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이’, ‘BL’ 그리고 최근에 얘기되는 ‘브로맨스’까지 남성 동성애물을 지칭하는 단어는 여러 개다. 이러한 작품을 향유하는 계층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또한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본다면, 다양해지는 용어와 의미의 세밀화는 곧 동성애 소재의 작품이 특정한 장르로서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과 다름 아닐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동성애 만화와 관련된 몇 가지 용어들의 개념을 살펴보고, 특히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BL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들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BL(Boy’s Love의 줄임말이다)’은 학계나 미디어를 통해 규정화된 개념은 아니다. 즉, 이러한 작품들을 즐겨보는 독자들 사이에서 전파되어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들과 혼재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한일 양국의 BL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해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BL과 유사한 혹은 그보다 앞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로서 우리는 ‘야오이(やおい)’에 보다 친숙할 것이다. 이에 대해 네이버 오픈사전에서 검색해보면 “남성 사이의 동성 연애물, 혹은 그것을 창작하고 즐기는 문화를 통칭하는 말”로 정의내리고 있다. 즉,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BL이라는 단어와 의미상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야오이’라는 말이 그 자체로 일본으로부터 직수입된 용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국내 독자들에게는 얼마간 거부감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주제 없고, 소재 없고, 의미가 없다’는 일본어 ‘야마나시(やまなし)’, ‘오치나시(おちなし)’, ‘이미나시(いみなし)’ 등의 세 글자로부터 앞글자만 가져와 만들어진 조어이기 때문에 애초에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이러한 창작물을 향유하는 독자들 또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해온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BL이라는 용어의 등장은 야오이 혹은 동성애 만화로부터 단순한 용어의 이전이 아니라 남성 동성애 만화를 하나의 장르로서 일정 부분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 야오이 독자들이 폐쇄적인 집단이었다면, 상대적으로 BL 독자들은 보다 열린 공간에서 즐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의 밑바탕에는 야오이가 대부분 패러디 형식을 지닌 2차 창작물인데 반해, BL의 경우는 대체로 원천 창작물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어 보인다. 즉, 야오이는 유명 원작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생산과 유통 그리고 소비 시장이 ‘동인’이라고 하는 상업 무대와 구분된 특정한 영역에서 이뤄졌고, 패러디라는 작품의 성격상 원작이 지닌 설정을 창작자와 소비자가 모두 알고 있다는 가정 아래 유통이 이루어지므로 ‘주제, 소재, 의미가 없다’는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대부분 원작 형태인 BL은 야오이에 비해 필연적으로 서사성이 강화되며, 유통경로 또한 잡지 연재 혹은 다른 출판물과 동일한 판매시장을 통해 소비가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BL이 지니는 이러한 특징에 대해 김효진은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야오이와 대비되어 야오이는 주로 패러디나 2차 창작, 그리고 BL은 상업 출판된 작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굳어졌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편, BL은 ‘Boy’s Love’의 약자, 즉 소년 혹은 남성들 간의 연애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동성애 만화’와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가령, 여성 동성애 만화만을 따로 분류하는 이른바 ‘백합물’ 역시 동성애 만화의 지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BL이라는 용어가 작품의 등장인물과 내용, 즉 콘텐츠 중심으로 고착화된 개념이라고 한다면, ‘여성향’이라는 용어는 작품을 실제 소비하는 계층에 관계된 용어로 볼 수 있다. 즉, 남자 캐릭터 하나에 여러 명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함으로써 남성독자들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이른바 ‘하렘물’이 대표적인 ‘남성향’ 작품이라고 한다면, 남자 캐릭터들만 즐비한 BL은 여성독자들의 잠재된 욕구를 채워주는 대표적인 여성향 작품이라 할 것이다.
야오이나 BL과 비슷한 개념으로 자주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로 ‘브로맨스(bromance)’가 있다. 이는 ‘Brother Romance’의 약자로 야오이 혹은 BL처럼 특정한 장르로서 규정되기보다는 작품 속에서 남자 주인공들끼리의 매우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연애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진한 우정’까지도 이러한 영역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한, BL이나 야오이가 만화, 애니메이션 혹은 소설 등 몇몇 장르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인데 반해, 브로맨스는 드라마와 영화에 이르기까지 훨씬 대중적이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특징이 있다.
그 외 ‘공X수’, ‘커플링’, ‘총수’ 등과 같은 용어들도 존재한다. 우선, ‘공X수’는 야오이에서 비롯된 동성애 만화에서 보이는 특정한 문법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로 보다 남성적이고 강인한 특징을 보이는 캐릭터가 전형적인 ‘공’의 역할을 하게 되며, 남자이지만 외형이나 성격적인 면에서 여성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수’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남자 캐릭터들에게 ‘공’과 ‘수’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남자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삼는 ‘팬픽(fanfic, fan fiction의 줄임말이다)’에서도 자주 나타났던 모습이다. 특히 팬픽에서는 그 대상이 되는 아이돌이 여러 명으로 구성된 그룹일 경우에 ‘공’의 역할과 ‘수’의 역할을 바꾸며 다양한 ‘커플링’의 형태가 시도되기도 한다. 또한, 항상 ‘수’의 역할을 맡게 되는 캐릭터를 일컬어 ‘총수’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 BL 만화의 시작은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에서는 흔히 ‘소녀만화’라고 일컬어지는, 여성독자들에게 최적화된 내용의 작품들이 많은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소녀만화를 주도했던 일군의 여성작가들을 가리켜 ‘24年組(24년조)’(이들은 1949년, 즉 일본 연호로 ‘쇼와(昭和)24년’을 전후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 불리는데, 이들 가운데 남자들의 동성애(이후 이 글에서 말하는 ‘동성애’는 모두 남자 동성애를 가리킨다.)를 다루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다케미야 게이코(竹宮惠子)의 <바람과 나무의 시(風と木の詩)>, 하기오 모토(萩尾望都)의 <토마의 심장(ト?マの心?)>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소년애’라고도 불려지는 이들 작품들은 이후 전개되는 동성애 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하기오 모토의 활약상에 대해 요시히로 코스케는 <일본만화 현대사>에서 “하기오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의 하나인 <11월의 체육관>은 소녀가 아닌 소년을 주인공으로 그린 것으로 소녀끼리의 동성애를 그린 종래의 소녀만화의 상식을 깬 것이기도 하다.”고 밝힌 바 있다.
△ 좌측부터 다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
소녀만화의 일정한 부분으로서 출발했던 일본의 BL만화가 큰 변화의 시점을 맞이한 것은 1978년의 일이다. 그해 동성애를 주요 작품 소재로 다루는 만화잡지 〈JUNE〉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문매체의 등장은 기존에 여러 소녀만화 잡지에서 뿔뿔이 흩어져 발표되던 BL 작품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장르로서 동성애 만화가 자리 잡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JUNE〉의 역할에 대해 안은선은 “1978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격월간 잡지 〈JUNE〉의 등장은 당시 많은 여성 독자들의 가슴 뛰는 여심을 불어넣었다.”면서 “〈JUNE〉라는 만화잡지를 통해 BL 만화가 일본 만화시장에서 빠르게 자리매김을 한 것은 사실이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당시 동성애 만화라는 장르 자체를 ‘쥬네계’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 매체가 지니는 상징성을 확인할 수 있다.
△ 좌측부터 〈JUNE〉의 창간호(1978년 10월)와 최신호(2016년 11월)
1970년대에 〈JUNE〉를 통해 상업지 무대로의 확장을 보여줬던 일본의 BL만화는 1980년대에 들어와 동인지 시장을 통해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인기 있는 원작을 패러디한 ‘야오이’가 성황을 이룬 것이다. 이른바 ‘커플링’이나 ‘공’과 ‘수’처럼 캐릭터 역할의 문법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원작이 있는 작품을 2차 창작한 형태가 야오이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원작을 생산해내는 주류만화계와는 구분되는 시장을 만들어나간다. 문학에서 흔히 얘기되던 ‘동인(同人)’이라는 단어가 주류 만화계와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즉, 동인시장이나 동인녀 등 기존 만화계와 구분되는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가 나타났다. 동시에 동인시장에서 패러디물을 발표하다가 주류 만화계로 데뷔한 작가들도 등장하기에 이른다.
야오이로 대표되는 패러디물이 1980년대 동성애 만화의 주류를 이루었다면, 1990년대에 들어와 나타나는 특징은 창작물로서 동성애 만화가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동성애 만화, 즉 오늘날 이야기하는 ‘BL’이 정착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수십 개의 BL 잡지가 등장하였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하나의 장르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볼 수 있다.
BL만화의 주 독자층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한국 BL의 전개는 우선 ‘순정만화’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 우리나라 순정만화의 출발은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권영섭, 송순히, 장은주, 엄희자, 조원기 등이 여성독자를 위한 내용의 작품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이르러 대중만화의 유통경로가 대본소로 집중됨에 따라, 순정만화는 침체기를 겪게 된다. 이로 인해 1970년대 말에는 순정만화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나라의 순정만화를 대체한 것이 이른바 일본만화의 해적판들이다. 즉, <베르사유의 장미>, <캔디캔디>와 같은 일본 소녀만화 대작들이 들어와 한국 여성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한데, 이 시기에 BL작품도 일부 함께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박성희는 “일본 동성애 만화는 1980년대부터 암암리에 번지고 있었으며 1980년대 말 <절애(絶愛)> 등의 일본 BL 만화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두터운 여성 팬층을 형성하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해적판으로 들어왔던 일본 BL이 한국 BL의 출발에서 큰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 오자키 미나미의 <절애>
이후 최초의 국산 BL만화가 등장한 것은 1990년의 일이다. 이때 이정애의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가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이 우리나라 BL만화의 공식적인 출발점이 되고 있다. (물론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 한국 아마추어 동인의 역사 속에서 보다 빠른 출발점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상업지를 통해 정식적으로 유통된 것, 그래서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전문잡지로 얘기되는 <르네상스>에서 1990년 2월부터 11월까지 연재되었으며, 1994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남자 주인공들 사이에 나타나는 우정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는데, 육체적인 관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감정선과 대사 등을 통해 동성애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주요 등장인물 또한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영국인으로 등장시킨 점은 이국적인 배경과 캐릭터를 자주 선보이는 순정만화의 장르적 특징을 반영해 보이는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좌측부터 이정애의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 <열왕대전기>,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
이러한 모습은 다음 작품인 <열왕대전기>,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 등으로도 이어진다. <열왕대전기>는 1993년 잡지 <터치>에서 연재를 시작하여 잡지 <이슈>로 자리를 옮겨 1998년까지 연재를 이어갔던 장편이다. 이야기는 세기말의 풍경이 담긴 도시를 배경으로 ‘크로스 유니온’이라는 천재들만 입학하는 학교에서 펼쳐진다. 또한 영국계, 프랑스계, 독일계 등 다양한 혈통의 소년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한국계인 강개토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한편, 1998년에 발표된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 역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 비교적 타깃연령층이 높았던 <화이트>에 연재되면서 성적 묘사가 다른 작품에 비해 과감하게 시도되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정애의 선구적인 작품 이 외에도 1990년대 중반에 동성애를 소재로 다룬 또 하나의 작품이 등장한다. 원수연의 〈Let 다이〉가 <이슈>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연재 도중 동성애 소재로 인해 연재 도중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그로 인해 한동안 연재가 중단되기에 이른다. 이후 2000년대 들어 연재가 재개되어 완결을 보게 되었고, 단행본은 총 15권으로 완간되었다.
△ 원수연의 〈Let 다이〉
한국만화 내부에서 동성애를 소재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부터다. 인터넷사이트 <코믹스 투데이>에 황미나의 <저스트 프렌드>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이 2000년의 일이며, 2001년에는 노경해의 <소년기>가 발표되었다. 특히 2002년에 강현준, 나예리, 심혜진, 이빈, 이영유, 화선 등 유명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앤솔리지 <유스(YOUTH)>가 출간되어 화제를 모았다. 2003년에는 <유스(YOUTH)> 2권이 나오게 되는데, 여기에는 고야성, 심혜진, 이상은, 이소영, 최경아, 한승희 등이 참여했다. 이처럼 2권까지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동성애 소재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았음을 반영해 보이는 부분이다. 2005년에는 이영희의 <절정>이 등장한다. 특히 <절정>이 한국 동성애 만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특징에 대해 김종은은 “본격적으로 남성 캐릭터 간의 성애 장면을 묘사하면서 강도 높은 수위신 연출을 시도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작품 속 인물들의 명확한 ‘공’과 ‘수’ 역할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2006년에 등장한 유하진의 <완절무결하게 사로잡히다> 역시 만화독자들 사이에 큰 관심을 받으며 장기연재에 들어갔다. 또한 2007년에 발행된 <순애보> 2권 역시 동성애 주제의 단편들을 모은 앤솔로지로서 독자들 사이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강혜진, 나예리, 신유하, 심혜진, 이시영, 이현숙, 임주현 등이 참여했다.
△ 이영희의 <절정>
2007년에는 또 하나의 이정표가 만들어진다. 즉, 동성애 소재 작품만 발표되는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절대교감이 발간한 <뷰티풀 라이프>가 그것인데, 여기에는 박설아, 오은지, 양여진, 심혜진, 나예리 등 여러 기성작가들이 참여하였다. 또한, 공모전을 통해 신인작가도 양성한 바 있다. 무엇보다 19금으로 발간되면서 기존 순정잡지에 발표되던 BL과 내용상에서 차별화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메이저 출판사의 만화잡지들마저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던 상황 속에서 창간되었던 <뷰티풀 라이프>는 반 년간이라는 발행주기 속에서 총 4권의 책을 선보인 이후 사라지게 된다. 한편, 최근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BL 장르의 대중화 행보는 웹툰시장의 활성화와 맞물린다. <어서 오세요. 305호에>, <이게 뭐야> 등과 같이 동성애 소재 작품들이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자연스럽게 연재되기에 이르렀고, 레진코믹스, 봄툰, 미스터블루 등 대표적인 만화전문 플랫폼에서는 BL를 하나의 장르로 특화시켜 서비스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만두코믹스처럼 BL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플랫폼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모습들은 이제 BL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일 것이다.
△ 좌측부터 와난의 <어서오세요 305호에!>, 지지의 <이게뭐야>.
한국만화는 장르 전반에 걸쳐 일본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이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도 BL은 일단 용어의 직접적인 수용에서부터 더욱 긴밀한 관계를 반영해 보인다. 따라서 개별 작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 보면 한일간 BL 작품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양국의 초기 BL 작품 속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공통점으로 서양 혹은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주요 등장인물 역시 주로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가령, 일본 BL의 선구적인 작품인 <바람과 나무의 시>나 <토마의 심장>이 그러하며, <루이스씨에게 봄이 왔는가>, <열왕대전기>,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 등과 같은 한국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특징은 <캔디캔디>나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경우처럼 일반적인 소녀만화 혹은 순정만화에서 비롯되는 보편적 감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며, 한편으로 일본과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던 소재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방식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부정적이었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일본 배경과 일본인 혹은 한국 배경과 한국인이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소재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었던 일종의 전략 혹은 차선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당대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한 측면도 한일 양국의 BL 전개 과정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가령 1970년대 발원된 일본 동성애 만화는 그 시작이 당시 여성들의 자아찾기와 연결되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특징에 대해 무카이 시오리는 “소년애 작품의 시작인 1970년은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같은 해 11월 14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우먼리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라면서 “우먼리브는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성표현의 자유를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우먼리브와 소년애 작품은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성표현의 자유를 목표로 한다는 부분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으나 우먼리브는 외부(남성 및 타자)에 직접 작용하였고, 소년애 작품은 내부(여성 및 자기자신)를 향해서 간접적으로 작용했다는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성에 대한 여성의 자기주장이 사회적으로 억압되어 있을 때, BL은 그러한 억압에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본격적으로 BL 작품이 발표되기 시작하던 2000년대 초반, 유명 연예인의 커밍아웃과 성전환 연예인의 등장 등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촉매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또한, 청소년유해매체물의 구체적인 심의기준에서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않는 성관계에 포함되어 있던 ‘동성애’가 2004년에 삭제된 것 역시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변화된 것을 반영해 보이는 대목이다.
물론 한일 양국 BL에서 일정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일단 시기적으로 일본 BL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1970년대인 반면, 한국의 경우 1990년대라 할 수 있겠다. 그에 따라 수많은 BL 전문잡지가 등장한 1990년대의 일본은 이미 창작과 소비에 있어서 BL이 특화된 하나의 장르로 안정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반면, 같은 시기 한국은 아직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가령, 최근까지 한국은 독자들에 의해 소비되는 작품 상당수가 국산 창작품이 아닌 일본에서 들여온 작품이라는 사실이 창작과 소비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근래 들어 다수의 만화전문 플랫폼에서 BL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임에 따라 이러한 창작과 소비의 불균형에서 탈피, 장르적으로 안정화 되어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국은 BL 작품의 창작이 텍스트, 즉 소설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와 관련 선정우는 “한국의 BL은 성적묘사가 노골적으로 눈에 보이는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현저하게 발달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김종은(2012), 「한국 동성애 만화의 장르 특성 연구」
김효진(2013), 「한국 동인문화와 야오이; 1990년대를 중심으로」
무카이 시오리(2016), 「순애를 통해 본 BL(보이즈 러브)만화 연구」
박성희(2005), 「야오이 세계의 연구」
박세정(2006), 「성적 환상으로서의 야오이와 여성의 문화 능력에 관한 연구」
안은선(2011), 「국내 동성애 만화에 대한 현황 연구: B?L(Boys Love) 만화를 중심으로」
요시히로 코스케 저, 김보선 역(1998), 『일본만화현대사』(우용출판사)
장상용(2006. 8. 18), “원수연의 ‘렛 다이’ <풀 하우스>와 생존 게임”, 일간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