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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 만화’가 비추는 ‘오늘’의 ‘우리’

1999년 4월 3일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다. 당시 문화부와 일간스포츠가 함께 시작한 이 만화상은 당시로서는 여러 모로 파격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1991년부터 시행된 대한민국만화대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기사처럼 ‘만화에 작품이란 말을 쓰는 것조차 쑥스러웠던’ 시대, 초기 수상작은 거의 학습만화였다. 이런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화의 ‘작품성’을 논하는 상이 생겨났으니 바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다.

2018-12-26 이영희



“만화를 놓고 ‘작품’이라는 말을 쓰기가 조금 쑥스러운 게 우리 현실이다. (중략) 그런데 만화를 ‘작품’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계기가 생겨 주목된다. 바로 문화관광부가 올해 처음으로 실시한 ‘오늘의 우리 만화’다.”


1999년 4월 3일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다. 당시 문화부와 일간스포츠가 함께 시작한 이 만화상은 당시로서는 여러 모로 파격적인 것이었던 모양이다. 1991년부터 시행된 대한민국만화대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기사처럼 ‘만화에 작품이란 말을 쓰는 것조차 쑥스러웠던’ 시대, 초기 수상작은 거의 학습만화였다. 이런 시기에 본격적으로 만화의 ‘작품성’을 논하는 상이 생겨났으니 바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다. 

‘오늘의 우리 만화’가 가지는 또 하나의 파격이 있었으니, 정부가 예산을 들여 만화를 구입해 이를 공공도서관이나 해외 문화원, 대학 만화관련학과 등에 배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앞의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화가 정부 예산으로 공공도서관에 비치된다는 사실은 만화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높이는 데 크게 일조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만화를 오락성·작품성·교훈성 등 여러 측면에서 평가하는 진지한 시도라는 데서도 의의가 크다.”

출판만화의 전성기, 의미 있는 상의 등장

첫 해 수상작의 면면은 화려했다. 오랜 만화 팬이라면 누구나 엄지를 치켜 올릴만한 ‘작품’들이다. 황미나의 <레드문>과 박흥용의 <내 파란 세이버>, 문흥미의 <디스>, 권가야 <남자 이야기>, 김진 <바람의 나라>, 천계영의 <오디션>, 이애림의 , 그리고 윤태호의 <야후>다. 


작가와 제목만 봐도 왜 이 시기 만화의 작품성을 평가해 시상하는 움직임이 시작돼야 했는지 눈치 챌 수 있다. 1990년대는 한국 출판만화, 특히 잡지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만화잡지 창간 붐이 일면서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 「르네상스」 등 일본 만화잡지의 영향을 받은 잡지들이 속속 창간돼 인기를 끈다. 1990년대 초에는 당시 최고 인기였던 「아이큐 점프」가 30만부를 찍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매달 여러 편의 작품을 싣는 잡지가 호황을 맞으면서 재능 있는 신인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들은 그 동안의 대본소(만화방) 만화에서 찾아볼 수 없던 참신한 소재와 형식을 갖춘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1999년은 이런 한국만화 시장의 에너지가 조금씩 잦아들던 시기였다. 1997년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음란성 논란 이후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으로 만화가들의 사기는 꺾였고, 여기에 외환 위기와 만화 스캔본 확산 문제 등이 겹치면서 만화 산업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1980년대부터 쌓아온 잠재력은 여전해 좋은 작품들이 만화시장에 꾸준히 공급됐다. 황미나, 김진,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천계영 등 여성 작가들은 이 시기 여성을 만화의 주소비층으로 끌어들였다. 첫 해 ‘오늘의 우리 만화’ 수상작인 <레드문>, <디스>, <바람의 나라>, <오디션> 등은 이런 탄탄한 토양이 길러낸 걸작이었다. 

‘오늘’, ‘우리’를 담는다는 상의 취지에 가장 적합했던 작품을 고르라면 윤태호의 <야후>를 들 수 있겠다. 청소년 만화잡지 <부킹>에 연재됐던 <야후>는 건물 붕괴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를 느껴 무차별적 테러를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붕괴 등 압축성장의 그늘을 드러낸 사건을 소재로,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했다. 이후 <이끼> <내부자들> <미생> 등으로 이어지는 걸작을 연이어 탄생시킨 윤태호라는 작가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별 일 없는’ 일상이 만화가 되는 시대

2000년대 초반은 한국 만화계에 극심한 지각변동이 발생한 시기였다. 만화대여점의 할인 경쟁과 잡지의 몰락으로 안정적인 유통망과 독자를 확보한 학습만화가 출판만화의 중심에 서기 시작한다. 더 큰 변화는 웹툰의 등장이었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만화 플랫폼의 등장으로 만화를 그리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일정 기간의 적응기를 거쳐야했다. 출판만화 시장에서 활약하던 여러 작가들이 웹툰으로 이동하는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장기 휴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시기 ‘오늘의 우리 만화’에도 이 같은 혼란이 그대로 나타난다. 2000년 수상한 김수용의 <힙합>이나 2002년 양재현, 전극진의 <열혈강호>, 임재원의 <짱>, 김혜린의 <불의 검>, 형민우의 <프리스트> 등은 출판 만화 시대의 막바지 대형 히트작들이다. 200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2000년의 만화계를 결산하면서 ‘<열혈강호>, <짱> 변함없는 1, 2위’라는 제목을 달았다. “코믹스북가이드에서 집계한 2000년의 만화대여 순위와 만화전문서점 한양문고의 판매 순위에서 두 작품이 각각 1, 2위를 차지해 변함없는 인기를 과시했다”면서 “두 작품은 무협과 학원물로 장르가 다르지만 인기를 끈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야기 전개와 구조는 뻔히 보이는 내용이지만 청소년들의 감각에 맞는 비트와 빠른 스피드를 강조했다는 점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 기사는 <열혈강호>와 <짱>의 인기 뒤에는 만화계의 깊은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말한다. 두 작품 모두 90년대 후반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작품이고, 몇 년 간 이 작품들이 계속 인기 만화 톱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그 동안 이 만화들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 기사는 “만화 대여점이 97년 1만5000여개에서 지난해 말 7000여개로 줄었을 정도로 만화 수요도 급감했다. 올해 만화계에는 구조조정의 한파가 몰아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불황의 골이 깊다”라고 당시 만화계의 흉흉한 분위기를 전했다. 

이 작품들과 함께 학습만화 여러 편이 수상작에 이름을 올린다. 특히 2002년에는 홍은영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양동석의 <이야기로 배우는 만화 중국사> 등 학습만화가 대거 수상한다. 2003년 수상작인 허영만의 <식객>은 2002년 9월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된 작품으로, 이제는 거의 사라진 ‘신문 연재만화’의 마지막 인기작이었다. 


2004년엔 웹툰의 1세대 작가라 할 수 있는 강풀의 <순정만화>가 ‘오늘의 우리 만화’에 이름을 올린다. 2003년 2월 포털사이트 다음이 뉴스 분야를 미디어다음으로 개편하면서 옴니버스 형식의 웹툰이나 시사만화 등을 싣는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순정만화>는 이 플랫폼에서 페이지뷰 3200만 건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순정만화>의 성공 이후 다음은 작가 진을 대폭 늘려 본격적으로 웹툰 서비스를 시작한다. 낯설지만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새로운 플랫폼이 탄생한 것이다. 


웹툰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서사나 상상력으로 무장한 픽션 뿐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적극적으로 만화의 소재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진입 장벽이 비교적 낮은 인터넷이란 플랫폼에서 ‘공감’을 목적으로 한 ‘일상툰’이 새로운 인기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웹툰의 시조’라고 불리는 작품들인 ‘스노우캣’(1999)이나 ‘마시마로의 숲’(2000) ‘파페포포 메모리즈’(2000) ‘마린블루스’(2000) 등은 귀여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작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재밌는 에피소드를 담았고 캐릭터를 살린 부대상품들을 제작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오늘의 우리 만화’ 수상작 명단에도 웹툰 히트작들이 매해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 2005년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2006년 박기홍, 김선희의 <불친절한 헤교씨>, 메가쇼킹만화가의 <애욕전선 이상 없다>, 2007년 윤준식, 김동훈의 <베리타스>, 강풀의 <그대를 사랑합니다> 등이다. 웹툰 시장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웹툰 소재도 일상의 작은 이야기에서 서사를 갖춘 드라마, 역사물, SF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재밌는 건 여성들을 주요 독자로 하는 순정만화는 2000년대 후반까지도 웹툰 플랫폼보다는 잡지 연재로 히트한 작품이 다수였다는 점이다. 2007년 수상작인 한승원의 <프린세스> 나 윤미경의 <하백의 신부>, 2009년 수상한 정혜나의 <탐나는 도다> 등은 2010년대까지 살아남은 만화잡지 <윙크> 연재작이었다.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만화의 등장, ‘미생’ 그리고 ‘송곳’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의 우리 만화’ 역대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를 휩쓸고 간 여러 가지 고민과 욕망들을 살펴볼 수 있다. 2001년 수상작인 <삽 한 자루 달랑 들고>는 경쟁적인 도사의 삶을 떠나 ‘귀농’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시대를 담고 있다. 같은 해 수상한 <술꾼>은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고단한 현실을 소주 한잔으로 달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2005년 상을 받은 <로또블루스>는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로또 광풍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2010년대 들어 사회를 반영했을 뿐 아니라 사회를 뒤흔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들이 등장했으니, 2012년 수상작인 윤태호의 <미생>과 2014년 상을 받은 <송곳>이다. 두 작품 모두 연재 당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됐던 <미생>은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바둑판 위에서 7년을 보냈으나 입단에 실패하고 사회에 내쳐진 장그래라는 청년이 주인공이다. 그가 ‘낙하산’으로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회사 생활이라는 새로운 바둑판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비정규직’이라는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과 함께 ‘누군가에게는 톱니로, 개미로, 부대로 불리는’ 샐러리맨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만화로 사랑을 받았다. 


한국사회에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였다. 대량 해고 사태 이후 기업들은 노동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파트타임이나 임시직 등의 비정규직을 대거 채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급격히 증가한 비정규직은 2018년 11월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 중 33%를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다. 임금을 받고 있하는 근로자 3명 중의 1명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야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 대우 개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의 논의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현장에서 비정규직들이 체감하는 설움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더구나 취업난이 극심한 상황 속에서 젊은 구직자들은 정규직과 상당한 차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비정규직 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안전망이라고는 없는 사회에 보호장비 하나 없이 던져진 청춘들. <미생> 속의 장그래는 이런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2014년 수상작인 최규석 작가의 <송곳>은 노동문제에 한 단계 더 깊이 접근한다. 2003년 있었던 까르푸의 파업 실화를 바탕으로, 외국계 대형 마트에서 벌어지는 부당 해고와 그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간 본성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바탕으로, 노동 운동과는 무관해 보였던 사람들이 연대의 중요성을 깨닫고 투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담아냈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문제들을 리얼하게 보여줘 ‘노동문제 교과서’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을 정도다. 

윤태호, 최규석 작가 두 사람은 줄곧 이 사회의 ‘비주류’에 시선을 두고, 이들의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끌어올려 작품으로 만들어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오늘의 우리 만화’ 첫 해 수상작 <야후>를 그린 윤태호 작가는 <이끼>를 거쳐 <미생>으로 돌아왔고, 최규석 작가 역시 2004년 수상작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2009년 상을 받은 <100℃> 등에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취급을 당했던 이들을 작품으로 불러냈다. 

이제 여성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하고 있는 여성만화들 역시 이런 움직임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여기서 ‘여성만화’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다루거나, 여성 독자들이 주로 소비하는 만화를 통칭한다.) 오랜 기간 ‘순정만화’라는 테두리 속에서 속에서 별 박힌 큰 눈으로 사랑을 찾아 헤매던 여성들이 갑자기 공부하고 노동하고 싸우는 주체로 등장해 ‘지금, 여기,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지금의 여성만화들은 하루아침에 등장하지 않았다. 과거 ‘순정만화’로 분류되던 만화 속에서도 여성들의 캐릭터는 계속 변화해왔고, 2000년대 들어 전혀 다른 주인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6년 ‘오늘의 우리 만화’에 선정된 <불친절한 헤교씨>를 보자. 뒤늦게 취업을 한 30세 주인공 소헤교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차별이 내재화된 사회에 맞서 싸우는 ‘친절하지 않은’ 여성으로 그려진다. 2010년 수상작인 <하이힐을 신은 소녀>의 주인공 경희 역시 주변의 기대나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구축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소녀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인기를 얻은 만화 속 여성들은 훨씬 다양하고 현실적이며, 강하다. 2014년 수상작인 <먹는 존재>의 주인공 유양은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부당한 대우에는 공격적인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주인공으로 독자들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줬다.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부조리한 성차별이나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억압을 고발하는 내용의 작품들도 크게 늘었다. 2018년 수상작 중에는 <심청전>을 재해석한 <그녀의 심청>이 있다. 이 만화에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효녀 심청이는 간 데 없고, 가난과 차별에 찌들어 악만 남아버린 심청이 등장한다. 사회 최하층으로 살아가는 심층을 구원하는 건 또 다른 종류의 억압에 시달리는 장 승상의 부인이다. 신분은 다르지만, 여성이라는 공통의 제약 조건을 가진 두 사람의 연대가 이 만화의 주제가 된다. 또 다른 수상작인 난다 작가의 <어쿠스틱 라이프>는 2010년부터 무려 8년이나 연재된 일상물로, 여성의 일과 가사일, 육아 등에 대한 고민을 유머와 버무려 설득력 있게 전한다.


2017년 수상작을 보면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한국 여성들이 결혼 후 맞닥뜨리게 되는 가부장제의 문제를 생생하게 다뤄 큰 반향을 일으킨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있다. 단지 작가의 <단지>는 가정 내 성차별과 폭력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고 나온다. 딸이란 이유로 집안에서 순종과 양보를 강요당하고, 아버지와 오빠에게 욕설과 손찌검을 당하며 자라난 여성이 자기혐오와 싸우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제목이 알려주듯 이 만화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지금 어느 시대인데 이런 집이’ 싶은 이야기인데도, “바로 내 이야기”, “펑펑 울었다”는 여성 독자들의 고백이 이어져 작가와 편집부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미역의 효능 작가가 그린 <아 지갑놓고 나왔다>는 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딸 노루와 홀로 남겨진 엄마 선희의 이별 이야기가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전개되는 작품이다. 성폭력, 낙태, 미혼모 등 민감한 이슈를 너무나 담담한 어조로 그려 독자들을 울린다. 


2016년 ‘오늘의 우리 만화’ 중에는 <혼자를 기르는 법>, <유미의 세포들>, <여중생A>가 여성만화로 분류될 만하다. <혼자를 기르는 법>은 지금 한국 사회에 ‘20대 여성’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는 다룬 작품이었고, <유미의 세포들>은 연애 이야기지만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명확하게 선을 그은, 연애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해가는 한 여성의 성장담을 그린다. <여중생A>는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시달리고, 학교에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 사귀는 데 여려움을 겪는 여중생 미래가 닫힌 문을 열고 나와 현실의 자신과 화해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다뤘다. 

왜 최근 3~5년 사이 새로운 여성만화들이 대거 등장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만화 속 여성의 변화상을 연구한 논문 ‘코믹스 페미니즘: 웹툰시대 여성만화 연구’(조경숙·박희정 공저)에 따르면 한국에서 여성만화가 약진한 시기는 2015년이었다. 2015년은 온라인에서 성차별 논쟁이 거세게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고, 성범죄의 온상인 사이트인 소라넷 폐쇄운동 등을 통해 성폭력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진 때였다. 2016년에는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그동안 의식했으나 말하지는 못했던 차별과 폭력들을 민감하게 캐치해 자신의 언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만화가 보여줄 ‘내일’의 ‘우리’는?

1999년의 기사를 다시 읽어 본다. 그로부터 20년, 이제 만화에 ‘작품’이라는 말을 쓰는 건 전혀 쑥스럽지 않은 일이 됐고, 다른 장르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과감한 상상력과 서사를 지닌 만화들이 매달 수십 편 씩 쏟아지는 시대가 됐다. 더 많은 이들이 만화를 그리고 읽을수록, 만화 속에 담기는 ‘오늘’과 ‘우리’의 영역은 확장되고 풍부해져 간다. 만화판에서 일어나는 여러 욕망과 가치의 충돌 역시 이런 다양성의 한 증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대하게 된다. ‘내일의 우리 만화’에 그려질 나와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어떤 놀라운 이야기가 또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들 것인지.