤를리 앱도> 1,178호가 가판대에 등장한다. 학살된 편집위원회에 에서 살아난 멤버들은 “생존자들의 잡지”라고 명명하면서 16페이지 가량의 잡지를 발간하는 에너지를 발휘했다. 뤼즈는 표지를 두 형식으로 구성했는데 윗 부분의 제목에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라고 적혀 있고, 아랫부분에는 마호메트가 유명한 구호인 “나는 샤를리다”라는 종이를 들고 울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모욕적이라고 거부되고 있는 이 그림은 이슬람 세계에 새로운 폭력들을 추동시킨다. 프랑스 밖, 특히 앵글로색슨 계열의 언론들은 이 그림이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를 거부한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이 진정 모욕적인 것일까? 혹은 국제적인 매체들의 일부가 극단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한 것인가? 한 달 후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지에 빌렘이 그것을 그리고 있듯이 작가들과 기자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테러리스트가 그들을 지배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를 상실할 준비가 될 순간에서야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2015년 초 <샤를리 앱도>는 빈사상태이다. 독자들의 숫자는 3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테러 공격과 상관없이 잡지의 미래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1,178호는 강력하게 지속되는 요구로 7백만 부를 출간했다. 이 기록은 프랑스 언론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샤를리 앱도> 잡지에는 300만 유로 이상의 기부가 이루어졌다. 이 기부금은 테러로 희생된 자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분배되었고, 잡지의 지속적인 출간을 위한 새로운 안전한 건물의 건축자금으로 사용되었다. 

몇 주간의 휴간 후 <샤를리 앱도>는 2015년 2월 25일부터 주간지로서의 리듬을 회복했다. 하지만 편집위원회의 구성은 쉽지 않았다. 잡지는 이제 1월 7일의 테러로 부상당한 작가 리스(Riss)가 이끌게 되었다. 격렬한 압력을 받은 뤼즈는 경찰의 삼엄한 경비 하에 생존하고 있으며 5월에 퓌튀로폴리스(Futuropolis) 출판사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만화 작품을 발간했는데, 이 작품의 그림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불안들과 테러 공격에 대한 강박증적인 그의 비전을 표현했다. 그는 잡지가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기 전인 2015년 10월, 이 잡지를 떠났다. 

새로운 작가들이 <샤를리 앱도>에 합류했다. 선배들의 재능을 그들이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래가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잡지는 조작들과 오해들의 표적으로 머물고 있다. 2015년 9월 리스의 작품은 이주한 쿠르드족 한 아이의 익사사건과 맥도날드 레스토랑의 광고판이 보여주는 서구사회의 소비주의를 대립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잡지 안에 실린 이 그림은 확실히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고국이 유발하고 있는 폭력에서 탈출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유럽이 행하고 있는 정책들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저항감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다. 악의를 지닌 어떤 사람들은 <샤를리 앱도>에 대한 새로운 분노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잡지가 아이의 익사사건을 조롱하고 있다는 메시지들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대중들에게 퍼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직한 의도의 증거로써, 이 그림이 잡지의 표지에 실린 것처럼 편집해놓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샤를리 앱도>가 인종주의적 잡지라는 오늘날의 주장은 비열한 희극에 닮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파간다는 효율성이 매우 높은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살인자와 희생자 사이의 역할들을 역전시키는 기술은 오래된 것이다. 스페인 시민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파시스트 프로파간다는 프랑코(Franco)장군의 군대와 연합한 독일 비행기가 게르니카도시를 폭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공화주의자들이 이 도시의 폭격자들이라고 국제 언론이 믿게 하는데 성공한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로파간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피카소는 그때 그의 유명한 작품인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한국의 독자여러분, 이렇게 끝까지 너무나 긴 글을 읽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2015년 1월 16일에 뤼즈가 남긴 말로 나는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전 세계의 카메라가 지켜보는 그의 친구 샤르브의 장례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샤를리라고요? 그것을 증명해 봅시다. 크레용을, 종이를, 스캔본을, 컴퓨터를 선택하세요... 그리고 글로, 그림으로, 비디오로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표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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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그로스 베르타> N°72, 1992년 6월 11일, 카뷔의 표지 
"지스카르-시라크 : 이혼", "젖을락 말락, 설락 말락” 자크 시라크는 지스카르 데스탕의 첫 번째 총리였다. 그는 이후의 선거에서 당선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야당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1981년 프랑수와 미테랑을 상대로 한 선거에서 대통령이 패배하도록 방조했다. 결국 2005년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로스 베르타>는 샤를리 앱도가 부흥하는 계기가 된 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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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 1992년 7월 카뷔의 표지.
“우르바, 실업, 혈우병, 슈퍼페닉스” “그리고 돌아온 샤를리 앱도!” “라 그로스, 안녕...” 
페이지 가장 위, 당시 불미스런 사건 목록이 줄 지어 나열되어 있다. 우르바(사회당의 불법 자금 사건), 실업, 혈우병(혈우병 환자들에게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인 것을 알면서도 수혈한 사건), 슈퍼페닉스(핵 프로그램의 실패)... 당시 두 번째 임기에 있던 미테랑 대통령이 이마를 닦고 있다 : “그리고 돌아온 샤를리 앱도!” 칸 안의 글을 통해 필립 발이 <그로스 베르타>의 몇 참여자가 샤를리 앱도를 창간하기 위해 떠난 일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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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뷔가 그린 필립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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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57, 1995년 6월 25일, 카뷔의 표지.
“국민전선 (FN)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 금지해!” 샤를리 앱도는 장-마리 르펜이 이끄는 극우 정당, 국민 전선을 금지하기 위한 청원서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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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712, 2006년 2월 8일, 카뷔의 표지.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지쳐버린 마호메드”, “병신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피곤한 일이야...” 덴마크의 캐리커처 사건이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키던 시기, 이슬람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던 샤를리 앱도의 첫 번째 표지. 그러나 어떤 이슬람신도들에게 이 그림은 극단적 이슬람과 유연한 이슬람의 경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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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DR
2011년 11월 2일, 샤르브는 방화의 표적인 된 샤를리 앱도 사무실 앞에서 바로 그 날 발간된 뤼즈가 그린 마호메트가 실린 1011호를 손에 들고 있다. “죽을 만큼 웃지 않으면 채찍 100대” 이 호에 한정해서, 잡지의 제목은 <샤리아 앱도(Charia Hebdo)>로 바뀌었고, 마호메트가 편집자인 것처럼 가장했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샤르브는 “불을 지른 이들은 진짜 이슬람교도가 아니다... 소수의 원리주의자들이 대다수인 중도적인 입장보다 더 부각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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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LMelikian
샤를리 앱도 편집진에 대한 테러가 일어난 지 4일 후, 2015년 1월 11일 벌어진 공화국 정신을 기리기 위한 행진. 프랑스 전역에서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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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78, 2015년 1월 14일. 뤼즈의 표지.
“모두 용서하였습니다”, “나는 샤를리이다”. 친구들이 살해당한 비극이 벌어진 며칠 후 혼란스런 상태에서 뤼즈가 그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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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79, 2015년 2월 25일. 뤼즈의 표지.
“… 또 다시 시작”. 입에 샤를리를 물고 있는 개가 니콜라 사르코지, 마린 르팡, 금융인, 이슬람 테러범, 천주교 주교, 유대 근본주의자, 텔레비전 등, 잡지의 천적들에게 쫒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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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217, 2015년 11월 18일. 코코의 표지.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우린 그들을 괴롭게 해, 우린 샴페인을 가지고 있거든!. 1월 7일 총격전이 일어난 구역과 같은 동네에서 벌어진 130명이 살해된 일련의 이슬람주의 테러가 벌어지고 며칠이 지난 후, 샤를리 앱도는 웃고, 축제 분위기를 멈추는 것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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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72, 2014년 12월 3일. 카뷔의 표지.
“전부 시도해 봤어... 매독만 빼고” 카뷔가 그린 마지막 표지 중의 하나로, 중앙에 장-마리 르펜이 함께 국민 전선(FN)을 이끄는 딸인 마린과 손녀 마리옹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표현했다. 카뷔는 기존 정당들에 실망하고 삽화가에 따르면 매독에 비유할 만한 극우 정당에 이끌리는 유권자의 반응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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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019, 2011년 12월 28일. 샤르브의 표지.
“2012 근하신년”, “전부 망했어, 병신 같은 것들!” 2012년 5월 대통령 선거 전, 마지막 신년 인사들을 통해 샤르브가 캐리커처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는 아주 보수적인 정치 성향과 흥분한 듯한 행동거지로 캐리커처를 그리는 이들이 선호하는 대상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샤를리 앱도 표지에 가장 자주 등장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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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브가 그린 『모리스와 파타퐁(Maurice et Patapon)』 5권의 표지
샤르브는 더러운 개와 반동적인 고양이를 둘러싼 만화 작품 시리즈, 『모리스와 파타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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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106, 2013년 8월 28일. 샤르브가 그린 표지.
“당신의 세금은 어디로 갔나?” “시리안들 아가리에...”
2013년 8월 21일, 시리아 구타(Ghouta) 지역에서 사린 가스 폭탄 공격에 의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화학 무기가 사용된 일은 시리아에 서구가 개입할 길을 열 것이라고 여겨졌다. 프랑스가 국제 연합군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0월에 실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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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24, 2013년 12월 31일. 샤르브의 표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크넬이 좋네(bonne quenelle)!" 맥락과 상관없이 이 표지그림은 인종차별주의와 동성애 혐오증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게다가 이 그림은 샤르브와  <샤를리 앱도>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해 종종 사용된다. 사실상 이 캐리커처는 장-마리 르펜과 가까운 코미디언인 듀도네(Dieudonne)를 묘사한 것이다. 장-마리 르펜은 반유대주의자, 유태인학살 부인주의자이자 동성애혐오주의자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자주 묘사된다. 듀도네의 찬미자들은 보통 나치의 인사방법을 거꾸로 표현한 ‘뒷치기’라고 부르는 동작으로 자신들을 표현한다. 크넬이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은 소시지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리용 지방의 특산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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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012, 2011년 11월 9일. 샤르브의 표지  
"증오보다 훨씬 강한 사랑" 샤르브와 한 이슬람주의자가 11월 2일에 화재가 발생한 잡지사 건물의 한 구석의 파편들 앞에서 서로 진하게 키스하고 있다. 이것이 물질적인 피해만을 야기했던 첫 번째의 테러에 대한 샤르브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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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의 번외호. 2013년 9월. 샤르브와 지네브(Zineb)가 공동작업한  "마호메트의 일생" 
샤르브가 이슬람주의자들을 문자 그대로 덮칠 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자주 신앙심이 없다고 취급받던 샤르브는 지네브 엘 라주이(Zineb el Rhazoui-모로코 출신의 종교사회학자)의 시나리오에 기반해서 코란에 따른 마호메트의 일대기를 그렸다. 여기서 목적은 많은 대중들이 이슬람 문화의 가장 근간이 되는 서적을 좀 더 잘 이해하게끔 하려는 교육적인 것이었다. 저자들은 코란 어디에서도 선지자를 그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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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177 2015년 1월 7일. 샤르브의 작품 
"언제나처럼 프랑스에서 테러는 없어" "잠깐 기다려! 새해인사를 하기 위해서는 1월 말까지 시간이 있어..." 2014년 말에 IS(Daech)와 알카이다는 이라크와 말리(Mali)에의 프랑스 군사파견을 이유로 프랑스를 겁박하는 성명서를 배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 속에 사람들이 아무리 웅성거려도 당연하게 보이는 연말의 축제 분위기들 속에서 그 어떤 극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이 작품은 게재된 잡지가 출간한 날 살해되기 전에 샤르브가 남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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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번외호. 1998년 1월, 뤼즈가 작업한 "매그레(Megret)들이 도시를 지배한다"  
뤼즈(Luz)가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이인자인 브뤼노 메그레. 그리고 법정에서 부적절하다는 판결을 받은 자신의 남편을 대신해서 비트롤르(Vitrolles)시의 시장으로 당선된 그의 부인인 카트린느 메그레(Cathrine Megret)를 캐리커처한 만화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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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244, 1997년 2월 19일. 뤼즈의 표지작품  
"드브레(Debre)법 특별호" "여보세요? 경찰청이죠? 그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고...". 1997년 초, 내무부장관인 장-루이 드브레(Jean-Louis Debre)가 프랑스에서의 외국인들의 거주를 좀 더 효율적으로 컨트롤하기 위한 일련의 방법들을 의회에 상정한다. 이들 중에서 외국인들을 맞이하는 프랑스인들이 경찰청에서 이들의 입국과 출국을 강제적으로 보고하도록 하는 법안이 있었다. 물론 이 법은 상정조차 되지 못했는데, 이는 샤를리 앱도의 이 표지를 손에 든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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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97, 2015년 7월 1일. 뤼즈의 표지 
"해변가의 파라노(Parano)" "이슬람주의자다!!! ? 아니, 메두사일 뿐이에요". 
테러가 일어난 지 6개월 후,  뤼즈는 테러가 야기한 정신증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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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즈의 만화작품 <카타르시스>, 2015년 4월
종종 그 어떤 텍스트도 첨가하지 않은 만화에서 짧은 이야기들을 이어가면서 뤼즈는 테러의 정신적 외상을 보여주고 있다. 1월 7일이 자신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상했던 시간보다도 자신의 파트너와 침대에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지각이 그의 삶을 구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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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 1118, 2013년 11월 20일. 리스의 표지 
"언론들은 잘 될 거야... 멍청한 놈들을 자극하거든".  2013년 11월 18일, 한 정신이상자가 총을 들고 일간지인 <리베라시옹(Liberation)>에 들어와서 두 방을 발사했다. 한 사진사가 아주 심한 부상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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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348, 1977년 7월 14일. 빌렘의 표지
"세상에 이럴 수가! 이번 주에는 아민 다다(Amin Dada)가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 "사냥만 했을 뿐이야"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이디 아민 다다(Idi Amin Dada) 장군이 우간다에서 독재정치를 휘둘렀다. 우리는 그를 ‘캄팔라(Kampala)의 괴물’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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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303, 8 avril 1998년 4월 8일. 빌렘의 표지  
"르완다(Rwanda), 미테랑의 숨겨진 딸" " 여보세요, 미셀 필드(Michel Field)? " 
르완다에서 벌어진 인종학살 시작일의 4번째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빌렘은 고통스럽지만, 이 사건에 프랑스 권력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1994년, 프랑소와 미테랑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같은 해 프랑스의 언론은 미테랑의 외도로 태어난 숨겨진 딸인 마자린 패뇨트(Mazarine Pingeot)의 존재를 까발렸다. 미셀 필드는 기자이자 이 시기 텔레비전의 유명한 토론 진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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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앱도>  N°1180, 2015년 3월 4일. 빌렘의 표지 
"국민전선(FN)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근본부터 악마성을 근절하자" 2011년 1월 이후 마린 르펜은 자신의 아버지인 장-마리 르펜의 활동을 이어받아 극우정당인 국민전선당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주장하던 반유태주의를 취하는 것에서 거리를 두면서, 그리고 사회적 측면의 정치적 프로그램들을 유입하면서 이 당의 악마성을 줄여나가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의 근본적인 인종차별주의는 이민자들에 대해 적대적이다. 빌렘은 국민전선이 여전히 극우정당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이 당의 중심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젊은 신나치를 스킨헤드족으로, 그리고 그들의 실제적인 폭력적 의도들을 야구방망이로, 대중들에게 속이려고 하는 것을 천사의 날개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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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라시옹>을 위한 빌렘의 작품, 2015년 2월
"바보 같은 짓들을 하지 않도록 너를 돕기 위해 나는 너의 머리에 자리 잡고 있어"
빌렘은 샤를리 앱도의 편집회의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있었기에, 1월 7일의 참사를 비껴났다. 그는 오늘날 샤를리 앱도의 창간 멤버들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그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발휘하고 있는 압박에 지성인들의 머릿속에서 커나가고 있는 자기검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